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글 모음

신혜에 대한 기억들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1. 5. 26. 16:04

신혜는 무남독녀 외동 딸이다.

신혜를 많이 사랑하지만 초보 아빠는 사랑하는 방법에 서툴고 부족한 것이 참 많았다.

태어날 때는 전공의 4년 차 때라 무척 바빴다. 그리고 전문의 시험 준비로 딸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는 바로 군복무를 위해 훈련과 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1년을 떨어져 살아야 했다.

돌아보면 아내가 가장 힘들 때 나는 함께해 주지 못했다. 늘 미안할 따름이다.

그리고 신헤에게도 미안했다. 어쩌다 한번 씩 나타나는 아빠였으니 ...

 

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몇 가지 사건들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군의관 2년 차로 송추, 군인 아파트에 살던 시절이다

엄마 없이 아이를 승용차에 태우고 혼자서 운전을 하던 때였다. prode beta, red color

운전 면허를 취득하고 초보시절이었는데 왜 나갔는지 모르겠다.

운전을 시작했는데 아이가 불안한지 뒷 좌석에서 계속 울어댔다. 당시에는 카 시트같은 것이 없었다.

초보 운전자였던 난 당황하였고 달래보는데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편도 1차선이라 차를 세울 수도 없다.

어찌할 수 없어서 고함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큰 소리를 지르니 아이는 더 크게 울 수 밖에 ...

그리고 차를 돌려 집으로 와서 아이를 많이 야단을 쳤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 집에 다니는 3살 아이가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는가?

침착하게 아이를 달래고 운전을 하지 못하고 분을 삭이지 못한 못난 모습이었다.

신혜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도 trauma로 남아 있었나 보다.

아빠는 무서운 사람 ...

 

두번 째 기억으로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저녁이 다 되었는데 신혜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하고 놀러간 줄 알았는데 몇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파트 주위를 한참이나 찾아 다녔지만 찾지 못하고 어두어지고 한참이 되어도 아이가 나타나지 않자

불안하고 초조해지고 걱정과 염려가 밀려왔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하나 ...

아이를 찾기 시작하고 한 참 후에야 집에 들어왔다.

친구들과 놀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는지 몰랐던지 ...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얼마나 놀라고 걱정이 되었던지 모른다.

이 때도 혼을 많이 냈다. 신혜는 뭐가 두려운지 바른 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 속임에 대하여 많은 말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세번 째 기억은 신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일이다.

신혜는 성적 우수상으로 상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교내외 할동을 하여 공로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방송반은 활동이 많지 않았는데도 공로상을 주고,

더 받은 활동을 하고 대외적으로 학교 이름을 빛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상을 주지 않는다고 흥분하였다.

나는 그냥 흘러 넘겼다.

그런데 신혜는 이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는가 보다.

신혜가 주동이 되어 단원들과 오케스트라 지도 선생님을 만나 항의를 하고,

지도 교사가 교장선생님께 건의를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몇몇 학부모 어머니들을 통해 의견을 교장선생님께 전달했으나 허사였다.

그러자 최후의 수단으로 졸업하는 오케스트라 단원 몇몇이 교장실에 몰래 들어가

교장선생님 탁자 위에 놓인 물건을 다 옮기고, 대자보 같이 그들의 의견을 적어 올려 놓았다고 한다.

그것을 보신 교장선생님이 결국 졸업식 전날 공로상 수상을 허락하셨다.

졸업식 때 아무 상도 받지 못할 뻔한 친구들이 이 상을 받게 되니 매우 기뻐하였고 

그들 학부모들로 부터 신혜 때문에 자기자녀가 상을 받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하였었다.

나는 여러번 이 일을 놓고 신혜를 칭찬하였다.

자신의 문제가 아닌 남의 문제를 위해 그냥 방관하고 받아들이며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하다고 생각한 일을 향해 분명한 의사를 표하고 문제 해결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던지 모른다.

그래서 전체 수석으로 상을 받는 것 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칭찬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신혜가 이렇게 건강한 인격으로 성장하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나를 행복하게 했었던가 싶다.

 

네번 째는 중3학년 때 일이다.

한 번은 신혜가 저녁을 먹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빠! 나 전교회장에 출마하면 않되요?"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 아빠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이야기 후 나는 잊고 있었다.

몇 주 후 신혜는 중학교 전교회장이 되었다고 기분 좋아서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와 친한 친구 몇몇이 선거 운동을 했다고 한다.

피켓을 만들고 교실들을 돌아다니며 선거 공약을 이야기하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고 한다.

결과는 직접선거로 전교회장에 당선되었다.

이 이야기도 여러번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었다.

신혜에게 이런 작전을 세우고 기획하며 추진하는 달란트가 있었음을 알게된 일이었다.

난 지금도 이런 신혜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도록 키워주지 못한 미안함이 있다.

지금은 직장을 다니지만 직장에서도 상사들로 부터 인정 받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기를 기도한다.

 

다섯번 째 이야기는 고1인지, 고2인지 기억이 흐릿하다.

한번은 아내와 주일 교회 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남학생과 함께 있었다.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딸은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고 이성에 관심이 있었는데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남학생을 집으로 데리고 올 정도인지는 ...

