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시각장애자와 눈이 먼 자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4. 3. 09:30

본문 : 누가복음 18장 31절 -43절

 

이제 마지막 예루살렘 여정이시다.

여리고를 지나면  예루살렘이 멀리 않았다. 

제자들은 내가 가는 길을 정확히 이해하고 알고 있을까?

다시 한 번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시각장애자의 이야기로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여리고에 가까이 갔을 때 한 시각장애자 많은 사람이 몰려가는 것을 듣고 묻는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말하자 큰 소리로 외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도 예수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나보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소문 말이다.

앞서 가는 자들이 조용히 하라고 자제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친다.

그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다. 결코 놓칠 수 없다.

필사적으로 다가가고 있는 힘을 다해 외쳤을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이 멈춰서서 명하여 그를 데려오게 하신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고, 백성들은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아니 하나님이심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은 영적 시각장애인이다.

영안이 열리지 않은 채 예루살렘으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깝고 마음이 힘드셨을까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세번 때 수난을 예고 하시는데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이제 지상에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제자들은 자신이 가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일임하고 가셔야 하는데 말이다.

 

날마다 주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제자들처럼

일상의 일들을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시각장에인처럼 살아가는 자신을 본다. 

성령이여 내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깨닫게 도와 주소서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고 행하게 인도하여 주소서.

 

절대절명의 순간, 자기에게 다가온 그 천재일우의 순간을 놓칠 수 없어

필사적으로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외치고 또 외쳤을 것이다.

평생의 소원이다. 어쩌면 유일한 소망이다. 보고 싶다는 것., 볼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

목이 터져라 있는 힘을 다해 예수를 향해 도와달라고, 제발 누늘 뜨게 해달라고 말이다.

이런 시각장애인의 심정으로 오늘 주님께 기도하고 있는가?

솔직히 그렇지 못하다. 

수난절을 보내면서도 나에게는 제자들의 마음에 가깝다. 

부활절을 기다리면서도 시각장애인과 같은 마음으로 구원을 바라고 영생을 구하는지 자문해본다.

 

성령이여 무디어지고 미지근해진 제 마음이 새롭게 되고 다시 열정을 회복하게 하여 주소서.

머리가 커지지 않고 마음도 뜨거워지게 하여 주소서..

이 지고지선의 소중한 최고의 복, 구원을 향한 마음이 태도가 간절함, 절박함으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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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 가는 이 여정 끝에 체포와 재판, 능욕과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계셨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고 사명임을 아셨기 때문에 행보를 늦추거나 행로를 바꾸지 않으셨다. 

순종 뒤에 생명이 있고 영광이 있다는 것도 아셨고,

제자들도 어서 이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몸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 길에 동참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믿음과 따름'은 분리할 수 없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향한 이 결연한 행보에 동참하는 일이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길을 방해한다고 시각장애인을 꾸짖지만

예수님은 그의 외마디 외침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부르신다.

그리고 그의 간절한 바람과 믿음에 응답하여 눈을 열어주신다.

육신의 눈만 아니라 영혼의 눈도 밝아져 주심을 따른 시각장애인처럼 제자들의 영안도 열리기를 바라셨다. 

열린 눈으로만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요, 영광의 길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눈이 열린 자가 진정 복된 자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세 번째 예고하시는데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말해도 못 알아들을 만큼 자기들만의 나라, 자기들만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는 보상에는 관심이 컸지만 주님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은 몰랐다.

그들은 여전히 영적인 시각장애인이었다.

주의 말씀보다 내 기대와 욕망이 앞설 때 우리도 다를 바 없다.

 

오랜 세월 흑암 속에 살았던 여리고의 시각장애인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친다. '디윗의 자손 예수'를 외치며 다급히 구원을 요청한다.

앞서가는 자들이 꾸짖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더 큰 소리를 지르며 매달린다.

그의 모습에서 포기를 모르고 강청하던 과부, 가슴을 치며 자비만을 구하던 세리,

예수님이 아니면 소망이 없다고 여길 만큼 겸손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절박한 심정이 나에게도 잇는가?

