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20장 41절 -21장 4절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한다.
물론 성경적이다. 다윗의 뿌리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오신다고 하였으니까.
그런데 다윗은 시편에서 말하기를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가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라고 하였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신다.
이후에 아무런 내용이 없다.
무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어떻게 이해했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라서 당황했을까?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걸까?
단지 다윗의 후손 중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로만 믿고 있었을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가 삼위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신 성자 하나님
신인 양성의 성부 하나님의 유일한 기름부음 받은 존재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얼마나 이해하였을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진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인지 늘 점검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좋은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구원자, 해방자, 다윗 같은 왕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것이 우상숭배이다.
따라서 이런 잘못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날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누가는 서기관의 외식과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붙혀서 기록하고 있다.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나는 드러내놓고 행동으로 외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외식, 우월감, 차별의식, 다름, 구별함 등이 없다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지적인 우월감, 독서량의 자랑, 20여 년의 의료 단기 선교, 직업적, 사회적 신분,
50년 넘은 신앙생활의 경륜과 경험, 12년 넘는 시무 장로의 경험 등등으로 인한 특권의식 ....
나는 서기관과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내용의 차이뿐 내 안에도 외식은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더 악한 위선이 않을까? 가면을 쓰고 있으니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뿐이다.
과부의 헌금을 통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고 받으시는 것은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진정성, 상한 마음, 최고.최선을 드리는 마음, 아니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마음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물질보다는 진실된 마음이다.
우리 속사람을 아시는 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솔직히 내 마음은 얼마나 타락하고 죄악 투성인지 모른다.
그래서 늘 두렵다. 언제 떳떳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
진실된 마음도 좋지만 상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도 받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성령이여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정직한 영을 허락해 주소서.
늘 주님 앞에 겸비하고 정직하며 진실함으로 살게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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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과 과부]
시편(110:1)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주도 되심을 환기시키며,
성전을 중심으로 고착된 그리스도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바로잡으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그렇게만 알면
그분을 혈통적인 이스라엘만을 위헤 오신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면서도 고난받는 예수님은 거부한 베드로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와 불신앙이다.
그릇된 욕망이바탕이 된 그릇된 이해는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곡해할 수 있다.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가 아니라 내가 원하고 내게 필요한 예수를 만들어 신봉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우상숭배이다.
주목받기 원하던 서기관이나 거액을 투척하는 부자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두 렙돈을 드리는 여인을 주목하신다.
바리새인의 자랑이 아니라 세리의 상한 심령을 받으셨던 것처럼,
서기관의 위선적인 기도는 거절하셨지만 과부의 진심 어린 헌물을 받으시고,
부자가 낸 많은 돈보다 과부가 낸 두 렙돈을 더 많은 헌물로 인정해주신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액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아니라 무엇을 드려도 충분하지 않다는 마음을 받으신다.
돈이 위세를 떨치며 세상을 황폐하게 만드는 시대에,
돈의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있는가?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당대의 종교권력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별한 옷을 입어 존재감을 과시했고,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아 지위를 뽐냈으며,
잔치집에서는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만 찾아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돌봄의 대상인 과부를 착취의 대상으로 삼을 만큼 비정했으며,
긴 기도로 경건을 자랑할 만큼 위선적이었다.
(당시 과부들은 자신의 재산을 서기관들에게 맡겨 관리해야 했는데,
서기관들은 많은 과부들의 재산을 더 많이 관리하기 위해 길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경건을 선정했다.)
그럴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였더라도 하나님의 엄중한 판결만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신앙과 경건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임을 기억하며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경건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
자신을 드러내는 종교인이 아니라 자신을 던지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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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관계의 근본이요 기초이신 주 예수님 ]
회개(=회심) 없이 복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주인을 바꾸는 것은 소유에 대한 회심을 의미합니다.
소유에 대한 회심 없이 예수 믿는 것은 가짜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냥 교회만 출석하면 예수님 믿게 된 것인 줄로 착각합니다.
절에 다니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거지요.
절에 열심히 공양하러 다니면 불교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예수님 믿는 것은 그런 것과 전혀 다릅니다.
회심 없이 예수님 믿을 수 없고,
회심의 핵심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 되는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사는 삶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유일한 아버지로 모신 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합니다(35절).
이들이 부활의 생명을 다시 살아갈 때,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는
예수님의 주인 되심이 근본이 되고 기초가 되어 새롭게 정립됩니다.
