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성일기

하나 됨의 비결

톨레 메움 에트 톨레 데움 2026. 6. 2. 06:23

2026.6.2. 화요일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하나가 되어야 할 공동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분쟁의 내용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라 

 

나눌 수 없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말의 지혜 : 헬라어 '소피아'(지혜)와 '로고스'(말)의 조합으로,

                       1세기 그리스-로마 문화의 '수사학'을 의미한다.

                        바울의 복음전도 방식은 수사학적인 탁월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

바울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한 통의 편지를 전달받고 붓을 든다.

고린도 교회가 사분오열 분열된 모습에 안타가운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왜 이런 분파가 형성된 것일까?

바울이 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한가지였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 한 복음을 듣고 하나되지 못하고 나뉘게 된 것일까?

현대도 여러 교파가 있고 한 교파에도 여러 교단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많이 베풀지 아니하고 소수에게만 주었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지 아니했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세례도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로 인간은 끝없이 나뉘어지려고 한다.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됨을 계속 강조하신다.

죄성은 자기를 주장하기에 상대와 하나되고 누구에게 속하기를 거부하는 속성 때문일까?

하나님은 삼위일체를 이루어 일하심같이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랑 안에서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내 안에 죄가 죽어야 공동체와 하나됨이 가능하다.

 

글을 쓰는 동안 갑자기 한가지 생각이 든다.

교회가 이번에 직분자 선거를 하였다.

선출된 분들은 울산교회 출신이 권사 한 분, 중앙교회 출신이 장로 한 분,

나머지 8명의 안수집사, 5명의 권사는 몇몇 다른 교회 출신들이다.

이제 울산신정교회는 울산신정예배당과는 전혀 다른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지금 울산교회는 어느 교회보다도 많은 교회에서 모여든 이합집산의 공동체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모래알 조직같은 구성이다.

나의 '용광로 이론'이 절실히 필요한 교회 구성원들이다.

분열과 하나됨이 늘 존재하고 복음 안에서 하나됨이 절실히 필요한 공동체이다.

 

주님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 되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나됨의 원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서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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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관한 소식을 듣고,

같은 주님을 믿는 교회는 결코 나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호소하면서

그들 가운데 있는 파벌을 질책합니다.

 

10절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최고의 권위자이십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에게

그들이 주님으로 고백하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전히 하나될 것을 권면합니다.

성도의 사귐의 대상이시며(9절)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들을 성실하게 양육하고 온전케 하시는 (7-8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오늘 우리가 하는 일과 모든 관계의 정점에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갑시다.

 

10절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결속하라는 것은

공동체가 사소한 일에서까지 같은 구호를 되뇌며 

획일적인 사고를 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개성과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공동체의 긴장을 유지하되,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 2:5)을 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 나와 다른 말,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도

기꺼이 대화하며 관점의 변화를 이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11-12절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분쟁은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경쟁적으로 내세우며

파당을 짓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분열의 이면에는 영향력 있는 지도자와의 친분을 과시함으로써

교회 내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속내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 취향에 맞는 지도자를 선호하는 행동은

자칫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은헤를 크게 훼손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3-17절

바울과 아볼로와 베드로는 각자 개성과 사역의 강조점이 달랐지만,

결국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는 그들이 전한 '그리스도'보다,

'복음의 통로가 된 사역자'들에게 집중하면서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지도자의 장점을 자랑하는 것을 넘어,

내가 선호하는 교훈만이 참이라는 오만에 빠져 

타인의 생각을 무시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인기 있는 유명 설교자의 이름을 앞세우며,

그의 메시지를 내 신앙과 동일시하는 

내안의 숨은 동기가 무엇인지 가만히 돌아봅시다.

 

오늘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그리스도 에수의 이름으로 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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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복음 ]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실제적으로 견고해지기 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은 짓을 곧잘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주인 노릇하던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주인이 되신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되었음을 확정하는 세례를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는 훈장으로 삼는 일이 교회 안에 벌어졌습니다. 

유명한 사도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며 

같은 사도에게 세례받은 사람들끼리 파벌을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는 책망합니다. 교훈합니다. 복음을 상기시킵니다.

복음은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복음이 각자의 욕심대로 사는 죄인을 한마음으로 합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자기 자신을 불신하게 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게 하는 지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복음의 설득으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고 주로 영접한 자들이, 

그분 안에 한 몸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룬 것이 천국입니다.

사람(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에 대한 신뢰로는 한 마음으로 합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교훈은 서로를 신뢰하고 믿으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십자가의 도는 다르게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불신과 상대에 대한 불신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신뢰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되어 있고, 

결국은 서로 원수가 되고 반목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은 철저히 신뢰하면 할수록 철저히 불신하게 되는 파국을 맞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불신하고 사람을 철저히 불신하여, 

신뢰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돌리게 될 때 

사람과 사람이 하나로 합해질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믿어주니까 나도 믿는 믿음, 

상대방이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하는 사랑은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믿어주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믿어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무 가치 없는 인생이지만 

그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실 하나님 때문에 

인생을 가치 있게 여기신 분이 계십니다. 

사랑스러운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수 되었던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랑하셨던 분이 계십니다. 

그분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음의 선봉이십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가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알고도 사랑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부족을, 내 형제의 결핍을 해결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믿어서도 안 되고, 아볼로를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 

목사를 믿어도 안 되고 장로를 믿어서도 안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라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의 종을 통해 평생에 기억에 남을 사건을 경험하거나 

큰 은사를 체험하였더라도, 놀라운 능력을 받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를 믿지는 말아야 합니다. 

큰코다치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99%입니다. 

목사를, 다른 성도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땅히 존경해야 합니다(딤전 5:17). 

나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빌 2:3). 

그러나 온전한 자로 여기지는 말아야 합니다. 

전혀 허물이 없는 사람으로 기대하다가 상처받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믿는 것, 사람을 믿는 것은 복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짓입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은 자기 부인의 믿음입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죄인 됨에 대한 자백 없이 

십자가의 복음을 진정으로, 유일한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십자가 앞에 있는 모든 인간이 무가치한 죄인임을 선포합니다. 

모든 인간이 무가치한 죄인이기 때문에, 

오직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복음을 전할 때 멋진 웅변과 명쾌한 논리로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17절). 

저 같은 사람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지만, 

설교를 너무 잘하는(?) 것이 

복음을 훼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 사람에게 감탄한 것 때문에 

사람을 신뢰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사람에게 실망한 것 때문에 사람을 적대하지도 않게 하여 주옵소서. 

무가치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생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설득력 있고 멋있게 전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게 만드시옵소서. 

죄인을 사랑하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부족하지만, 흠이 많지만, 

여전히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직 예수님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 같이 붙들고 있는 내 형제도

언제나 존경하며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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