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0장 1-18절
예수께서 성전 장아하는 자들을 몰아내시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나와서 당신이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장사와 환전을 금지하느냐고 따져 묻는다.
그저자 의외의 반문을 던지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나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이라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알지 못한다는 궁색을 답변을 내놓자
예수께서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지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어서 누가는 악한 농부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한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에 오래 있다가
소출을 받으러 종들을 보내지만 때리고 능욕하고 상하게 하여 돌려본내다
드러자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면서 아들의 말은 듣겠지 하고 보내지만
되려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한다.
포도원 주인이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하자.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그들을 보시며 유명한 말씀을 건네신다.
"기록된 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통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짐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악한 농부들이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국한시키려 한다.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에게 적용하고 만다.
과연 그런가?
수없이 전해지고 들려지는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말씀이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자들도 매주 설교를 들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자신이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해야 한다.
자신은 악한 농부가 아니라고 확신하며 안일하고 태만히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기득권이 침해받고 위협 받자 대제사장들까지 직접 나선다.
대제사장이 직접 예수 앞에 나와서 따지는 것은 처음이다.
결국 돈, 수입, 기득권 앞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는 삶을 살았다는 반증이다.
농부들은 당연히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받치는 것이 당연한데
인간의 욕심은 화를 자초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오늘 본문이다.
그들의 결국은 심판일 뿐이라는 예수님의 경고에
사람들은 그렇게 되서는 않된다고 항변하지만
그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그들을 엄하게 벌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살아온 50년 넘은 세월
반 세기의 긴 시간이 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
내 안에 종교지도들과 악한 농부들의 모습은 없는지 묵상한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나의 그런 죄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나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잊지 않으리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 믿음 주님 만나는 날까지 굳게 지키며 살아가리라.
사순절 기간, 오늘도 내 안의 죄악들을 들춰보며 십자가에 못박는다.
------------ 매일 성경
[권위 논쟁]
비유 속 포도원 주인처럼, 하나님은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회개와 순종을 촉구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역사 내내 그 말씀을 없신여기고 거역했다.
아들까지 보내어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거절하며 심판을 자초한다.
인류의 역사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절과 반역의 역사였으며,
말씀에 대한 침묵의 역사였다.
하지만 그 거절 끝에는 심판이 있다.
심판은 죄의 결과만 아니라 회개를 거부하고 복음을 외면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거절한 자들을 진멸하시나,
그들에게 버림받은 아들은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모통이의 머릿돌이 되듯이,
예수님도 죽임을 당하겠지만 부활하여 영원한 반석이 되셔서
참 성전, 참 나라, 찬 이스라엘을 세우실 것이다.
이로써 그분을 믿는 성도를 부끄러움에 두지 않으실 것이다.
성도의 고난이 패배가 아니라 승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전 권력자들은, 허락도 없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고
백성을 가르치는 예수께 권위의 출처를 묻는다.
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한 세례 요한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는 침묵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권위가 침해당한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예수님의 신적 권세를부정하려는 마음만 가득할 뿐
진실에 대한 관심도, 진리를 따라 살려는 의지도 없다.
내 판단의 근거도 하나님의 말씀아 아니라 내 이해관계는 아닌가?
악한 농부들은 포도원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상속자인 아들마저 죽여 주인의 마지막 호의와 기대를 저버린다.
종교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를 기다렸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나사렛 예수는 제거해야 할 정적이었고,
내가 왕이 되기를 멈춰야 한다는 복음의 요구는 불쾌한 소리였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만큼 주님을 공경하는가?
당장 얻을 유익을 위해 영원한 유익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께서 왕권을 요구하실 때 기꺼이 내어드리고 경배하게 하소서.
--------- 김 진웅 목사
[ 죄의식이 분명해지고 죄를 인정하며 자백하는 자리, 성전 ]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곳,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도피처로 만든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자들은 다름 아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성전관리의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소 과격한 행동으로 그 상하신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고 그들의 상과 의자를 뒤집어엎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면서요.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에서 ‘소굴’의 헬라어(스펠라이온)적 의미는
우리말 번역에서 느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사로를 장사했던 굴 무덤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고(요 11:38),
히브리서 11:38절에서는 ‘동굴’로 번역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6:15절에는 단순히 ‘굴’로 번역되었고 그 의미는 ‘도피처’입니다.
강도의 소굴을 ‘강도의 도피처’로 바꾸어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무슨 뜻으로 이런 표현을 하셨는지가 금방 이해됩니다.
기도의 집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직접 확인해 주셨습니다.
처음 성막을 지을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겠다고,
그 만남을 위해 성막을 만드는 것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위한 선결 요건으로 대속의 번제를 명하셨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선결 요건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번제였습니다.
