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성일기

기쁨의 귀향 길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5. 22. 07:07

2026.5.22. 금요일

창세시 45장 16-28절

 

바로의 초청과 지원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기를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요셉의 선물과 당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야곱의 소생과 결단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

바로와 그 신하들의 반응이 파격적이다.

'가족을 이끌고 내려 오라'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이다'

요셉의 삶과 공로가 어떠하였기에 요셉의 형들에게 이렇게 극진히 대우하는가?

 

형들은 막내 베냐민과 함께 근심과 염려로 가나안을 떠나 왔었는데

귀향길은 아버지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야곱은 처음에는 형들의 말을 믿지 못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이 보낸 수레, 물증을 보고서야 믿는다.

살아 생전에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을 다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처럼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기쁘고 기뻤을 것이다.

13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애굽으로 내려가 요셉을 보겠다고 한다.

애굽에 갈 때까지 여러 날들을 잠을 설치고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었을 것이다.

요셉을 향한 그리움이 야곱의 온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하나님도 한 영혼이 주게 돌아오는 것이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요셉은 스토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바로가 아버지와 형제들을 애굽으로 초대하고 있다.

또한 애굽에서 가장 좋은 땅도 허락하겠다고 한다. 

요셉은 그것을 대비하여 고센 땅을 점 찍어 두고 있었다.

앞으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도 계산하여 가장 적절한 위치를 선택해 놓았다.

요셉의 이 모든 지혜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나님의 지혜는 무궁무진하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으로 온다.

예수그리스도는 진리의 영이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 

저에게도 요셉처럼 지혜를 넘치게 부어주소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이웃을 사랑하여 

이웃들로부터 인정과 환대를 받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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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쓰신 대단원 ]

 

요셉의 형제들은 바로 왕의 전폭적인 환대 속에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의 생존 소식을 들은 야곱의 심령이 소생합니다.

 

25-28절

우리의 지각과 능력 너머에서 우리 삶을 아름답게 빚으십니다.

야곱은 요셉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들이 가져온 많은 선물과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그 말이 사실임을 실감했습니다.

그는 요셉을 만날 생각에 기운을 차리고 처날 채비를 했습니다.

요셉을 형들보다 높이려던 야곱의 꿈은 오래 전에 무너졌지만,

요셉은 가족의 구원자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꿈은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꿈을 이루셔서

야곱 인생의 결말을 세롭게 해 주셨습니다.

야곱처럼 생애 마지막에 "족하도다" 고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 삶도 아름답게 완성해 가실 것입니다.

 

16-20절

바로는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그는 요셉의 가족들을 모두 애굽으로 초대하며,

애굽에서 가장 기름지고 좋은 땅을 내주기로 약속합니다.

게다가 야곱의 식구들이 편히 이주할 수 있도록 수레까지 보내 줍니다.

그만큼 바로는 요셉을 신뢰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롭게 하면,

사람들은 요셉 가족을 환영한 바로처럼 우리를 환영합니다.

우리가 믿음과 거룩함을 양보하지 않을 때 미워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면 그것에 고마워할 것입니다

 

21-24절

요셉은 풍성한 선물을 형제들에게 주면서

돌아가느 길에 다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 앞에서도

비교와 책임 전가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화해는 단순히 과거를 덮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허물을 들추어 정죄하려는 유혹까지 이기고

서로의 연약함을 용납하며 함께 걷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도

여전히 길 위에서 서로를 탓하며 평화를 깨뜨리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용서받은 자로서,

비난의 언어 대신 격려와 인내의 언어로

공동체의 길을 평화롭게 만들어가는

성숙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제 삶도 하나님의 손안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도록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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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민 공동체, 얌치 없는 족속들 ]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형들에게 정체를 드러내고 극적인 상봉의 기쁨을 나눈 후,

요셉은 바로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가족의 애굽 이주를 준비합니다.

애굽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겨서 같이 밥도 먹지 않는 히브리인들이(43:31),

애굽의 좋은 땅과 기름진 것을 차지합니다.

뻐꾸기 둥지같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선민 공동체의 둥지를 틉니다.

뻐꾸기는 스스로 둥지를 만들지 않고

개개비, 산솔새, 붉은머리오목눈이 등 다른 종류의 작은 새 둥지에 

알을 낳아 부화와 육추(알에서 깐 새끼를 키움. 또는 그 새끼)를 맡겨버립니다. 

