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11장 27-36절
한 여인이 예수님을 나은 어머니가 복이 있다고 부러운 듯 칭송하자
예수님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무리가 예수님에게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데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땅 끝에서 남방 여왕,
요나의 '니느웨 성이 멸망하리라'는 경고의 외침에 니느웨 성 모든 사람들이 금식하며 회개했던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이어 마음의 등불이 밝아야 어둠에 헤매이지 않고 밝히 볼 수 있음을 강조하신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진정 복 있는 자가 누구인지 언급한다.
계시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한다.
제사보다 순종이 낮다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요약하면 '청종'과 '순종'이다.
마음의 눈, 영안이 열려야 한다. 그래서 진리를 밝히 볼 수 있다.
불 빛이 희미하게 비치면 사물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영안이 열리지 않고, 밝지 못하면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지 못한다.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그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솔로몬을 찾아왔던
남방 여왕의 열심이 눈에 들어와 도전을 준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열심을 내고 참여해야 한다.
설교, 예배의 자리, 라브리 강의, 말씀 묵상의 자리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는가?
말씀을 듣는 자리를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 말이다.
매너리즘에 젖어 있거나, 식상해 하고, 안일하게 살고 있지 않는지 뒤돌아 본다.
요나 선지자의 몇 마디 경고에 왕부터 모든 백성이 금식하며 회개하는 모습이 기적이다.
수많은 선지자들의 경고에도 회개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구원을 선포하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 어둠 속에 헤메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니느웨 백성들의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이 나에게는 있는가?
듣기만 하고 행하기에 더딘 나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한다.
수없이 책을 읽고 또 읽지만 그것을 나의 지식을 쌓는 일에 만족하여
말씀대로 행하는데는 소흘한 영적 교만에 빠지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한마디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백마디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보다 낳다.
갑자기 떠오르는 한자 숙어가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백견이 불여일행이라.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 사도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말씀을 들어야 영안이 열리고, 그 말씀이 빛이 되어, 나의 앞 길을 밝히 보여줄 것이다.
-------
한 여인이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가 복이 있다고 칭송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칭찬을 받을 사람들이라고 하신다.
지금은 예수님의 위대함에 주목할 때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도전에 응답할 때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고 동의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 가르침에 구체적인 삶으로 응답하라는 축구이다.
놀랍고 아름다우신 예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 보일 반응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다(삼상 15:22)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만을 제시하신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삼 일 동안 물고기 배 속에 갇혀 있다가 살아나온 것처럼
예수님이 삼 일 동안 무덤 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실 일을 가리키낟.
하지만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처럼 저기 배를 불릴 기적만 원할 뿐,
십자가에 찢기고 흘리신 예순미의 몸과 피를 영적 자양분으로 삼기를 거절할 것이다.
요나와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을 배척한 그들은
요나의 표적을 신뢰하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신뢰하고 엎드린 남방 여왕 앞에서
그들의 불신을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의 용서와 부활의 새 삶 말고 욕심을 채워줄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진 않는가?
우리가 더 구할 표적은 없다.
우리에게 남은 몫은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보여준 믿음과 회개이다.
등불이신 예수님과 우리 몸의 등불이 만나야 한다.
예수님은 최대한 넓은 곳을 비추려고 높이 들린 등불처럼 모든 이에게 자신의 빛을 비추신다.
그 빛을 포탁하고 영접할 수 있도록 우리도 몸의 등불을 밝히고 영적인 시야를 넓혀야 한다.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방향을 잃듯,
영적인 눈이 어두우면 십자가의 표적이 아닌 세상의 야욕으로 영혼이 휘말려 들어갈 것이다.
말씀에 경청하고 순종하는 자리를 사모하게 하시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
[ 영의 말씀, 생명과 등불이 되는 말씀 ]
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구원의 복, 영생의 복 받았음을 확인하는 지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지킨다는 것은 말씀을 지속적으로 마음에 간직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기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못한다 하여 확실히 구원을 못 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로 가는 과정, 곧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지킨다’(keep)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다만 순종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지 않고 있거나,
아예 순종하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틀림없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복입니다.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것이 복입니다.
28절의 ‘듣고’의 헬라어 동사 형태는 ‘현재(진행)시상 분사’입니다.
계속되는 동작을 표현하는 형태입니다.
한두 번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매일 계속적으로 그 말씀을 사모하며 듣는 자가 복되다는 뜻입니다.
그 눈이 열려서 말씀의 생명력을 보게 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떠서 주의 말씀의 빛을 인지하고 그 빛으로 계속 나아오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복입니다.
‘지킨다’의 본래 의미는 ‘수호하다. 보존하다.’입니다.
나아가서 ‘순종하다’의 의미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역시 ‘현재(진행)시상 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말씀을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자연히 순종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억지로 프로그램 만들어서 인위적인 실천의 훈련을 하는 것은
위선과 교만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하게 합니다. 지양해야 합니다.
눈이 몸의 등불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씀이 우리 마음의 등불이 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바른 자아의식, 진실된 자기 정체성(다른 표현으로 진실된 '자유 의지')을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이 많고 지능이 높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공지능(AI)은 인간보다 훨씬 지식이 많고 똑똑(?)하지만, 그 속에 등불은 없습니다.
자아의식이나 자기 정체성이 없습니다.
지식이나 경험이 비슷한 인공지능은 같은 질문에 항상 비슷한 대답을 동일하게 내놓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을 가진 인간만이 그 마음에 각자의 등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가치관, 각자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거부하고 듣기 싫어하여 그 등불이 희미해진 것이 문제입니다.
눈이 성하여 온몸이 밝은 길을 걷는 것처럼,
말씀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계속 비추어 줄 때 빛 가운데에 행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음이 따라갈 때, 몸도 마음을 따라갑니다.
마음이 말씀을 따르지 않고 어두움에 헤매게 되면, 몸도 이리저리 헤매게 됩니다.
말씀 -> 마음 -> 행함의 순서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영'이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래서 또한 영 -> 마음 -> 행함의 순서입니다.
에스겔 36:26절에서 가르쳐 주신 새언약의 내용대로입니다.
[에스겔 36:26- 27]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11:19-20]
19.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말씀의 빛 가운데 행하면 반드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심판의 표적이요, 정죄의 표적입니다. 또한 회개와 용서의 표적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권능의 표적이 아니고, 능력의 표적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되, 회개하는 죄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다는 표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심을,
자기들이 등불이 어두워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표적(7:22,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 먹은 사람이 들으며, ...)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계속 되새겨 마음에 간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마음에 등불을 켜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의 문제 해결 능력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애통하는 자리로 내려가기보다, 말씀을 이용하여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복된 자로 살게 하옵소서.
말씀으로 문제 해결 받으려 하기보다, 말씀을 잘 듣는 일에 더욱 힘을 쏟게 하여 주옵소서.
그 말씀을 되새기며 깊이 깨닫고 마음에 간직하게 하시는 성령님께 더 민감해지게 하옵소서.
그 말씀으로 인하여 내 몸의 어두운 부분이 밝히 드러나는 복을 받기 원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환한 등불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2025년 영성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 나라 (0) | 2025.03.13 |
---|---|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1) | 2025.03.12 |
진정한 앎이란... (1) | 2025.03.11 |
칠십 인 파송 (2) | 2025.03.10 |
변화산에서 들린 음성 (1) | 2025.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