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삭개오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4. 4. 11:44

본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예수님이 여리고를 통과하시면서 세리장 삭개오를 만난 이야기이다.

삭개오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 세리로 살고 있었다. 

경제적인 여유와 안정에도 불구하고 삶의 허무와 공허함 그리고 영적 갈급함이 그를 괴롭혔다.

당시 유대인들과 어울리고 살지는 못했지만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은 듣고 있었다.

한 번 만나 상담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 예수가  자기 마을을 통과한 소식을 접한다.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 작은 키로는 많은 무리에 휩싸여 이동하시는 예수를 볼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무리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 예수를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여리고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돌무화과나무에 있는 한 사나이를 보신다.

그런데 무명의 한 중년의 남자가 아니라 삭개오라고 이름을 부르시며 내려오라고 하시고

오늘 그 집에서 하루 머무신다고 하자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도 감사한데 자기 집에 들어와 머무신다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동족 유대인들과 거의 관계를 끊고 살아가는 그에게 이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자 삭개오의 놀라운 고백이 이어진다.

언제 이 고백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내놓고

남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가 갚겠다고 한다. 

에수께서 이말을 들으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아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신다. 

 

정 근두 목사님의 [삭개오의 이야기] 작은 책이 떠오른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셨는데

오늘 부자, 세리장 삭개오가 그것도 죄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자가 구원을 받은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들은 누구인가?

지금 그들은 이 땅에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삭개오의 즉각적인 회심과 삶의 태도의 변화가 극적으로 전개되어 전해지고 있다. 

한 인간(죄인)이 예수님을 만나면 모두 이런 드마마틱한 변화를 경험하는가?

그렇지 않다.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 

 

------

[바늘 귀를 통과한 부자]

 

삭개오가 회개하거나 신앙을 고백하기도 전에 그를 찾아와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죄인의 친구라는 조롱을 무릅쓰고 그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신다.

마치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버선발로 뛰어가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

자기밖에 모르던 삭개오가 자신을 부인하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과 환대 때문이다.

내게도 잃은 자를 찾아오신 무조건적인 주님의 초청과 은혜가 있었는가?

 

삭개오의 회개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신다.

진심어린 영접과 소유 포기의 그의 참된 회개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삭개오는, 부자도 세리도 죄인도 아닌, 끝가지 찾아 구원해야 할 '잃어버린' 자였다.

이 새상이 나를 어떻게 규정하여 차별하고 배제하든.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큰 사랑을 베푸실 만큼 나는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이다.

잃은 자에게 찾은 자가 된 우리가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찾아야 할 잃은 자는 누구인가?

 

삭개오는 '세리의 친구'로 알려진 예수님의 방문 소식을 듣고

그분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오르는 수모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회적 위신을 다 버리고 사력을 다해,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

남다른 부와 지위가 있지만 남모를 고뇌가 있고, 이렇게라도 예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영적인 갈증이 있다.

성전의 세리나 여리고의 세리 삭개오처럼, 자기 삶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

주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갈망이 내게도 있는가?

 

삭개오의 회개는 말이나 감정만의 회개가 아니었다.

소유의 절반을 나눠주는 결단과 속여 빼앗은 것을 네 배나 갚겠다는 결심을 동반한 회개였다.

자신은 변하지 않은 채 예수님만 더하려고 했다가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떠났던 부자 관원과 달랐다.

죄가 가져다준 과거의 혜택을 버리고 새 주인에게 어울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의 방문이 삭개오의 변화를, 예수님의 환대가 삭개오의 환대를 낳았다. 

주님을 영접한 후 내 삶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주님이 나를 찾아주셨기에 내가 주의 자녀 된 것을 고백합니다. 