암컷이 다른 새의 둥지에 가서 알 한 개를 부리로 밀어떨어뜨리고 

둥지 가장자리에 앉아서 자기 알을 낳아 놓고서, 

다른 새가 자기 새끼를 부화시키고 키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류학계에서는 ‘탁란’이라고 합니다. 

자기 새끼의 알을 다른 새 둥지에 속여 맡겨서 키우게 하는 것입니다. 

참 얌통머리 없는 짓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자리로 밀어 떨어뜨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얌체 양자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선민공동체, 구별된 자들, 성도라고 불리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얼마나 얌치 없는 족속들인지요. 

무엇을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딛고서

그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를 대가로 하여 '성도'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을 받았으니,

영원히 황송해하고 죄송스러워하며 겸비하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황송한 은혜가 거저 주어지고 계속 주어져서 

익숙해지면 당연한 줄 압니다. 

다른 것 더 주지 않는다고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는다고 못마땅해합니다. 

불신자들이 하는 짓을 똑같이 따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성입니다. 

용서받았지만, 구속받았지만 아

직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지 않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애굽에서 새로 출발하는 선민공동체의 뻐꾸기 둥지를 준비하면서 

요셉도 이 부분을 걱정합니다. 

앞선 단락에서 5절의 이야기를 

7, 8절에서 다시 한번 되풀이한 것이 이 걱정 때문입니다. 

24절에서는 요셉의 걱정이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형들이 자기들의 옛 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서로 티격태격 다툴까 봐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와는 전혀 상반되게 애굽의 풍요에 취해서 

자기들의 옛 죄를 까맣게 잊고 

누가 더 의로운지, 누가 더 큰지를 다툴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철저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구원이 '오직 은혜'의 구원임을 깊이 체험하지 못한 채 

덥석 받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요셉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까지 시간을 많이 끌었던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충분히 그리고 오랫동안 

자기 백성의 죄악을 지적하고 폭로하신 후 

마지막에야 주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히브리서 1:1-2). 

충분히 자기들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며 자복하는 과정을 거치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래야 은혜를 오해하여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죄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이든 변명거리를 찾게 되면,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꼭 상대방에게서 찾습니다. 

그래서 서로 책임 전가를 하게 되고 다투게 됩니다. 

요셉이 그랬듯이, 우리 주님이 가장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도 우리끼리 다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계명(요 13:34)을 유언처럼 주시며 당부하신 거지요.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서도 여전히 다투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충분한 회개, 계속되는 회개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겸비한 마음이 정착되고 

이 겸비함이 위기의 순간에도 서로를 용서, 용납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겸비한 회개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회개의 과정을 조금은 어렵게 끌어가십니다. 

우리가 얌체 같은 존재, 계속 남 탓만 하는 존재임을 사정없이 폭로시키십니다. 

교회를 통해, 성령님을 통해 말씀을 가르치고 깨닫게 함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다 폭로 당한 후에 아무런 변명도 핑계도 없이 

대속의 십자가를 마냥 붙들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오랜 깨어짐의 과정을 겪도록 그 시간을 조금은 길게 늘이십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받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작입니다. 위대한 시작입니다. 

이 시작이 반드시 완성으로 끝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에게 주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는 분이십니다(요 14:26). 

세상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요 16:7-11). 

이로써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것에서 나아가 

죄를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성령 내주의 선물은 

우리의 구원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고 

반드시 완성될 것임을 약속하는 보증입니다.

이번 주일이 성령강림절입니다. 

성탄절, 고난 주일은 이미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미래에 주실 구원의 복락을 소망하는 절기입니다. 

이에 비해 성령강림절은 

성도가 이미 시작된 구원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가운데 

가장 실천적, 현재적으로 기념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이 성령강림절에, 대속의 은혜로 시작된 구원을 망치지 않기 위해, 

받은 은혜를 망각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잘 따를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으로 우리 속 사람의 더러움을 폭로하시는 

성령님의 은혜, 은혜 위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겸비한 청종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주 하나님, 

모지리 뻐꾸기를 걷어차지 않고

친자식과 똑같이, 아니 친자식보다 더 불쌍히 여기어

사랑하며 먹여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얌치가 없고 염치가 없습니다. 황송합니다. 

그러나 염치 차릴 처지가 아님을 고백하며 성령님을 붙듭니다. 

성령님, 주님이 좀 덜 걱정하는 뻐꾸기가 되도록 

말씀으로 겸손과 온유를 철저히 훈련시켜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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