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에 관한 글을 발췌 인용하여 쓴다.
본질 : homo viator
가브리엘 마르셀(1889-1973) 프랑스 출신의 실존주의 철학자, 극작가, 음악 비평가이다.
그는 샤르트르나 보부아르 등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깊은 고뇌의 단계를 거치다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인물이다.
1945년 <호모 비아토르 : 희망의 형이상학 서문>
"아마도 인간이 자신의 상태가 여행자의 상태라는 사실을 늘 정확히 인식할 때에만
오직 안정된 질서가 지상에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실존, ;여행자의 상태로 존재한다'를 라틴어로 표현하면 '호모 비아토르', 즉 '여행하는 인간'이다.
via가 정확히 '길'을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여행하는 인간'보다는 '길을 걷는 인간'이 더 적절한 번역이다.
영원히 사는 존재인 양, 한곳에 머물러 소유와 물질을 움켜쥐고 욕망하고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성향을 버리지 않는 한, 인류에게 남는 것은 끝없는 다툼과 경쟁, 전쟁분일 것이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인 것을 인식하고, 이 땅에서의 공간과 시간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을 때, 즉 나그네이자 여행자로서 잠시 머물렀다가 계속 길을 걸어가는 존재라고 스스로 인식하게 될 때, 집착과 소유를 버리는 것도, 타인 및 다른 생물과 나누는 것도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마르셀은 인류가 이런 인식을 가지게 될 때에만 이 땅에 안정된 질서가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묵상의 본질이 길 걷기의 본질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말씀을 묵상하는 이는 그 말씀의 창시자이자 저자인 하나님으 묵상 중에 자주 대면한다. 하나님을 대면하면 할수록 무한자이자 절대자인 하나님과 유한자이자 상대자인 인간 사이에 격차를 자주 인식한다. 시간으로는 잠시, 공간으로는 거쳐 갈 뿐인 이 세상에 집착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영원한 시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욕망에서 비롯된 심리적 고통, 육체의 질병과 죽음, 관계의 단절로 인한 상처가 영원에 대한 소망(희망)으로바끨 수 있을 것이다.
기간 :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ㅡ메시지 성경.의 저자이자 '목회자들의 목회자ㅣ'로 불리는 유진 피터슨은 1980년에 < 하 ㄴ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인스턴트 사회에서의 제자도>책을 펴냈다. IVP 에서 <한 길 가는 순례자?라는 제목으로 바꾸었다.
이 책은 시편 120-134편을 새설한 책이다.
제목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84-1900) 의 '선악을 넘어서'라는 글..에서 인용했다.
"'지상과 천상을 통틀어' 절대적인 사실은 ...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기 있어야 하며, 그때에만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 게 해 주는 결과가 있게 마련이고, 또 언제나 그래왔다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사람이 살아야 할 삶의 본질과 방식에 대해 오늘날의 현대인보다 확실히 더 깊은 통찰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기다림과 인내와 돌아봄과 목적의식과 꾸준함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통해 이루어질 일을 소망하는 것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보화 시대의 이상과 세계화의 미명 아래서, 속도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효율성과 가치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어버렸다. 발전과 개발, 향상과 진보의 논리 앞에 돌아봄과 기다림과 인내와 일관성은 진부한 원시물로 취급받는다. 교회의 이상도, 추구하는 목표도, 그 안에 속한 각 인생이 구하는 바도, 일상의 나눔도 모두가 그렇게 변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한순간에 최상의 효율적인 즐거움을 맛보아야 하는 관광객의 삶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꾸준히 길을 걷는 제자와 순례자의 삶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 삶은 모든 신앙긔 선조들이 걸어 온 과정처럼, 매일의 일상을 꾸준히 경주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 길이 오히려 정상의 실이다. 그러나 이 길은 단순히 금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이 아름답고 보람있다'할 만한 모든 메뉴가 빠짐없이 응축된 즐거운 선택의 길이다.
시편 120-134편은 하나님의말씀에 순종하며 성전을 향하여 한 방향으로 오랜 시간 꾸준히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묵상 중에 얻는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하나씩 알려준다. 피터슨이 '순례자들의 노래' 에 해당하는 이 시편들을 가각 해설하면서 붙인 제목들은 길을 걸으며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 맛볼 수 있는 음식의 메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되돌아서서 반성함', '하나님의 돌보심', '의미 있는 예배', '타인을 섬기고 위기에서 탈출함', '하나님만이 주시는 안위를
맛봄', '인스턴트 세상이 주지 못하는 감격', '노동의 들거움', '천상의 복', '인내를 통한 성추', '이루어질 것들에 대한 설레는 기대감', '자신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 '의지를 복종시키는 훈련', '개인의 존재감을 넘어선 공동체의 일체감',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궁극적 즐거움'
속도 : 서둘러 가면 30분, 천천히 가면 10분
백암산 오르는 길
..생각하며 걷는 오르막 길
약사암 빨리 가면 30분, 천천히 가면 10분
걷기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듯, 묵상에도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읽기에는 속독이라는 유형이 따로 있다. 따로 묵독하며 천천히 읽고 곱씹어 내며소화하는 과정이 중요하듯, 우선 지식의 양을 한 번에 늘이고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훓어 내는 속독 과정도 필요하다. 성경 읽기에도 그런 이중적, 혹은 다중적 접근이 유익하므로, 성경 통독 훈련 과정 주에는 여럿이 돌아가면서 본문을 빠르게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는 속독 프로그램도 있다.
