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16장 ;14-31절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말씀하시자
돈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이 비웃는다.
그들이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임을 지적하시며,
지금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 스스로 옳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미움을 받는것이라고 지적하신다.
이어서 율법과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신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가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유명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말씀을 마치시면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한 말을 듣고 권함을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에게 부는 축복의 상징이었다. 의의 증거였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부자와 거지가 죽었는데 결과는 역전이 되었다.
하나님을 잘 섬겨서 복을 받았으면 의의증거였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여 복을 받지 못해 거지로 살았던 자는 지옥에 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고정 관념이 깨어지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행했다면
무엇이 진정 복이고, 구원에 이르는 길인지 알았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를 해야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구약의 말씀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불신자들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다.
탐욕과 위선으로 살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다는 착각이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해져도 깨닫지 못하고 비웃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뒤바귄 운명, 본질을 말하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속을 들킨 듯 당황하며 비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
그들은 경건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듯 행세하지만,
사실은 돈과 명예를 숭배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온갖 종교의식을 도구로 삼아 자기를 의롭고 흠 없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치장한다.
이로써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마음을 훔쳐서 존경을 받아낸다.
그들의 죄목은 탐욕을 신으로 삼은 '우상숭배'와 이를 철저히 숨긴 '위선'이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과 위선을 버리지 못하면 결코 주님과 동행할 수 없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열린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는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한다.
그러므로 율법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비록 시대에 따라 모양은 달라지지만 그 본질과 정신은 변하지 않는다.
'복음'의 시대를 산다고 '율법' 자체를 버려선 안 된다.
모든 성경을 대할 때,
문자 너머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발견한 하나님의 뜻을 내 삶에 담아내는 일에 날마다 열심을 내자.(롬 12:2)
바리새인들은 '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복'으로서,
한 개인의 '의'를 입증하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죽음 이후 거지 나사로가 보상을 받고
오히려 부자가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그들의 통념을 깨뜨리신다.
'부' 자체가 악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사로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그를 집 안으로 들여 돌봐주기를 거부한 그의 '이기심' 때문이다.
한 개인이 소유한 부의 규모는 그 부를 사용하는 방식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부를 사용한 방식이 하나님 백성의 표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돈과 소유를 자신만을 위해 쌓아두는가, 아니면 다른 이들을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가?
재물 사용 방식이 내가 장차 있을 곳을 결정함을 인식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재물을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나누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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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로 살지 않는 훈련을 기꺼이 받는 사람 ]
말씀의 초점은 거지 나사로에게 있지 않습니다.
돈을 좋아하고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들(14, 15절),
이리저리 여자를 바꿔가며 세상 연락을 즐기는 자들(18절)의 비웃음에 답하시는 말씀이니
부자에게 초점을 맞추어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이 말하는 것만 말하고, 말씀이 가는 곳까지만 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듣는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요지는
과시하고 자랑하는 삶, 즐기는 삶을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부와 건강과 시간을 소진해 버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처럼 재물도 없고 건강도 없이 고난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요.
다만 그러한 삶이 천국을 위해 더 안전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와 명예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이
복음의 길에 위험한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고난과 성도의 삶은 참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신분이 훈련생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소에서는 당연히 고되어야 하는 건데,
훈련소에서 즐기려 하고 훈련소에서 편안함만을 추구한다면
자신을 훈련생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인 것이지요.
19절의 부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부자가 즐거움을 추구하는 행위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훈련소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적을 잘 내든 못 내든 그것과 관계없이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각과 인정 그리고 그에 따른 태도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과 태도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자는 자신을 전혀 훈련생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천국을 소망하며 그 나라에서 잘 살기 위한 훈련에 관심이 있느냐 아니냐의 태도로 드러납니다.
때로 유혹에 빠질 수 있고 때로 훈련에 낙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훈련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이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상태는 믿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과 예배에 아무 관심이 없이 체면 때문에, 혹은 사교나 이익을 위해 교회에 나온다면
부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잘 못 알아들어도 괜찮습니다. 이해력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쑥쑥 자라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기 원하고 들은 말씀으로 훈련하는 가운데 연단을 받아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는 마음만은 분명해야 합니다.
심지어 말씀을 잘 알아들었지만 육신이 약하여 당장에 그대로 순종이 안 되는 경우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건성으로 듣거나 적당히 걸러 듣는 태도가 우리에게 고착화되어 있다면
우리는 부자와 비슷한 결말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믿음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품으셨다가(엡 1:4),
이 세상(훈련소)에 내 놓으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거듭나게 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이루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생의 자리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이요 배신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이 땅에서의 자신의 신분이 훈련생임을 거부하는 자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이나 죽은 자를 살려 보내서 공포감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협박하여 훈련시키지 않습니다(31절).
말로 타이르고 끝까지 설득하십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따라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진실된 믿음과 사랑이 될 테니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진짜로 소유한,
하나님의 진짜 자녀(선한 일을 갈망하는 자기 백성, 딛 2:14)가 되는 것이니까요.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선한 일이 무엇일까요?
선한 일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마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로마서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둘째 계명과 첫째 계명은 같은 것이고,
그래서 둘째 계명을 지킴으로써 첫째 계명도 지키게 된다고 하십니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우리가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길인 거지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그 중에 연약한 자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중 지극히 작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늘 말씀의 부자처럼 살 수 없습니다.
같은 동족으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나사로가 그렇게 빈궁하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데,
그것을 본체만체하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쾌락만 추구하며 살 수 없습니다.
북한의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있고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데,
꺽꺽 소리가 나도록 먹고 배를 두드리며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부자가 될 수는 있어도 부자로 살지는 못하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부자로 살지 않는 훈련을 기꺼이 받는 사람입니다.
(16-18절) 문제는 강압적인 방법으로는 우리가 이 믿음과 사랑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이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완전한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무능력과 실패를 확인시켜 줄 수는 있어도,
그 실패를 극복할 힘은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온유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항상 우리의 주인으로 계시면서
간섭하시고 가르치시고 훈련시켜 주시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교회라는 선물을 주셔서, 또한 성령의 선물을 주셔서
말씀으로 계속 가르치고 훈련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기에 오늘도 말씀을 들으러, 말씀 붙들고 기도하러,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러 이곳에 나왔습니다. 아멘!
주님, 부자가 되더라도 부자로 살지 않기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의 자리에 앉지(시편1:1) 아니하기를 원합니다.
부자로 살지 않는 훈련을 기꺼이 받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교회를 통해, 성령님께서 계속 말씀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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