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성일기

세 번의 사랑 고백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4. 8. 06:57

2026.4.8. 수요일

요한복음 21:15-25

 

- 사랑의 고백과 목양의 사명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게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재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 베드로의 장래에 대한 예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다른 제자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니아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간이냐 하신 것이니라.

 

- 요한복음의 진실성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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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의 879구절이 끝났다.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요 그를 믿을 때만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뚜렷한 기록 목적을 가지고 복음서를 기록하였다고 밝혔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을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기록이 참이라는 말로 글을 끝맺는다.

 

예수님이 디베랴 바다를 찾아오신 주 목적이 낙심에 빠진 모든 제자들이었을까?

아니면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찾으신 것이었을까?

요한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 집중한다.

 

세 번의 대화가 세 번의 부인을 상쇄한다고들 말한다.

아가페로 질문하시고 필레오로 답하는 사랑의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자신의 어린 양을 먹이고 치고 또 먹이라 목양의 사명을 거듭 당부하신다.

 

세 번째 예수님의 물으심에 베드로는 닭이 두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던 당시를 떠 올렸을까?

베드로는 자신의 진심을 주님이 아신다고 거듭 대답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진심을 거듭 고백하게 하시고 확인하신다.

그리고 주님의 양들을 먹이고 치라고 세 번이나 거듭 당부하신다.

베드로의 평생에 세 번의 부인과 세 번의 사랑 고백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사역 가운데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 성도들을 어떻게 목양해야 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보면서 

자신은 그렇지 아니하다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수없이 부인하고 또 부인했던 나의 모습이었음을 고백한다.

사랑하면서도 부인하는 아이러니한 이 행동으 ㄹ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행동하게 만드는가?

잠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편리를 위해,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럼에도 직접 찾아오셔서 회복시켜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주님을 바라본다.

이 사랑이 없다면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을 수 없다.

나와 같이 넘어지고 쓰러지며 부인하는 자들을 향한 나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주님 

언행일치의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

변치않는 주님의 사랑 닮아 변치 않고 사랑하겠습니다.

필레오를 넘어 아가페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성령님 !

내 안에 사랑이 넘치게 하옵소서. 

주님 닮은 사랑이 충만하게 해 주소서. 

부족하고 내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랑이 아니라

항상 흘러 넘쳐서 주변으로 흘러가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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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 사역하라 ]

 

예수님은 베드로와 대화하시며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

참된 제자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사역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살아 계심을 증언합니다.

 

15-17절

숯불 앞에서 주를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다시 숯불 곁 식탁을 차려 주신 주님은,

과거의 수치를 정죄가 아닌 사랑의 확증으로 씻어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거듭된 물음은

베드로의 가슴에 박힌 배신의 대못을 하나씩 뽑아내는 신령한 수술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그의 무너진 자존감 위에 "네 양을 먹이라"는 위대한 목양의 사명을 덧입히십니다.

이처럼 자비로우신 주님은 우리의 뼈아픈 실패까지 사명의 출발지로 바꾸십니다. 

 

18-19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치 않는 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훗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참된 제자의 삶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에서 '주님 뜻대로' 인도함 받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제자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이 고난과 십자가로의 부름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20-24절

자신이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제자는 베드로와 달리 ' 이 일들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일을 했습니다.

각자의 소명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소명이 다를 뿐, 우열은 없습니다.

곁눈질하는 순간, 선한 일도 시기와 질투로 변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멈추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만 바라봅시다(히 12:2).

 

25절

예수님의 존재와 능력, 그리고 행하신 은혜의 사역은

인간의 언어나 지식으로 다 담아낼 수도 안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는 그 무수한 일 가운데

믿음을 갖고 생명에 이르기에 충분하도록 선별된 증언입니다(참조 딤후 3:15).

주님을 알고 따르는 데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사역하게 하시고 주께서 맡가신 소명에 충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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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은 전부입니다! ]
찬송가 341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CCM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준비, 핵심 자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교회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사실 교회의 지체를 섬기는 일입니다. 

섬김이 필요한 교회의 지체들을, 예수님은 어린 양에 비유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을 필요로 하는 교회의 지체들은 

말귀 잘 못 알아 듣고, 눈도 어두워 수시로 엉뚱한 길로 빠지는 양들입니다. 

그런 양 중에서도 가장 미숙한, 어린 양입니다.

이 어린양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일은 단순히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해서도 안 되고, 양이 좋아서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섬김은 자기에게 실망하거나, 양들이 힘들게 할 때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초로 삼기 위하여 부르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끝까지 추적하여 확인하시는 것이 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세 번이나 반복하여 확인하십니다. 

일부러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베드로에게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기고 싶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을 사랑(아가페)한다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좋아(필레오)한다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결국 아가페의 사랑을 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에 

여전히 그에게 교회(내 어린 양)를 맡기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특이합니다. 

당부라기보다 오히려 약속에 가깝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뜻이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만드실 것이라는 약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돌보라는 명령을 하시면서 이어서 말씀을 주셨다면, 

목회에 정말 유익하고 중요한 이야기여야 합니다. 

최소한 용기를 북돋는 격려를 주시거나 

교회를 돌보는 데 있어서 유의해야 할 점 같은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 

우리의 상식에 부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베드로가 목회를 잘 해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예언 

혹은 베드로가 목회를 잘 할 수 있도록 특별한 은사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마지막 즉 죽음의 모습에 대해서 약속을 주십니다.

베드로의 목회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사는 

목회 성공의 방법론이나 목회의 위기 극복의 기술 같은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얼마나 많은 양들을 치게 될 것인지도 예수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시면서 기대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얻게 된 생명 곧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생명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20:31). 

예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통하여 자신이 가진 부활 생명을 증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목회 사역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평생 어떤 목회를 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목양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더 관심이 있으십니다. 

복음의 증인은 삶을 통하여 복음을 증언하기보다 죽음을 통하여 증언합니다. 

목회를 어떻게 꾸려왔는가보다 목회를 어떻게 끝내었느냐가 복음의 증언에 더 중요합니다. 

시작은 반이지만 끝은 전부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끝이 전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칩니다(갈 3:3). 

어느 대형교회 원로 목사님의 석연치 않은 마지막 모습(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 ㅠ)과 

많은 목사님들의 은혜롭지 못한 은퇴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주님은 더 슬프실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사랑(아가페)하는 것은, 단지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마음입니다. 

신뢰와 순종이 없이 좋아하기만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내게 원치 않는 상황을 허락하셨을 때, 

심지어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랑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교회와 세상에 이것을 증거하고 주님 곁으로 오라고 말씀하시네요. 

그것이 최고의 복음 증거라고 하시네요. 

그렇게 베드로를 최고의 복음 증인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시네요.

주님, 떨리지만, 자신 없지만 감히 기도합니다. 

저도 이런 복음의 증인 되게 해 주세요. 

죽음으로 교회 앞에 부활 생명을 증거하는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