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4.1 수요일
요한복음 18:39-19:16
- 예수님 대신 바라바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 조롱받으시는 예수님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 빌라도의 무죄 선언과 유대인들의 반발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 권세에 대한 신문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가 더 크다 하시니라.
- 정치적 압박과 십자가의 언도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
빌라도의 예수님을 향한 심문이 계속된다.
빌라도가 무죄한 예수를 놓아 주려고 여러 번 노력을 한다.
요한은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라고 기록했다.
처음에는 유월절 관례를 따라 한 사람을 방면하는 것으로 놓아 주길 원했고,
두 번째는 모진 심문을 통해서도 죄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석방하려고 하였으며
세 번째는 예수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실토하면 놓아주겠다고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식 재판 석상에서 고소인들의 함성 소리에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정치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 꿇고 만다.
결국 예수를 십자가형에 선고하고 처형을 지시한다.
빌라도에게 예수는 어떤 존재였을까?
민란을 일으키고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겼을까?
아침 잠을 깨우고 일말의 양심을 불편하게 만드는 억울한 피고소인이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예수를 방면하려고 노력하게 만들었을까?
범상치 않은 인물, 그의 모습과 대답과 태도 앞에서 단순한 죄인 이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을 무산시키는 유대인들의 함성, 정치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연약한 공직자였다.
오늘 빌라도의 입장에서 상황을 묵상해 본다.
연약한 인간의 고민과 갈등, 그러나 자신의 안위 앞에 무릎 꿇고 양심을 거스르고 마는 결정,
정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총독의 자리, 어떻게 쟁취한 관직인데 이 유대인 한 사람때문에 잃을 수는 없었다.
반역자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무능한 총독이라는 소리가 로마에 들려지게 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의 소란 때문에 식민지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로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내의 부탁도 군중의 목소리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빌라도는 생사여탈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허세를 부리지만
주님은 진정한 권세가 누구에게 있는지만 말씀하실 뿐이다.
이 모든 재판의 최종 선고권은 하나님에 있다고 하시는 것 같다.
이것을 모르는 빌라도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는 말씀, 저들의 죄가 더 크다 하신다.
예수 대신 바라바를 원하는 군중들의 함성도,
석방과 처형의 판결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빌라도의 고민도,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의 '없이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목소리에 합쳐져
새벽 공기를 깨우고 예루살렘 총독 관저에 메아리쳐 울린다.
나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지금까지 어느 쪽 목소리를 내고 살아왔는가?
어느 쪽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주님
저 또한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사
어떤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도 진리를 붙들고, 정의를 지키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이 믿음, 이 고백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님, 내 마음을 지켜 주시옵소서.
양심을 거스르면서 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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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죽이는 종교와 정치 ]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이사를 왕이라 부르며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요구했고,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진리를 외면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져 줍니다.
19: 1-5
조롱당하고 상처 입으심으로 우리 죄의 대가를 짊어지신 왕이십니다.
가시관을 쓰고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은 채 군인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지만,
침묵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조롱당하신 왕의 상처 위에 세워졌습니다.
19:8-11
빌라도는 권력이 자기 손에 있다 여겼으나,
예수님은 그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나아가 빌라도보다 그의 권력을 악용해 메시아를 넘긴
유대 지도자들의 죄가 더 크다고 지적하십니다.
이는 눈앞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인 동시에
종교라는 이름 뒤에 숨은 위선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꼬집는 서늘한 가르침입니다.
39-40절
군중은 빌라도의 제안을 거절하고 예수님 대신 강도이자 무장 혁명가인 바라바를 택했습니다.
'섬김과 평화'를 버리고 '힘과 폭력'을 선택했습니다.
혹시 우리도 입술로는 예수님을 찾으면서
실제 삶의 위기 앞에서는 힘과 폭력의 바라바를 더 간절히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40절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참된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이고,
가짜 '아버지의 아들'인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이로써 죽어야 할 죄인이 풀려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 자리에 결박되어 죽임당하는
'위대한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진짜 아들이 죽으심으로, 가짜 아들이었던 우리가 살았습니다.
19:4-7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말하자, 대제사장 무리는 율법에 따르면 예수님이 죽어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사랑과 정의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불편한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말씀을 오용하면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 남을 정죄하는 폭력이 됩니다.
19:12-16
유대인들은 하나님 대신 가이사에게 충성을 선언할 정도로 종교적으로 부패했습니다.
빌라도는 정치적 압박에 밀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음에 내줄 정도로 불의했습니다.
부패한 종교와 불의한 정치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저희를 위해 모욕과 조롱을 참으신 예수님만을 참된 왕으로 고백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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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역자를 구원하기 위해 순순히 반역을 당하시는 예수님 ]
찬송가 38장 예수 우리 왕이여
유대인의 왕은 자기 백성에 의해 죽임을 당하십니다.
왕을 몰라봐서 실수로 죽인 것이 아닙니다.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협조한 빌라도와는 전혀 죄질이 다릅니다.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일은 곧잘 합니다.
그러나 땅으로 오신, 내 곁에 가까이 오신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
저 멀리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눈앞에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인정하는 문제로 닥칠 때
인간의 태도는 180도 달라집니다.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이신 것을 잘 아는 자들, 바로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옛날 사무엘에게 하나님 대신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아우성치던 자들과 똑같습니다.
가이사를 왕으로 인정하면 했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 내 곁에 계시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내가 왕노릇하는 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여기, 내 앞에서 왕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왕노릇하는 것을 멀리서 슬쩍 보며 눈감아 주시지 않습니다.
나의 자존심을 박살내고, 나의 치부를 다 드러내며 밀고 들어오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인정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왕은 기필코 죽여 없애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하신 죄가 이것입니다.
빌라도의 죄는 단순히 왕을 몰라본 죄, 왕을 인정하지 않는 죄일 뿐이지만
유대인들의 죄는 그것을 넘어서 왕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하려는 반역죄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반역죄 때문에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는 반역의 소리와 함께 예수님은 십자가에 넘겨지십니다.
이 반역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순순히 반역을 당하셨습니다.
이 반역의 죄를 적나라하게 들춰내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순순히 가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이 죄악을 폭로하여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내몰리심을 기꺼이 당하셨습니다.
이런 반역 죄인을 여전히 사랑하심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 반역의 죄를 해결할 길은 십자가밖에 없기에
십자가로 가신다고 말씀하시며 그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그들의 죄를 기꺼이 용서할 준비를 한 채로 기다리고 계심을
십자가 위에서 침묵으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주 예수님,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현실의 왕좌에는 여전히 내가 앉아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결정들을 순간순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을 몇 개나 하고,
예수님께서 정해주신 결정을 따른 것이 몇 가지나 되는지 찾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주님,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소망을 둡니다.
주님의 끝까지의 사랑이 나를 고쳐 놓으실 것을 믿습니다.
반역의 심령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순복의 심령으로 새롭게 다시 살리는 은혜를 계속 베풀어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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