2026년 영성일기

근심이 기쁨이 되다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3. 25. 07:12

2026.3.25. 수요일

요한복음 16;16-24

 

- 제자들의 의문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게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 근심 뒤의 기쁨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 예수님의 이름과 기도 응답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본문을 읽다 보면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선문답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설명했으면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했을까?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떠나가심은 불안과 두려움과 이후의 막막함 등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증과 막연한 불안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사람에게 장래 일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유한성으로 인해 늘 이런 것이다.

주님은 산모가 출산 앞에 두려움과 출산 후의 기쁨으로 설명하신다.

고통보다 기쁨이 더 커서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기쁨을 말이다.

산모에게 아이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최고의 기쁨이듯이 말이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그리하면 받으리라라 약속하신다.    

 

주여 

인간의 불안을 잠재우시고 다시 질문할 필요도 없도록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살아갈 필요를 구할 때마다 주의 이름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최고의 기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날마다 때마다 하나님께 구할 길을 열어 주시고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고의 기쁨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내주하심을 믿습니다.

그 성령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며 인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나의 기도를 도우셔서 신실하게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나의 이 답답함 마음을 헤아려 주시고 평강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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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의 슬픔, 영원한 기쁨 ]

 

제자들은 잠시 예수님을 보지 못할 것이나,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의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16-19절)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한 전환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수근거립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문을 아시고, 그 의문을 풀어 주기위해 입을 여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지와 혼란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할 때

주님은 우리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신음과 의문까지 다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가 묻기 전에 찾아오셔서,

우리 눈 높이에 맞춰 진리를 설명해 주시는 친절한 스승이십니다. 

 

(20-22절)

제자들이 곧 큰 슬픔을 겪을 것을 아시지만, 그 근심이 장차 기쁨으로 바뀔 것을 약속하십니다.

슬픔과 절망감을 안겨 준 십자가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산모가 생명의 환희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잊는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날 때

제자들의 슬픔은 세상이 빼앗을 주 없는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없애는 분이 아니라 고통을 기쁨의 재료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지금 겪는 아픔이 크다면, 장차 주님이 주실 기쁨 또한 클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물도 주님의 손에 있을 때

언젠가 기쁨으로 새롭게 해석될 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23-24절)

그날, 곧 부활과 성령 강림 이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

예수님의 인격과 뜻에 의지해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길이 열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뤄지는 기쁨을 누립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얼마나, 또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거의 구하지 않아서 은혜의 자리를 비워 두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내 욕심을 포장하는 데 그 이름을 쓰지는 않는지 돌아보며,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의 뜻과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근심 속에서도 주님의 일하심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은혜를 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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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 성경의 정경 확인 ]
찬송가 19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경은 율법서(토라), 선지서(느비임), 성문서(케투빔)로 분류되었습니다.

이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예수님 승천 후에 기록된 신약 성경은 누가 확인해 주는 것입니까? 

누군가 개인이, 혹은 단체가 확인해 준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A.D. 140년경 영지주의 이단 말시온이 

구약성경과 마태, 마가, 요한복음을 배제하고 

영지주의 입장에 맞게 수정한 내용으로 자신들의 정경을 채택하였습니다. 

이에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문서를 정경(정식 성경)으로 인정하는 기준은 

사도성(기록자가 사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인가), 

보편성(모든 교회들에 의해 인정받고 있는가), 

영감성(성령의 감동하심)의 3가지였습니다.

신약 성경의 정경 확인은 특정한 개인 또는 단체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에 의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모든 교회의 일치된 인정을 받은 것만이 성경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A.D. 313)된 이후, 

도마복음 등 당시 교회의 주류의 입맛에 맞지 않는 문서들이 

황제의 후원 하에서 정치적인 의도로 정경에서 배제되며 핍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 정경화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자들입니다. 

적어도 복음서의 정경은, 이미 그보다 100여 년 전에, 

교회의 일치된 인정 하에 사복음서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교회의 일치된 인정은 어느 날 인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시까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며 읽어왔던 문서를 정경화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선동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교회는 이미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하고 있었습니다.

A.D 250년 이전에 이미 4복음서와 

바울의 13서신(로마서~빌레몬서), 베드로전서, 요한일서, 사도행전, 계시록은 

모든 교회에서 성경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고,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야고보서, 유다서는 아직 논란 중이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키릴(315~386년),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 아타나시우스(295~373) 등에 의해서

27권의 신약 정경이 사실상 확정되었고,

어거스틴도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진 카르타고 종교회의(397년)

그 직전에 모였던 힙포 레기우스 종교회의(393년)에서

지금의 신약 성경 27권이 기독교의 정경으로 거듭 확인되었습니다.

물론 교회가 모여서 결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이 하나님 말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정경에서 배제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결정은 틀릴 수 있습니다. 

비록 사도가 기록한 것이고, 교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결국 성경의 정경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의 증거를 통해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18절)고 하신 것은,

성령님의 강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23절에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신 것은

문자적으로 아무거나 마구 구하라는 뜻이 아니고

가장 귀한 선물이신 성령님을 구하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1:9, 13]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령님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됩니다(25절). 

특별 과외를 받지 않아도 말씀을 읽고 듣는 것만으로 알게 됩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23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렘 31:34절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의 반복입니다.

이는 렘 31:33절에 언급하신 ‘마음에 기록한 하나님의 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마음에 기록한 하나님의 법’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으면, 인간의 연구와 수양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반면에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된 자들은, 

어떤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단박에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있으면, 

어떤 발언에 대해서 그것이 진짜 그 사람이 한 발언인지 아닌지와 

그것의 진의까지 구분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분들(성령을 받은 분들)에 의해서 

사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부정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에 의해서만 일방적으로 정경성을 의심받고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우리가 기도할 때 이루어집니다(24절, 겔 36:37).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성경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되고 

그로 인해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합니다(22, 24절).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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