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성일기

사라의 죽음과 히브리인들의 최초의 땅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4. 10. 07:03

2026.4.11. 토요일

창세기 23:1-20

 

- 사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슬픔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 막벨라 굴 구입 의사를 밝히는 아브라함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 에브론과의 공식적 거래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아 있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데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아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은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에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 소유권의 확정과 사랑의 장례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

사라가 127세에 헤브론에서 죽는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충격때문이었을까? 

브엘세바에 살던 그녀가 헤브론에서 죽는다.

사라의 죽음과 이삭의 번제 사건 사이에

얼마마한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성경은 일체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냥 죽었다는 말로 기록한다.

성경에는 "나이 들어서 조상들의 무덤에 장사되니라"는 표현들이 많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누워있는 곳에 들어가 슬퍼하며 애통하였다고 기록한다.

슬픔을 넘어 애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별을 안타까워 그랬을까?

객지에서 자신이 임종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그리하지는 않았을까?

이삭의 문제로 그녀에게 말년에 가장 큰 아픔을 주었다는 자책감은 아니었을까?

나그네 인생길에서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거짓말로 아내를 위험에 빠뜨린 무책임한 행동을 자책했을까?

뭍힐 땅 한 평 없이 나그네 길에 고생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헷 족속과 에브론과 매장지를 놓고 협상한다.

밭과 굴이 어느 정도 크기였는지 모르겠으나 은 사백 세겔이라니 ...

후대 이스라엘 왕 오무리는 은 두 세겔에 산을 사서 사마리아 성을 건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그네 신세의 아브라함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사라를 위해 밭과 굴을 산다.

히브리인들의 최초의 땅, 선산이 되어

사라와 아브하함,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라헬의 장지가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현실화 된다. 

거부 아브라함이 소유한 유일한 땅은 매장지 하나였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땅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구체적으로 질문한 내용은 없다.

그리고 땅을 얻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의 땅에 대한 미련은 없이 오직 영원한 땅만을 바라본 것인가?

아브라함의 이 모습을 단지 믿음의 눈으로

이 땅이 아닌 영원한 곳을 바라보았다고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헷 족속에게 거부 당하지 않고 매장지를 매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평소의 삶이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만날 때 나의 평소의 삶이 어떠했는냐가 중요하다.

 

주님

아브라함의 슬픔과 애통이 무슨 의미입니까?

부부 간에 이런 슬프고 가슴 아픈 사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마므레 앞 막벨라 굴이 히브리인에게 약속한 땅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게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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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이 묻힌 곳, 막벨라 굴 ]

 

이삭을 바침으로 '자손'의 약속을 신뢰한 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사서 ''의 역속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전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아브라함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하나님 약속을 따라 가나안에 왔지만,

유목생활을 하며 약속의 땅 전역을 여행했을 뿐 그 땅을 조금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사라를 가나안 땅에 묻으려 합니다.

죽으면 고향에 묻어야야 한다고 생각한 고대사회의 관습을 뒤로하고  

갈대아 우르가 아닌, 가나안을 택합니다.

가나안이 아브라함의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일부를 처음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무덤 넓이밖에 안 되는 작은 땅이지만,

이 '막벨라 굴'은 가나안 땅 전체(15:18)를 주시겠다는약속의 첫 성취입니다.

그 약속을 기필코 완수하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은 약속의 실현을 보지 못하겠지만 ,

작은 무덤에 깃들어 있는 온갖 가능성을 꿈꾸며 나그네 삶을 이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시는 막벨라 굴은 무엇입니까?

 

3-9절

헤브론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로 추켜세우며

매장지를 거저 주겠다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이 나그네요 떠돌이임을 분명히 밝히고 땅값을 모두 지불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땅의 약속을 받은 자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이 땅과 영합할 때 얻을 수있는 특권들을 포기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불편을 감수하고 있습니까?

 

14-19절

아브라함은 밭을 거져주겠다는 자들에게

당시 시세로 터무니 없이 비싼 요금인 은 400세겔을 지불하여,

향후에 발생할 수 있는 소유권에 대한 의문과 분쟁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합니다.  

그는 땅값을 자기 후손이 차지하게 될 약속의 땅 전체와

그들이 받을 복에 대한 보증금으로 여겨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와 달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증을 요구하시지 않고

도리어 '성령'이라는 보증을 주셨습니다(고후 1:22).

성령이라는 보증이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오늘 하루를 고정된 현실이 아닌

하나님이 계획하신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소망'입니다.

