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20장 19-40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권위에 대한 도전에 실패하고
악한 농부와 모퉁이 돌에 대한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켜 말한 것을 알고
세금과 부활의 문제로 공격하며 제거의 빌미를 찾으려고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유명한 말씀으로
부활한 자들은 천사처럼 ,부활체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것과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으시는 예수님을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하고 재판하려는 어리석음을 본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앞에서
현세의 일도 다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 내세의 일을 논하고 있는 한심함이 느껴진다.
자신들의 지식이 예수보다 우월하여 예수가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올무에 걸려들 것으로 생각하는 교만으로 가득찬 모습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함으로, 순종할려는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리고 나는 미천한 존재임을 안다면
감히 나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향하여 대적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얄팍한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깨닫지 못하는 말씀이 있다면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헤를 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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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바치는 인두세가 적법하냐는 함정 질문을
도리어 세금이나 세속 권력에 대한 바른 태도를 설명하는 기회로 삼으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은
로마 황제의 통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
세속 정부를 세워 질서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되,
궁극적인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 역시 세속 권력을 향한 무조건적인 추종과 저항을 경계하면서,
불법을 요구할 때는 단호히 저항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세상보다 더 철저하게 법을 지켜야 한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인 줄 알고도 돌이키지 않는다.
그 말씀에 잡히기보다는 예수를 잡을려고 했다.
남에게 가혹하던 그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말씀에는 조금도 참지 못했다.
말씀이 내 마음의 악한 생각을 드러낼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종교지도자들은 집요하고 간교했다.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을 향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만큼 완악했고,
예수님을 제거하기까지 공세를 멈추지 않을 만큼 집요했으며,
자신들이 직접 예수를 다루지 않고 로마 당국이 처리하게 하려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가지고 나올 정도로 간교했다.
마음의 악한 동기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데 회개하지 않으니
이렇게 악을 키우고 스스로 완악하게 되고 만 것이다.
사두개인들이 나서서 '형사취수법'을 근거로 부활 신학의 허점을 드러내려 한다.
예수님은 그들이 정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의 글'을 인용하요 그들의 무지와 불신을 지적한다.
그들은 사람이 할 수 없으면 하나님도 할 수 없고,
자신들이 설명하지 못하면 예수님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 면에서 무지는 교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지금도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그분의 통치에 복종할 수도 없다.
제가 아는 지식과 경험이 참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도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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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시는 예수님 ]
예수님이 서기관과 제사장 그룹의 간계에 응수를 하신 것은
힘이 없는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묘책을 발휘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예수님이 더 강자이십니다.
백성의 신망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에 제사장 그룹은 예수님을 부당하게 해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역으로 백성들의 힘을 업고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20장 1-8절의 상황이 그 증거입니다.
자기들이 혹시라도 책 잡힐까 봐 더 이상 예수님을 추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책잡다가 자기들이 역으로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슬쩍슬쩍 잽을 날려 보고는 여의치 않으면 잽싸게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은 몰아세우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잘못을 인지할 수 있도록 여전히 호의를 베푸십니다.
마지막까지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가룟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하십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물으신 질문은 그들을 무척 난처하고 부끄럽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름 애국자인 양, 로마에 대해 식민국민의 의분을 가진 의사인 양,
예수님께 용기 있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실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가운데,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의 정당성 여부를 묻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20절에 ‘의인인 체하며’라는 말이 가리키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로마 제국의 정책에 전혀 대항할 생각이 없는 자임을
한 문장의 질문으로 폭로해 버리십니다.
“이것이 누구의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데나리온에 있는 인물상과 글을 가리켜 물으신 것입니다.
데나리온 자체로 물으셨다면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만,
예수님이 그 위에 새겨진 것을 두고 묻자,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은 가이사의 것 아닙니까?”로 반문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대답을 주십니다.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너희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 되겠네...?”
물었던 자들이 한순간 멍해졌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소유가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 가운데, 그중에 가이사가 관리할 것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있고,
내가 관리할 것으로 허락하신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 관리조차 한시적입니다.
부모 자식의 관계도, 남편 아내의 관계도 일시적인 관계일 뿐입니다(34-35절).
물론 그렇다고 한시적 관리, 일시적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에 충성 되냐 아니냐로 영원한 소유, 영원한 관계가 확정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관리할 것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다른 사람이 무단으로 가져가면 강도나 도둑으로 신고하듯이,
가이사가 관리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가이사에게 내어주지 않으면 그것도 강도나 도둑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국가에 마땅히 세금을 내어야 합니다.
세상의 질서의 대부분은 우리의 신앙 훈련에 유익하기에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아주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것도 큰 테두리에서는 합력하여 선(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 진리, 하나님이 이 세상의 궁극적인 주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나서지 않고 주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살피며 조심스럽게 나서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명백히 정의와 공평을 이루기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다만 19-26절의 초점은 세금을 잘 내어야 함을 강조함에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 공적인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강조점은 오히려 개인적인 태도,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중 대부분이 공기는 하나님이 주신 것, 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인간이 손길을 보태어 조금 가공한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소유권도 꽤 있는 것처럼 착각을 종종 합니다.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내가 어떻게 마련한 집인데... 내가 어떤 고생을 하며 얻은 자리인데...’
하나님께서 그것 내놓으라고 하시면, 그것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시면,
“이것 내 것인데요? 나도 권리가 있는데요?”
말은 이렇게 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당연히 그러하다고 여기며 내 것으로 꽉 움켜쥐고 삽니다.
가이사의 인물상과 글이 있으면 당연히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는 자는,
자기의 손때가 묻은 것을 마찬가지로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겠지요.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그 폭로에 놀라서 침묵하였지만,
끝내 자신들의 지위와 권세를 하나님의 것으로 내려놓지 못한 자들을 보여주시며
우리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바른 대답은 무엇일까요?
혹시 이렇게 대답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맡겨 놓으신 동안만 제가 사용할 뿐입니다.
우리는 맡기신 기간이 끝나면 언제든지 권리를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청지기입니다.
사랑하는 자식도, 사랑하는 아내(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다르게 사용하실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이런 대답이 듣고 싶으십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제사장들의 간계에 일일이 응수하시며
그들의 반응과 심리를 통해 우리를 찌르십니다.
우리 마음이 어떠한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주님, 이런 대답이 제게서 즉각적으로 분명하게 고백되도록 믿음을 지도하여 주옵소서.
말뿐이 아닌, 실제로 삶에서 이루어지는 대답이 되기까지 계속 말씀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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