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글 모음

세계관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1. 5. 20. 10:38

사람이 태어나 자라고 늙어가면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세계관이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를 만나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선택을 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이 명확히 뭐라고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고, 반면에 뚜렷하게 행동 기준을 가지고 사는 분도 있다.

 

세계관의 형성에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는 환경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부모의 성향, 가치관, 교육과 삶, 가정의 환경과 문화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성장하면서 학교 교육과 사회 생활 속에서 터득한 지혜와 경험 등등이 영향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세계관은 무엇일까?

현재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내 삶의 행동과 삶을 결정하는 가장 큰 기준이다.

스스로 정한 가훈은 '믿음, 성실, 사랑' 이었다.  

 

인제 의과 대학 교훈은 '정직, 근면, 성실' 이었다.

부산 고등학교 교훈은 '감사하자, 굳세자, 힘쓰자." 였다.

세상적인 교육이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사람의 기질은 행동에 영향을 준다.

소심한 편이다. 확신에 찬 행동을 하기 보다는 조금은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 자존감도 약한 편이다.

이는 어릴 적에 아버지 없이 자란 환경과 가난 그리고 가정 환경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감이 부족하여 모험적, 도전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잘 하지 못하고,

늘 안전 위주의 선택을 하게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자주 진보적인 생각을 가질 때도 있지만 결정은 늘 보수적으로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할머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늘 하셨던 말씀, "애비 없는 호로 자식이 되지 말라!"

그것이 늘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게 만들었다.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거나 욕 먹을 행동을 하면 않되었다.

어릴 때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영향을 받은 삶의 지혜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분들이 살아가시는 모습이 교육이었고, 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전부였다.

그리고 더 성장해서는 책이 나의 선생이었다. 이들이 나의 멘토이다.

언제 부터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었을까? 

이 또한 구체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기억이 나지 않으니 없었던 것 같다.

뭔가 조금씩 서서히 이렇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을 넓혀가고 굳혀가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고향에서 국민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슨 특별한 이유도 없이 중학교 진학과 함께 교회를 다니지 않았었고,

중3 때 부산으로 유학을 하면서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까지는 교회 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하나님의 콜링으로 생각하는 사건, 고2 가을에  서로 통성명도 없었던 반 친구인 김 상일 친구의 전도로

말씀 사경회에 참석하면서 다시 신앙생활의 여정이 지속되었다.

 

아마도 이 신앙생활이 나의 인격과 세계관 정립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릴 때 교회에 출석하면서 부터 나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는 의식이 생겨났고,

그렇게 행동할려고 했었으니 말이다.

요즘 아이들 처럼 요란스럽게 사춘기를 보내지도 않았었고,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하던 젊은 시절도 없었다.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배어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20-30대는 조금 염세적인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30대는 다미선교회에 빠진 아픈 기억도 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뚜렷한 가치관이 없었던 것도 기인했을 것이다.

대학의 선택, 직장의 선택, 경제, 돈, 성, 결혼생활, 자녀교육, 직장생활, 인간관계, 사회생활 ...

구체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 오지 않았다.

신앙생활을 계속해 왔지만 이런 세계관의 문제를 심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같다.

신앙생활이 무엇일까?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고 그 말씀이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준이고 지혜가 아닌가?  

그러나 나는 세속적인 가치와 기독교 가치가 충돌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그렇게 살아왔었다.

 

나의 삶의 모습을 보면 성실하다. 부지런하다. 비교적 법을 잘 지키고 규칙을 잘 따른다.

매사에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임한다.

그리고 비교적 환경에 적응을 잘 하는 편이다.

항상 정직한 것도 아니다. 유혹에 약한 편이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정의감이 불 탈때도 있다.

성격이 급하고 직선적이다. 어찌보면 단순형이다.  그러니 실수도 잦다.

많은 실수와 실패는 나의 스승이었다. 실수를 통해 인생을 배워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고집이 세지도 않다. 그말은 주관이 뚜렷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반대로 남의 말에 경청하고 잘 화합하는 성격이다.