 

제 현실이 고난이라도, 말씀에 담긴 약속을 확신하며 당당히 소망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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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도가 붙들어야 할 자리 ]
찬송가 607 내 본향 가는 길


22장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순종을 통해, 

아브라함은 부활의 믿음과 소망을 확실히 증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에 이르렀음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런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함에 있어서 죽음의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가진 부활 믿음의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오늘 본문 첫 절은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는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때는 모리아 산 번제 이후 거의 이십 년이 흐른 때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출산한 나이가 90세입니다. 

22장 5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이’라 칭했습니다. 

‘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아르’인데 청소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물론 조폭 두목이 부하들을 ‘애들’이라 부르듯이 권력자가 신하를 칭할 때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부르는 상황에서는 장성하지 않은 자식을 부르는 호칭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리아 산 번제 때 사흘 길을 걸은 후에도 번제에 필요한 나무를 메고 산을 오를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삭이 건장하고 단단한 체격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삭의 나이를 17~20세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사라의 나이는 107-110세입니다. 

모리아 산 번제 이후 127세 죽음까지 거의 20년이 흘렀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 사건을 생략하고 

바로 이어 사라의 죽음과 매장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믿음과 소망을 확실히 다진 아브라함이, 

어떤 마음으로 사라를 매장하려 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모리아 산에서 확인된 아브라함의 부활 믿음이

이후에 더욱 확정되고 다져진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자기 소유로 땅을 조금도 갖지 않았지만, 

막벨라 밭 굴만은 유일하게 소유로 삼았습니다. 

원주민들에게 거듭 요청하며, 반드시 대가를 치르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습니다. 

그들이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값을 다 치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덤이 있는 땅을 확실한 소유로 삼았습니다.

능력과 재력이 부족해서 겨우 무덤으로 사용할 땅만 확보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창 13:2, 6). 

사병만 삼백 명이 넘을 정도로 강대한 무력도 가졌습니다(창 14:14). 

얼마든지 많은 땅을 확보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무덤으로 쓸 땅을 챙겼을 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진짜 땅이 무엇인지를 아브라함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 11:9-10] 9.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스스로를 나그네로 인식한 자가 이 땅에서 자기의 소유로 가져야 할 것은 죽음의 자리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의 자리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나그네인 성도가 이 땅에서 자기 자리로 삼아야 하는 곳은 바로 죽는 자리, 거기라는 것이지요.

이 땅의 생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는 부활의 생명에 소망을 두기에, 

성도는 죽음의 자리를 내 자리로 주장합니다. 

부활이 약속된 무덤의 자리, 자기 부인의 십자가의 자리가 

성도가 모든 소망을 걸기에 합당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확보해야 할 새생명의 자리입니다.

부활의 소망 가진 성도에게는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성도는 잘 살기 위해 힘쓰는 자가 아니라, 잘 죽기 위해 애쓰는 자입니다. 

성도에게 잘 살 자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은 성도에게, 

적어도 부활을 소망하는 성도에게 합당한 삶의 모습은 아닙니다. 

성도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리는 죽을 자리입니다. 

성도는 그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그 자리를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 바둥거리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가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리, 바로 십자가 밑이 성도에게 가장 가치 있는 자리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어떤 땅도 소유하지 않았던 아브라함은, 

무덤만큼은 자기 소유의 땅으로 가지기를 고집함으로써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소망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이 땅의 어떤 것에도 소망을 두지 않고, 

주 안에서의 죽음에 소망을 두었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죄악이 관영한 자들이 진멸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 백성들이 세워지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진멸의 땅이 곧 생명의 땅이었습니다. 

야곱이 애굽의 호화스런 무덤을 거부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자신을 매장해줄 것을 요청(49:29-31)한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부활의 새생명을 약속하는 땅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죄악의 세력은 진멸되고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이 살아나는 땅입니다. 

요셉이 굳이 출애굽 때에 자기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올라가 달라는 유언(50:25)을 남긴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주님, 아직도 죽음이 두렵고 낯섭니다. 

그러나 죽음을 계속 직시하며, 죽음에 오히려 소망을 두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 하나님, 제가 여기에서 죽었습니다.”라고 

죽음의 자리를 아버지 하나님께 담대하게 내놓는 믿음의 고백을 하기 원합니다. 

자발적으로 죽는 십자가의 자리에 내 모든 소유가 있음을 믿으며, 

그 자리를 준비하고 그 자리를 내 것으로 소유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내 죽음의 자리가, 반드시 주 안에 있도록 지켜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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