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참된 믿음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3. 29. 09:39

본문 : 누가복음 17장 1-10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작은 자를 실족케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

형제가 범죄하면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청하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더러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것이 순종할 것이라고 하신다.

종이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다.

 

믿음의 자세를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래야 주어진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에도 한계를 정하고 용서를 한다. 

자기의 주어진 일을 당연함으로 끝가지 순종하기 보다는 할만큼 했다고 투덜되고 불평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코 큰 자, 작은 자가 따로 없다, 차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동등한 귀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을 용서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도 하루에 일곱 번을 용서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원수도 용서하셨다.

그 용서를 닮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용서의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하신다.

]믿음이 크기와 넓이와 깊이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믿음인가가 중요한 문제다.

믿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으로 온전히 기대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의 모습은 작은 자들을 섬기고,  끝없이 용서하고, 맡은 일에 끝가지 충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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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기준을 '작은 자'에 대한 태도에 두신다.

'작은 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곧 가난한 자, 낮은 자,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자 등을 의미한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없을 수 없다'는 말씀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빠지지 쉬운 큰 죄니 더욱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작은 자를 존중하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의 결핍을 분담하는 것이

제자다운 제자이자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에 있어서, 그 횟수에 제한을 두지 말라고 하신다.

회개의 진정성을 요구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회개한 후에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용서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있다는

용서의 참 원리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본다.

자격 없는 나임에도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수혜를 입었다면,

나도 자격 없는 사람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제자들은 작은 자를 섬기고 지속적인 용서를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더함, 곧 '큰 믿음'을 요청한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큰 믿음'이 아니라, 작더라도 '참된 믿음'이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참된 믿음은 역사를 일으킨다.

믿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 덕분이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더 큰 믿음을 달라는 말로 순종을 유예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기에 즉각 힘을 다해 순종한다.

 

하나님과 우리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

나의 순종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가 된다거나

하나님에게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주님이 이미 믿음을 주셨으니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고,

주신 믿음으로 '해야 할 일'에 순종할 뿐이다.

'주님'이 라는 부름말에 이런 관계가 되새겨지고 있는가?

 

항상 종의 자세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순종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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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이 붙드는 믿음의 길]

믿음의 출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확신,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출발점은 자기 부인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당신은 의인이십니다. 의인이신 당신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없어져야 할 죄인인 나 때문입니다.” 

백부장처럼(눅23:47) 십자가 밑에서 이렇게 자백하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안 된다고 자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노력의 전제가 바뀌고 그래서 노력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기의 힘으로 이루려는 노력을 그치는 것이 믿음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노력에 모든 힘을 다 쏟는 것이 믿음입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입니다.

(1-4절)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찮게 여기며 무시했던 자에게 사과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의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며 무시하고 멸시했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똑같이 의롭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신의 죄도 용서해 달라고 감히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렇게 하지 않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자기 부인의 믿음이 없으면, 연약한 형제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양보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서로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된 교회, 거룩한 공교회는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공교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에 대한 죄용서가 확정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죄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납하지 못하여 

최후의 확정 용서를 받지 못하고 빚 탕감을 취소당한 사례가 분명히 있습니다(마태복음 18:23-35). 

사도신경의 고백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는 

이 원리에 대한 고백입니다.

죄 용서와 영생을 위해서는 거룩한 공교회 됨과 성도에 대한 용납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고 자기의 죄도 용서받아야 할 터인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일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16장과 이어지는 말씀인 것을 감안하면 

이 죄를 짓게 만드는(실족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가르치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이 부자가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니 그들은 도와줄 하등의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형제의 어려움을 보고도 돕지 않는 죄를 짓게(실족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다부진 목표를 세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내가 뭔가를 잘 해서, 하나님께 뭔가를 많이 해 드려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돈 많이 벌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을 알고 보니 그동안 하나님 속만 무지하게 썩게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백해무익한 종이었음을 자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무익한 종의 믿음 이야기와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은 

두 이야기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부자가 된 것이 자기의 신실한 믿음 생활에 대한 대가라고 여기는 부자는 

형제의 가난함을 돌아볼 아무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가 만약 자신이 부자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겼다면, 

자기에게는 부자로 살 자격이 없음을 인정했다면, 

자기 집 문에 있던 나사로를 그렇게 방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5-10절)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를 붙드는 믿음,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인정하는 믿음을 귀하게 여기며 찾고 계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를 명하여 뿌리가 뽑히어 바다에 심기어라 할 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 하겠다고 힘을 내는 것이 하나님께 별로 기쁨을 드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

산을 옮기는 일을 대단한 일로 여기고 그런 일 하려고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이루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된 믿음이 너무나 소중하여 그 믿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너무 귀하게 여기며 찾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믿음 가진 자에게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기를 원하시며, 

믿음 만드는 일을 가장 중요하고 큰일로 여기시는데, 

어리석은 인간은 돈을 벌고 산을 옮기는 일을 가장 큰 일로 여깁니다. 

그런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개 코 같은 소립니다. 지 영광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도 영광스럽지 않은 일입니다. 큰 일도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보다 작은 일입니다.

큰 돈을 벌기 원하고 산을 옮기는 일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그래도 이 정도는 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진정한 믿음의 자리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목사, 장로들을 보며 마음이 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대로 행하지는 않는 교회 때문에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가르치면서 그대로 살리라 다짐했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 7:10)는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여기며 그렇게 나도 하리라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안 되는구나!’였습니다. 

정말 노력하고 애써 보았는데, 조금 되는듯하다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는 경험이 반복되었습니다. 

내 힘으로는, 내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 살 수 없음이 거듭 확인되었습니다.

누구를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중요한(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분명히 이해되었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붙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십자가의 대속의 은혜, 그리고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결코 죄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의 무능력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정죄의 법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무익한 종임을 고백하며 이제 믿음의 길로 갑니다. 

궁구하고, 노력하고, 씨름한 결과입니다. 

그렇게 씨름하지 않았다면, 진실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이, 내가 진짜로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마음먹고 하면 나도 할 수 있어!’ 이랬을 것입니다.

율법을 붙들고 씨름하고 노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결과로 내가 할 수 없음을 철저히 경험하고 인정하여,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 이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 주옵소서. 

교만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붙드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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