 

여리고 시각장애인의 절박한 심정과 밝은영안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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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부인과 애통에서 나오는 믿음 ]

예루살렘에 가까이 갈수록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강조하십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과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삼 일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길, 구원의 길을 가르치신 것인데 제자들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문자적인 말뜻을 모르지는 않았겠지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슨 유익이 있는지,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다는 뜻일 겁니다. 

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는지, 왜 구원의 길에 십자가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지를

수긍하지 못했다는 뜻일 겁니다.

지금 우리도 비슷한 상태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예수님 믿겠다고 교회에 나왔는데, 말씀을 듣고 기도도 하는데, 

예수님 믿는다는 것이 무엇 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고 그냥 왔다갔다만 하고 있지 않은지요.

십자가의 길이 왜 구원의 길인지, 왜 꼭 자기 십자가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인지

납득은커녕 이해도 못하고 그냥 예배 출석만 하고 있지 않은지요.

자발적인 죽음의 길,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내어놓는 자기 부인의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길은 온전한 믿음으로 이끄는 길이고,

또한 믿음으로만 시작할 수 있고,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믿음 있으면 아무리 능력이 없는 자라 해도 갈 수 있으며,

믿음 없으면 오히려 능력이 많을수록 가기 힘든 길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의 십자가는 자기 부인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믿음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고집과 교만을 내려놓고, 자기 주장과 욕심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기 부인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이런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신뢰하고 주장하는 마음이 완전히 깨져야 합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과 전적인 순종의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은 자는 결코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오직 믿음으로 가는 구원의 길을 인간에게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이 ‘믿음’만을 요구하십니다.

오직 믿음 하나만 보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것은 그분께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분께 가치가 없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리고, 무엇을 갖다 드려서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히 11:5-6]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안타까이 여기기는 하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으십니다. 

깨닫지 못한다고 타박하지 않으십니다. 깨닫지 못하니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침묵하시지도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다 깨닫게 해 주실 텐데, 굳이 열심히 성경 공부할 필요 없다는 분이 우리 중에 없기를...

언젠가 깨닫게 될 날, 언젠가 눈 뜰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을 아시기에 그 날을 준비하십니다. 

깨닫지 못해도 일단 기억하게 만드십니다. 

반복적으로 말씀하셔서 나중에 깨닫게 해 주실 때 기억나도록 공부시키십니다. 

성령님께서 반드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요 14:26).

그리고 한 맹인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어떤 탁월한 훈련과 노력으로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면 

길가에서 구걸하던 맹인조차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맹인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애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맹인은 보지 못하는 것을 자기의 근본 문제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애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애통은 절망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절망은 문제 때문에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통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안타까워하며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길을 찾습니다.

찾을 때까지 계속 찾습니다.

이 애통과 자기 부인의 마음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은 사람은 조금 애통하다가 포기합니다. 

자기가 못하는 것은 해결방법이 없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절망해 버립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 된 사람은 애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해결 못 하는 것이 너무 많고 또 당연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기 밖에서 뭔가 해결책을 계속 찾습니다.

절망하지 않고 자기 밖에서 계속 해결책을 찾던 맹인에게 마침내 예수님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는 기를 쓰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치며 매어 달렸습니다. 

오직 예수님밖에 구원자가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입니다. 

절망과는 다른 자기 부인과 애통에서 나오는 믿음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주님을 찾는 것이 애통에서 나오는 믿음입니다.

소경에게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확인하시고 인정하셨습니다. 

일부러 제자들 들으라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크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적과 신비한 체험보다 애통하는 마음이 더 귀하네요. 

제자들은 기적과 신비한 능력을 이미 많이 경험했지만 맹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에게 제자들에게 없었던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맹인이기에 자기 부인이 더욱 쉬웠을 것입니다. 이 자기 부인의 믿음이 더욱 그를 애통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여, 눈을 열어주옵소서. 온전히 밝게 열어주옵소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원하는 마음, 절박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이 애통의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며 말씀을 듣게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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