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열 므나의 비유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4. 5. 09:50

본문 : 누가복음 19장 11-27절

 

누가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고 시각장애자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삭개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시자 

무리들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지는 줄 알고 있었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와 완성이라는 시간을 아시는 주님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

 

열 므나의 비유는 다른 성경에서 달란트 비유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두 비유에서 공통점은 얼마의 결과를 만들어냈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능력으로 최선을 다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결과의 정도에 따라 칭찬의 차이를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므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의 태도에는 분명하게 책망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종들의 모습과 우리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주 먼 훗날의 일로 생각하고 안일하고 나태하게 믿음 생활하는 모습 말이다.

내일 당장 주님이 오신다면 삶의 태도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인간은 본성을 거슬러 노력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한 므나의 종처럼 살아갈 것이다.  

 

긴 기간을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분명한 소망과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평생을 한결같이 믿음생활 하기가 싶지 않다.  

적당한 긴장감 없이 살아가다보면 말씀 앞에서 감동도 도전 받는것도 약하다.

현대인들의 신앙생활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책망, 미지근한 태도가 태반이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함이 없다면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기가 싶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는 삶의 태도가 다르다. 

대충 살아갈 수 없다. 안일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없다.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다.

나 또한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감정이 예전 같지가 않다.

나이탓인가? 매년 반복되는 부활절 앞에서 감격과 흥분과 열정과 사모함이 희미하다.

이번 부활절이 내 인생의 마지막 부활절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시한부 인생' 처럼 살던 아픈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내 마음이 이러지 않았다.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거룩하게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물론 사람의 노력 만으로 온전히 거룩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룩해짐을 알지만

그렇게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희미해져가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다. 

 

성령님 

이 연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내 안에 충만히 임재하셔서

다시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며 섬기며 따르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주장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기쁨과 감사로 은혜 가운데 살게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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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므나의 비유]

 

귀인은 그 종 열을 불러 한 므나씩 맡기고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명한다.

돌아와서 주인이 본 것은 종들의 사업 수완이 아니라 충성이었다.

주님도 심판하시는 날에 비유 속의 귀인처럼

장사의 결과(이윤)보다 과정(삶의내용)을 살피실 것이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성과보다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위험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충성을 원하신다.

 

여리고의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고,

삭개오의 집에서는 예수님이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셨으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하나님 나라가 '즉시' 실현될 줄로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머지않아 실망과 분노로 바뀔 것이다.

그들이 기대한 나라와 예수님의 십자가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가 아닌 하나님 없는 나의 나라를 꿈꾸고 있는 것 아닌가?

 

왕위를 받기 위해 떠난 귀인을 싫어한 비유 속 백성처럼

예루살렘도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할 것이다.

'즐거이' 예수님을 영접하며 환대하던 삭개오와 달리 '싫어하며' 거절할 것이다.

 지금 열렬하게 추종하던 자들도 자신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날 이 왕을 외면할 것이다.

'예수님의 방문'이 삭개오에게는 구원을 가져왔지만, 예루살렘에는 심판을 가져다줄 것이다.

내 마음이 말씀이 아닌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 예수님은 나의 왕이 될 수 없다.

 

므나를 남기지 못한 종은 반성하기는커녕 책임을 주인에게 돌리며 비난한다.

그는 주인이 손해 보면 가만두지 않을 만큼 엄한 사람이라서 그랬다고 변명한다.

주인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은행에 맡겨 이자를 받았어야 했다고 반박한다.

주인을 우습게 여긴 종은 결국 가지고 있던 한 므나마저 빼앗긴다.

그릇된 이해가 그릇된 태도를 낳은 것처럼,

대중의 그릇된 기대 역시 그릇된 반응으로 이어질 것이다.

무지가 무책임의 변명이 될 수 없다.

 

주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 충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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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 장사, 복음 장사 ]

믿음은 물건이나 티켓처럼 한 번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믿음은 마음의 연단을 통해 자라가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은 그 종들에게 믿음의 연단을 시키십니다. 

한 므나의 문제를 내시고는 그들의 믿음이 완성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그 믿음은 자기 부인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는 것, 한 번의 결단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는 만큼 내 안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죽는 만큼, 교만이 죽는 만큼, 욕심이 죽는 만큼, 자랑과 고집과 주장과 큰소리가 죽는 만큼

하나님 나라는 커집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이런 나라로 초대하는 그 나라의 왕을 미워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꺾으라고 하니, 자기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말을 하시니 반발합니다.