그러나 묵상은 조금 다르다. '속상'이라는 장르가 없다. 묵상에는 거친 결을 다듬는 정제되고 고른 호흡이 필요하고, 눈과 뇌를 모두 열어 놓고 천천히 보고 읽고 듣고 생각하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이런 산행과 같다. 묵상이 일상이 되면, 말씀의 결, 감촉, 깊이, 높이, 너비, 길이가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한하고 변화무쌍한 말씀이 뇌와 심장과 폐부와 피부를 찌르고 누르며 어루만지고 때리고 자극하는 느낌을 비로소 경험하게 된다.
태도 : 우보천리
높은 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 진입한 초기에는 오랜만에 초록 숲의 푸르름과 청명한 공기에 마음이 설레서 마냥 그 기분으로 산을 끝가지 걸어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조만간 오르막 된비알이 시작되면, 땀이 비 오듯 흐르고 호흡은 거칠어지며 다리 근육과 심장은 터지고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이때부터는 두 마음이 싸우는 갈등이 이어진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산을 찾은 상황에서, 그 높은 정상까지 멀고 험한 산길을힘들게 끝까지 가야 할 이유와 당위를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러 때마다 내가 자주 되뇌는 사자성어가 우보천리. 소는 비록 느리게 걷지만, 소처럼 우직하고 꾸준하게 계속 한 걸음씩 걷다 보면 결국에는 천 리나 되는 길도 마무리하게 된다. 이 고사성어를 되뇌는 건 실제로 마음을 다잡고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기 대문이다. 묵묵히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서 결국 만 보가 되고 오만 보가 되어 목적지에 이르게 한다.
묵상을 하는 과정도 우보천리 원리와 다르지 않다. 창세기 1:1에서 시작한 성경 읽기는 우보천리 과정을 통해서만 요한계시록 22:21을 읽어내며 마무리된다. 성경의 특정 본문 묵상을 시작할 때는 그 말ㅆ므의 기초적인 의미조차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 본문을 다룬 설교를 이전에 듣거나 해설을 읽어본 경우,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면서 해석의 얼개가 조금 맞춰지기도 한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으면 퍼즐처럼 얽힌 구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구조와 내용을 분석하는 단계에도 이른다. 성경의 다른 본분과의 연관성도 보이고, 앞뒤 문맥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특정 단어가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경우도 생긴다. 과거의 경험, 현재의 상황, 미래의 기대 등이 본문 내용과 얽히면서 다양한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하며, 적용을 위한 구체적인 결단을 마음에서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관찰과 분석과 통찰이 교차하며 폭발하는 이런 과정은 천천히 걷는 소걸음으로 인내하며 꾸준하게 묵상의 길을 갈 때만 경험할 수 있다. 원하는 만큼 빨리 이해와 공감과 적용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보천리의 과정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는 인내심을 동반한 꾸준함이고, 다른 하나는 그 꾸준함이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 준다는 확신이다. 인내하는 묵상의 종착지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고 말씀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방식 : 홀로 때론 함께
길을 걷는 데 함께 걸으며 보조를 맞추는 동행인이 있으면 좋다. 특히 그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손을 잡거나 마음을 나누며 걸을 수 잇는 이라면 그 동행은 줄거움의 여정이다. 길 위에서 만나고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고, 경험과 기억을 공유할 동행인이 있다면 그 동행길은 천국의 행복을 맛보는 길이 된다. 그러나 서로 보폭을 맞추지 못하거나 방향이 다르거나, 목적지와 목표가 다르거나, 방식이 다르다면, 그 동반 여행은 안식과 평안의 여정이 아니라 다툼과 갈등, 단절의 여정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길을 걷는 데 반드시 동반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홀로 있으면 길과 방향을 즉흥적으로 바꿀 수도 있고, 시간과 공간을 마음 가는 대로 새로 선택하는 것도 가능하다. 길을 잘못 들거나 계획이 틀어졌을 때도 책임질 부담이 없고, 탓할 상대도 없다.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길과 나와의 만남에만 집중할 수있다.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는 혼자만의 여행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자연과 나를 오롯이 홀로 대면하고 직면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묵상의 방식도 이와같다. 같은 본문을 묵상하는 이가 있다면, 또 내가 본문에서 느낀 느낌과 이해를 그도 느끼고 이해했다면, 같은 것을 소유한 이들과의 연대으식을 갖게 될 것이다. 공유된 이해와 의식은 공동체를 만든다. 본문에 대한 이해와 느낌이 서로 다르더라도, 그것을 공유하고 나누는 중에 묵상의 폭과 깊이가 더 넓어지고 깊어지지고 한다. 이것이 공동체적 성경 읽기의 유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면하는 모든 이는 각 개인에게 고유하게 찾아오는 하나니므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곡ㅂ, 모세, 그리스도, 바울은 아무도 없는 광야. 동굴, 사막, 산에서 홀로 자시넹게만 나타나신 자신만의 하나님을 만났다. 그 만남이 그들에게 전환점이 도었고, 소명이 되었으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되었다. 모든 사람은 홀로 말씀을 대면하며 그에게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홀로 길을 걷는 자만이 그 길에서 하나님과 대자연과 자신 내면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홀로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자만이 하나님과 대자연과 자신과의 만남을 통해 주어지는 자신만의 말씀을 대면할 수 있다. 그럼므로 묵상은 걷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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