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변화산에서 들린 음성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3. 7. 12:07

본문 ; 누가복음 9장 28-36절

 

내가 누구냐고 물으시고 메시아가 가는 길과 제자로 사는 길을 말씀하신 뒤

8일쯤 뒤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셨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며

영광 중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한다.

자다가 개어난 베드로가 예수께 초막 셋을 짖겠다고 하자 

구름 속에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이 산을 변화산이라고 부른다.

누가는 왜 구지 팔 일쯤 되어라고 언급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신 것이다.

율법과 선지서의 대표적 구약의 인물,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 

구름 속에서 들은 음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베드로와 두 제자는 왜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했을까?

 

갈보리산을 올라야 변화산이 보인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이후에 벌어진 예수님의 책망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시고,

그 아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 길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정치적 해방자 메시아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죽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킬 메시아의 길임을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와서 

구약이 말하는 메시아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의 성취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이다.

그 성취를 위해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만 하고

그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자들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굳게 다짐하며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변화산의 영광은 힘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격려와 위로의 장면이다.

갈보리산을 넘어야 변화산의 영광을 볼 수 있다.

이 산을 넘지 않고 변화산으로 바로 갈 수 없다.

우리는 늘 과정을 소흘히 할 때가 많다.

분명한 소망을 붙들고 오늘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완주해야 한다.

변화산의 영광은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견딜 수 있는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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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도 있다"고 하신 약속(9:27)을 미리 맛볼 수 있도록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주신다.

제자들은 갈보리산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직면할 때,

그 이면에 흐르는 변화산의 영광을 기억해야 한다.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셔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증언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곧 '별세'(헬. 엑소도스)하실 것이다.

죽음을 뜻하는 '출애굽'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새 출애굽을 통해

온 인류에게 주어질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가리킨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속박하여 하지만,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자유의 길은 영원히 우리에게 열려 있다.

 

'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이는 이 산에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는 베드로의 제안에 대해

'거절'이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변화산'이 아닌 '갈보리산'으로 올라가라는 '명령'이다.

그래야 예수께서 누리실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께 해드릴 것을 생각하기 전에 주님이 내게 원하는 것을 듣고 있는가?

 

영광은 잠시뿐이었고 예수님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신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야 하는 예수님은 영광의 광채에 휩싸인 분이 아니다.

놀라운 기적만 일으키는 분도 아니다.

말씀을 따라 하루 하루 평범한 예수님과 동행할 때,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영광까지 나아갈 수 있다.

 

베드로는 눈앞의 영광에 취해 초막 셋을 지어서 예수님과 엘리아와 모세에게 드리겠다고 한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그새 망각하고 당장의 영광에만 머물려고 한 것이다.

오늘의 작은 성공에 도취되어 십자가의 삶을 외면한 채 이 세상이 전부인 듯 살고 있진 않는가?

 

이 땅의 영광을 추구하느라 하늘 영광을 외면하고 십자가를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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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합작하여 제자들의 기를 죽이시는 하나님]

복음서의 몇 군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대동하신 장면이 등장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을 때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차별하여 대우하신 것일까요?

혹은 세 제자가 워낙 탁월한 믿음의 보유자이어서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베드로의 믿음이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성경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 경우의 공통점을 살펴보는 것으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 경우의 공통점은 진행되는 상황의 의미를 제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시거나, 제자들 스스로가 함구하게 됩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이지만, 기억은 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래야 나중에라도 깨달을 수 있을테니까) 최소한의 인원을 대동하십니다. 

괜히 쓸데없는 말들과 오해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증인으로서의 유효성을 인정받는 최소한의 숫자 요건으로서 2~3명만 현장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9:18-27절의 내용이 그런 상황에 대한 기록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제대로 고백했지만,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함구령을 실효 있게 하시기 위해 변화산에 3인방을 데리고 올라가서 겁(?)을 좀 주십니다. 

3인방을 포함하여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이라고 멋있게 정답을 맞힐 때는 뭔가 알았던 것 같았는데,

곧이어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태, 마가 복음에는(마 16:23, 막 8:33)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강하게 만류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도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야?’ 하는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산에 올라갔다 내려온 뒤로는 멍해져 버렸습니다.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은 십자가를 지시려고 하는 것을 말렸었는데,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십자가 지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그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의 독립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있고 싶었습니다.

그때 구름이 이들을 덮었고 이들은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가운데 두려워 떨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9:21절에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신 명령을 지킬 수밖에 없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내려가고 싶지 않아도 주님이 명하시니 내려갈 수밖에 없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아직 온전히 수긍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36절).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주 예수님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훔쳐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강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이 땅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자기들의 동포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입니다. 

지금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구해야 할 때인데, 

십자가에 죽는다는 맥빠지는 소리를 하는 예수님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땅의 나라에 대한 열정적인 애국심으로 불타오르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시며 기를 죽이셨습니다. 

예수님과 합작하여 기를 죽이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열정(?)으로 십자가의 길에 훼방을 놓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2등이라도 합니다. 

아니, 1등이신 예수님 말씀대로 가만히 있으면 확실한 2등입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 알려주시지 않는 것에는 함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언젠가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그때까지는 잠잠히 기다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뭔가 큰일을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순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순종은, 죽는 순종이요 가만히 기다리는 순종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뜨거운 열정과 자기 과시욕에서 나오는 열심을 분별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가만히 있게 하실 때는 가만히 있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 되기 원합니다. 

왜 실패를 허락하셨는지 분명히 알게 하실 때까지 잠잠히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참 생명과 영광은 십자가의 길로 나 있음을 분명히 믿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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