번제가 어떤 의미가 있길래
성전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번제단 앞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주겠다고(기도를 듣겠다고)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번제단 앞에서 만나서 말씀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속죄소 위에서 만나서 말씀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번제단과 속죄소가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번제단과 속죄소가 기도(=하나님 만남)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전 통로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애굽기 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하나님 만남(=기도)의 사전 통로인 번제단과 속죄소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 그것들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며 자백하는 자들,
그래서 예수님께 복속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고백한 자들이
비로소 하나님께 용납됩니다.
죄의식이 분명해지고 죄를 인정하며 자백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주십니다.
성전은 바로 이 죄의식을 분명하게 해줌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만나는 일(=진정한 기도)에 관심이 없는 자들이
거꾸로 오직 죄의식을 없애는 장소로만 성전을 오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청결 작업을 하신 것에 대해 분노하며
예수님을 대적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임을 자백하지 않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죄인이 용서를 얻고 평강과 생명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이 우리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을 향한 죄이면서 명백히 드러난 죄는 누구나 쉽게 죄로 인정합니다.
꽤 정직한 사람의 경우, 발각되지 않았더라도 사람에게 죄은 죄는
양심에 거리낌을 느끼며 죄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죄가 있으니, 자기 양심까지 속이는 죄입니다.
바로 하나님께만 범하는 죄입니다(시 51:4).
이 죄가 가장 근본적인 죄입니다.
사람에게 범하는 죄보다도 더 큰 죄이고 사람에게 범하는 죄의 근원이 되는 죄입니다.
이 근원적인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자들, 이 죄에 대한 자백과 애통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죄가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아니 알아듣지 않을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반발할 것이 뻔하니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주고, 오래 있다가 세를 받으려고 종을 보낸 포도원 주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인이 왜 오래 있다가 종을 보낸 것일까요?
세가 필요해서 보낸 것이 아닙니다. ‘때가 이르매’ 보내셨습니다.
청지기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를 준 것은 장차 그것을 그들의 소유로 상속시켜주기 위한 훈련 과정입니다.
훈련의 시간이 지나고, 최종 테스트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주인의 것을 주인의 것으로 인정하는지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지를 테스트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 테스트에 합격해야 영원의 시간 속에서
주인의 것을 상속받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농부들은 너무 오랜 시간 자기 것처럼 사용하다 보니,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최종 테스트에 합격하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주인은 결산을 연기하고 연기하며 기다립니다.
선지자를 보내시고 또 보내시다가 결국 마지막에 아들까지 보내셨습니다.
아들이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은 없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이 베푸는 이 마지막 용서와 사랑에 더 격렬하게 반발합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포도원이 주인의 것임을 정말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면서도 자기 양심을 속입니다.
오랫동안 자기 것처럼 사용했던 권리(?)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주위의 대부분이 동조하니까 용기를 얻어 대담하게 행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인정하지 않고 결국에는 죽입니다.
아들을 인정하는 것은 곧 주인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인정하면, 자기들의 모든 소유가 주인의 것임을 인정해야 하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면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하니까,
기를 쓰고 하나님의 아들을 반대합니다.
‘나의 모든 소유는 주인이 주신 것이 아니고, 저절로 생긴 것’이라는 억지를 부립니다.
무생물에서 저절로 생명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할 수는 없으니 저절로 생겼다고 우깁니다.
심판은 면하고 싶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지옥은 피하고 싶지만
결코 주인의 아들을 영접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에게 주인은 다시 살려낸 아들을, 명백한 반역의 산 증거인 아들을
심판주로 보내실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나를 속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환경과 잘못된 지식들이 나를 착각하게 만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내가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내게 소유권이 있는 것처럼,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행동하게 만듭니다.
이 모든 생각과 행위를 말씀 앞에서,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부수어야 합니다.
명백한 죄의 증거인 십자가 앞에서 내가 지독한 죄인임을 자백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죄입니다.
우리는 주인의 소유권을 착복하기 위해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이 죄 때문에, 이 죄에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순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인정하게 해 주는 번제단이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앞에서 내가 예수님을 죽인 죄인임을 인정하고 무릎 꿇어야 합니다.
십자가 밑에 엎드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죄가 죽을 죄임을 인정하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주인으로 확실히 영접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의미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거부한 근본죄를 깨닫고 자백한 자들,
그래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영접한 자들이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랜 시간이 나를 속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무리들과 환경, 잘못된 지식들이 나를 착각하게 만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내가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내게 소유권이 있는 것처럼,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모든 생각을 부수어 주옵소서.
명백한 죄의 증거인 십자가 앞에서 죄인임을 자백합니다.
말씀으로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세밀한 죄까지 들춰내어 주옵소서.
산산조각내시고, 완전히 가루가 되어 조금도 남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생명의 말씀으로 다시 채워 새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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