그날 엄청 두둘겨 패고 야단을 치고 다음 날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두고두고 후회한다. 왜 그때 조금 더 진정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이 사건 이후로 신혜는 나와 깊은 대화를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마음을 닫아 버렸다. 자녀교육 빵점의 아빠였다.

 

고3때는 친구들하고 관계 때문인지 학교 성적도 잘 나오지 않고 수능 성적도 좋지 않았다.

결국 성적에 맞추어 향후 약학전문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학교와 과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첫 해는 학교 수업을 병행하다가 실패하였고,  그 이듬 해는 휴학을 하고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면서 준비하였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

 

여섯 번째는 약학 전문대학원에 두번 응시했다가 실패하고 휴학을 하고 집에 있을 때였다.

기가 죽어 집에만 칩거하고 있었다. 말 수도 줄고 누구와 교제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안되겠다 싶어 저녁을 먹고 둘이서 거실에 앉아 성경읽기를 하고 기도를 했다.

몇 달을 계속하면서 신약성경을 다 읽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것이 자신을 회복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다음 해에 복학하고 나서는 표정도 밝아지고 학교 생활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으로 변하였다.

기숙사 생활과 2, 3학년때는 신입생들의 멘토 역할을 하면서 교수와 많이 가까와지고 많은 대화를 했던 것 같다.

좋은 맨토의 교수 사감을 만난 것이 신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후배들에게는 존경하는 선배로, 교수들에게서는 칭찬받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았고

학교생활도 즐겁게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신혜에게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본인이 결정하고 살아가게 하였다.

일년 휴학을 하였지만 전공을 1년 단축하여 조기에 끝내고 4학년 때는 복수 전공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지도 교수는 박사 과정을 권하였지만 그는 포기하고 스스로 직장을 구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재학중에도 입사 경험을 쌓기 위해 외국계 회사에 대학원 졸업 이상 학력자 신입사원 모집에도(자격 미달)

도전을 하기도 했다.

결국 대학원을 마치기 전에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것도 첫 응시에 합격을 했으니 얼마나 기뿐 일인가?

그리고 믿음 좋은 교회 오빠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원 졸업과 취직이 순적하게 이루어졌음을 인정하며 감사하다.

 

그 외도 호주와 미국 서부에 여행갔을 때의 좋은 추억들이 있다.

가족끼리 스페인을 자유 여행했던 좋은 추억, 모든 여행을 준비한 신혜가 대견스럽기만 했다.

물론 숙소와 쇼핑 등의 문제로 갈등을 빗은 못난 아빠 때문에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

비행기 안에서 외국인과 한 시간 이상을 영어로 대화하는 딸을 보고 자랑스러워 했다.

대학 진학 후에 친구와 단 둘이서 3주 가까이 배낭여행을 다녀온 딸이다.

대학원 시절에는 국제 학술대회에 영어로 발표하고 질문에 재치있게 대답하던 딸을 기억한다.

일본에 편하게 다녀온 기억이 있다.

몽골에 의료봉사를 함께 갔던 기억이 새롭다.

초등학교 때 제주도에 여행갔던 사진들을 보면 기억이 새롭다.

군복무 중에 휴가를 내어 강원도를 여행하던 기억들, 한계령, 미시령, 대관령을 넘나들며 많은 곳을 다녔었다.

피아노를 배우고 대회에 나간 일, 플릇을 배우고 부산에 대회에 나갔던 일

무주 리조트에서 함께 스키를 타던 기억

고등학교 때 서너명이 울산대학교에 가서 과학 실험을 하던 일

중학교 때는 울산시 지원으로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 온 일도 기억이 난다.

신혜는 태어나서는 할머니 손에 자랐고, 외할머니도 잘 따랐다.

조부모를 사랑하고 사랑받은 이쁜 손녀였다.

성장하면서 크게 애를 먹이고 힘들게 하지는 않았던 착한 딸이었다.

신혜와 함께했던 이런 저런 기억들을 떠올려 보고 기록에 남겨두고 싶다.

 

비교적 신혜는 착하게 잘 성장했다. 그러나 초보 아빠의 미숙함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지금  같으면 훨씬 잘 해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세월은 돌이킬 수 없는 법, 그러나 사위가 참 잘한다. 감사할 따름이다.

아버지에게 부족했던 사랑을 남편에게서 받고 있으니 다행이다. 

 

대학교 시절 여름 수련회에 가서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방언기도를 했다며

밝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하던 딸을 기억한다.

본인의 입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던지 ..

이제는 부모의 신앙으로가 아닌 자신의 믿음으로 살아갈 딸이기에 안심이 되고 자랑스럽고 감사했다.

그리고 세속적인 좋은 조건을 가진 배우자가 아닌  바른 신앙과 인격을 가진 배우자를 선택한 것도 자랑스럽다.

부모와 이웃의 전문직이나 재력이 있는 남자들을 소개해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배우자를 선택한 용기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리라 믿는다. 

 

이제 인우를 낳고 둘째를 임신 중에 있다. 더 사랑하고 도와주고 기도해 주리라.

손주들에게 딸에게 부족했던 사랑과 관심과 양육을 베풀고 싶다.

신혜야 사랑한다. 부족했던 아빠를 용서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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