 

-----------

[ 예수님이 주연, 나는 조연 ]

 

[요한복음 1: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말씀(바디 랭귀지)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러 이 땅에 오신 독생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에는 경제에 관한 교훈도 있고, 경영이나 사교에 관한 지혜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듣고, 알고,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할 때에 본문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반드시 물어야 할 핵심 질문은 이것이 됩니다.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성경을 읽는 것이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正讀하여야 합니다. 情讀보다 중요한 것이 正讀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을 때, 또는 설교할 때, 많은 분들이 삭개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만큼 삭개오의 행동이나 사연이 극적입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임에 반해 키가 작다는 점이 그를 특이하고 시선이 끌리는 인물로 만듭니다. 

거기에 그가 취한 행동도 돌출적입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지붕 위에 올라가는 정도면 모르겠는데, 나이 든 어른이 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이 자나가시는 모습을 보려 했다는 것은 분명히 특별한 행동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삭개오에게 집중되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는 영적으로도 그에게 마음이 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즉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회개를 선언하였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취하였습니다.

모두가 이 삭개오의 회개에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이나 예수님의 마음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별로 하신 것이 없습니다. 

삭개오를 쳐다보고 내려오라고 하시며 삭개오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신 것, 

그리고 회개하는 삭개오를 칭찬하시며 구원을 선포하신 것밖에 없습니다. 

조연의 역할입니다. 삭개오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의 회개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입니다.

문학 작품이거나 사람의 이야기라면 이렇게 이해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다면 조금은 다른 초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고 계십니다. 

여리고에 머물지 않고 통과해서 지나가는 듯이 그렇게 걷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작은 키의 삭개오가

평소에 흠모(?)하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여기까지는 삭개오에게 더 관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다음 장면을 유의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삭개오는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멈춰 서십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드십니다. 

삭개오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습니다. 사람들도 다 쳐다봅니다. 

삭개오가 안절부절입니다. 창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삭개오는 너무 놀라버렸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오늘 생전 처음 눈을 마주친 그 예수라는 사람의 입에서

 “삭개오야!”라는 소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어안이 벙벙한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빨리 내려와라. 오늘 내가 네 집에서 머물러야 하겠다.”

‘아니, 저 분이 나를 어찌 알고 내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 

지나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내 집에 머무르겠다니. 처음부터 나를 찾아오셨다는 말인가...?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욕하는 나를...? 설마 그럴리가..? 아니야,

내 이름까지 알고 계신 걸 보니... 아, 정말 나를 찾아오신 것이구나! 그렇구나! 이럴 수가!’

이후의 삭개오의 반응이 어떠할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실 때,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의 모습이 더 놀랍고 흥미로왔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당사자 삭개오에게는 이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이 삭개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크지도 않은 예수님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천둥같이 들렸을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삭개오는 이 순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이 예수님을 기꺼이 영접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밝히십니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삭개오를 찾아왔노라고 당당히 밝히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는 다시 한번 감동하였을 것입니다.

삭개오 이야기의 주연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삭개오는 주연이신 예수님에게 이끌려 반응하는 역할의 조연이었습니다.

오늘 나의 인생도 그렇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이끌고 가시는 조연의 인생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악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 마음을 잔잔히 울리는 이 성령님의 음성을 우리가 너무 무시하고 살지 않는지요?

주연이신 예수님께 반응하는 조연이 되지 않고

내가 주연 노릇 하려 무례한 짓을 하고 있지 않은지요?

예수님께 따라가는 조연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께 이것저것 요구하고 지시하는 주연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요?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인생이 되고 싶어하고 있지 않은지요?

주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찔림을 주실 때,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삭개오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반응하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지혜의 창조주께서 

한낱 피조물인 나를 찾아오셔서 내 이름을 불러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요? 

이 사건에 감동하지 않고, 이 일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일까요?

주님, 양 하나 하나의 이름을 불러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매일 듣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 창피한 것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내어놓는 것도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옵소서.

아멘!

 

'2025년 영성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위  (1) 2025.04.07
열 므나의 비유  (1) 2025.04.05
시각장애자와 눈이 먼 자  (0) 2025.04.03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1) 2025.04.02
참된 믿음  (0) 2025.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