추진력이 강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다. 주장을 강하게 하지 못할 때도 있다. 확신의 부족인가?

개업을 한다든가, 새로운 일이나 취미 등에 쉽게 결정하거나 시작하지 못한다.

돈을 아낀다. 근검절약형이다. 그렇다고 이웃의 도움의 요청에 인색하지는 않다.

경제에 대한 개념은 성장과정의 가난이 준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 깊이 중독되지는 않는다. 잠시 좋지 않은 것에 빠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고 넘어지지만 얼마 후 곧 돌아온다.

...

이런 기질과 삶의 모습들을 들여다 보면서 과연 나는어떤 뚜렷한 세계관을 가지고 그 가치관에 따라서 살아왔을까?

내 생각은 뚜력한 세계관을 따라 살아왔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중년이 지나면서는 사고의 기준 틀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정립되어 가는 것 같다.

바꾸어보면 왜 어릴 때 부터 이런 가치관을 따라 살아오지 못했는지 후회가 든다.

따라서 세속적인 세계관이 삶의 많은 부분에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의식하지 않고 생활하다 보면 저절로 세속적인 세계관을 따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치관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세속적인 세계관을 벗어 버리고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따라 살기로 매 순간 결단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따라 사는 삶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의식을 해야 한다.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세속적인 세계관을 따라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자주 발견한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는 것이리라.

 

어떤 세계관을 결정하고 살아가느냐는 중요한 문제인데

자신의 그런 세계관에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하고 살아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 중에 얼마나 이런 세계관 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을까?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점을 바르게 가르치고 알려주고 있을까?

믿음의 시작이라고 양해하고 용납하며 무작정 기다려주는 것이 능사인가?

새가족이 왔는데 떨어져 나갈까 봐 두려워 분명하게 교육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 세계관을 훈계나 지혜 정도로 취급하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한국 교회의 모습이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을 양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독교 세계관을 따라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였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하였으며,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되어 버렸다.

초대 기독교에서는 삶에서 이런 세계관을 따라 살아야 침례를 주었다고 한다.

그런 모습이 분명한 신앙의 고백이며, 거듭남의 증거이며, 기독교 세계관을 따르며 살겠다는 결심의 표현이었다.

 

신앙의 성숙도 기독교 세계관이 얼마나 삶에 배어 있으며,

이 세계관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가의 정도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의 건강성 및 성숙도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의 훈련이라는 것도 별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 세계관에 복종시키고 따르기로 결단하며 지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런지..

그렇다면 어릴때부터 이 기독교 세계관을 잘 가르치고 교육해야 하는 것이 자명해진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이 세계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최고. 최선의 삶이라는 것을 교육해야 한다.

 

최근 들어서 나는 지난 날 들었고, 배웠고, 겪어왔던 모든 일들이 정리가 되면서

통합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자신을 자주 발견한다.

나이와 연륜이 그런 영향을 주었을까?

아마 <세계관>이라는 키워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세계관이란 주제어를 통해 나를 보고, 삶을 평가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는 통로를 제공했다.

 

건전하고 바른 세계관의 형성과 유지와 실천하는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우왕좌양,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통해 지혜를 발견하고 살아가는 상처 투성이의 삶은

어느 정도 가치는 있겠지만 참 고달픈 인생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세계관이 있고 인간들은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삶의 마지막을 평가할 때 그 책임은 그 세계관을 선택한 본인의 몫이다.

기독교인으로 나름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기독교 세계관에 철저하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한다.

한번 뿐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세계관의 소중함을 절실이 느끼는 이 아침이다.

이제 선택한 기독교 세계관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되고 실천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2021년 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0) 2021.05.24
암송  (0) 2021.05.21
청출어람  (0) 2021.05.17
아카시아  (0) 2021.05.15
스승의 날  (0) 2021.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