자기를 치켜세워주지 않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왕을 찾습니다. 

자기를 크게 해 주고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왕을 원합니다. 

그것도 나중에 죽어서 부활한 이후에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뭔가를 내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죽고 나면 어찌될지 알 수 없는데 죽고 나서 잘해 준다는 게 무슨 소용이냐?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줘 봐라. 그럼 믿어 줄게.”

그 왕이 이미 다 주셨다는 것을 모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그 왕에게서 받은 것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충분히 주셨다고, 

그래서 이제는 그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에 매진하자고 말씀하시는데 듣지 않습니다. 

주신 것 갖고 하나님 나라 준비하는 데 힘을 다하지 않고,

그것을 주인의 뜻과 다르게 횡령하는 것에 열을 올립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과 만족을 추구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세상 나라를 단단히 하는 일에 기를 씁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들은 주인의 이름으로 장사를 해야 합니다. 장사가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주인이 하라고 명령을 하였으니, 종들은 순종해야 합니다. 

장사를 하는 것 자체가 믿음의 훈련입니다. 

되지도 않을 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왕이 돌아와 결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말을 믿고 순종하여 장사를 하였던 종들이 나아와 보고를 합니다.

장사를 하여 남긴 종들이 첫째, 둘째로 나와서 보고합니다. 

그 보고가 기이합니다. 헬라어로 직역을 해 봅니다. 

“주인이여, 당신의 그 한 므나가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의 그 한 므나가 다섯 므나를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싫어하는 왕의 므나였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장사가 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어느 날 셈을 해 보니 므나가 새끼를 쳤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복음이 제 스스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들이 한 것은 믿음으로 견디며 복음 붙들고 포기하지 않은 것밖에 없었습니다. 

충성하였다는 칭찬의 헬라어는 ‘피스토스’인데 ‘믿음’이라는 단어의 형용사형입니다.

지극히 작아 보이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잃지 않고 가지고 있었더니

어느 날 그 나라가 스스로 자라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을 믿지 못하고 온 세상이 싫어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십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묻어 둔 종도 있었습니다. 

그 종은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기게 됩니다.

[마태복음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장사하는 능력이 없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능력이 없기는 앞의 두 종도 매한가지였습니다. 

첫째, 둘째와는 달리 세 번째 사람이 있던 므나조차 빼앗긴 이유는 충성된 믿음이 없어서였습니다.

[마가복음 4:24-29]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헤아림이=믿음이)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첫째, 둘째 종이 므나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탁월한 능력이나 좋은 환경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충성스러운 믿음이 있었기에 므나가 남겨졌습니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므나가 저절로 새끼를 쳤습니다(막 4;27).

결국 첫째, 둘째 종이 남긴 므나는 복음에 대한 믿음 내지는 믿음의 열매를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믿음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믿게 한 열매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둘 중에 더욱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의 믿음입니다. 

막 4:24절에서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믿음 장사에 신경 쓰라는 권면입니다.

남에게는 실컷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를 얻게 해 놓고 

자신은 믿음이 없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우리에게 최소한 이런 황당한 일은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나는 괜찮겠지’ 하고 안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많이 남긴 종이 첫째로 나와서 보고했고 두 번째로 많이 남긴 종이 그다음 보고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세 번째로 나와 보고한 종은 므나를 그냥 묻어둔 종이었습니다. 

넷째부터 열째까지는 그보다 못하거나 더 부진한 결과일 것이 뻔합니다. 

열 명 중 두 명 외에는 다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파묻어 놓고 있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을 가장 먼저 내게 자꾸 팔아서 먹여야 합니다. 

일주일 동안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성경을 주일 예배에 가져 나오기 위해 

먼지를 털어야 하는 상황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기 원합니다. 

요즘은 먼지조차 털지 않지요. 아예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까. 

1년 내내 예배 시간 외에는 성경 한 장도 읽지 않는 기독교인(?)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싫어한다고 나도 따라서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믿음의 장사 하는 사람들이 적다고 덩달아 나도 접지 말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작은 믿음을 발휘하여 믿음의 장사, 복음 장사를 꾸준히 해야겠습니다. 

믿는 자에게 성령님을 선물로 주신 주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믿음을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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