20장 27-40절 말씀은
특별히 하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유일한 아버지로,
예수님을 유일한 남편(주인)으로 모신 자들이 부활의 삶을 살 때
부부관계가 어떻게 새롭게 정립되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 주신 부부관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관계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미리 맛보고 연습하기 위해 주어진 관계입니다.
‘아,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면 부활한 삶에서 큰 낙이 하나 사라지는 거 아닌가?
일도 없이 영원히 산다는데 너무 심심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부활한 생명체로 산다는 것은 지금 우리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삶이 될 거라고 하십니다.
20:36절에 ‘천사와 동등하다’고 번역된 단어의 문자적인 번역은 ‘천사 같다’입니다.
부활한 인간은 천사와 동등하지 않습니다. 천사보다 우월한 존재입니다.
36절의 표현은 부활한 인간의 육체적인 능력이나 생활방식이 천사와 비슷하다는 의미입니다.
육체적인 모습과 활동 방식이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 권세와 지위는 천사보다 높습니다.
그다음 말씀이 이를 확인해 줍니다.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그래서 다시 죽을 수 없는 영생체가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확인해 주십니다.
천사가 영생하는지 아닌지는 우리는 잘 모릅니다. 영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영생하는 존재가 됩니다.
왜냐하면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광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인간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이 영광을 천사들도 부러워한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10-12]
10.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영광 받으신 것이 예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부러워하며 그 영광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고 싶어한다고 하십니다.
부활의 영광을 얻은 자들은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영광과 권세를 가진 자들이 심심해한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인간이 심심해하는 것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까? 능력과 자원의 제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부러워하는 능력과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가진 부활체들에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능력과 자원이 제한 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심심해지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부활한 인간들에게 창조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가 우리의 놀이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시집장가 가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가 무궁무진하다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우주 놀이터에서 기발한 놀이를 무진장 즐길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즉 시집장가 가지 않아도 그보다 더 즐거운 삶이 펼쳐지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죽지 않는 생명을 가졌으니 새로운 생명을 낳아 기르기 위해 시집장가 갈 필요는 더욱 없다는 말씀입니다.
(20:41-44)
이 땅에서의 가족관계, 혈연관계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가족관계로 재편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윗과 예수님의 관계입니다.
혈연적으로는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가족관계에서는 예수님이 다윗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형제 중에 유일한 맏형이십니다(히2:11-12).
주도 되고 맏형도 된다니까 뭐 그런 가족관계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이 땅에서의 혈연으로 인한 가족관계와 다르기에
이 땅의 가족관계와 똑같이 대응되지 않습니다.
‘맏형’이라는 표현은 단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땅의 가족관계가 먼저이고, 천국의 가족관계가 이후에 새롭게 추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윗의 예에서 보듯이,
천국의 가족관계는 이 땅의 가족관계에 선행된 것이고 더 본질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인간의 육신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의 관계를 정하셨습니.
[엡 1:3-5]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거룩하고 흠이 없는 신부가 되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자녀)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족관계나 신분 관계는
천국의 관계를 훈련하기 위해 주어진 모의(模擬) 관계입니다.
천국 관계의 기초는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땅에서의 남편 아내 관계는 본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모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면, 땅에서의 모의 부부관계는 당연히 진짜 부부관계로 대체됩니다.
20:27-40절에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엡 5:31-32절의 말씀도 그런 뜻입니다.
[엡 5:31-32] 31.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래서 교회가 무엇이냐를 가르친 말씀인 에베소서에서
이 땅의 가족관계(부부, 부자 관계), 신분 관계(주종 관계)를 통해
천국 백성이 되는 훈련을 하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성도에게 천국의 가족관계를 훈련시키는 훈련본부입니다.
(20:45-21:4)
이 본부에서는 이 땅에서의 신분, 재산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형제입니다.
유일한 맏형 예수님 외에는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위냐를 따질 수 없는 같은 항렬입니다.
이를 모르고 땅에서의 신분을 내세우며 교회(회당)에서 거들먹거리던 자들이 경고를 받았습니다.
교회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한 과부를 예수님께서 드러내어 칭찬하시고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의 관계와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붙드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칭찬하시기도 하고, 근심하며 꾸중하시기도 합니다.
과부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왜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칭찬하시기만 하고 그의 가난과 고통을 면하게 해 주시지는 않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해 봅니다. 주님의 관심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언젠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과부가 만약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땅에서는 좀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하늘 소망은 오히려 약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님께 그런 결과는 너무나 수지가 맞지 않아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의 관심의 초점은 영원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졌던 그 가족관계를 복원하여,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완성해 내시는 데에 있습니다.
많이 받은 자가 충성할까요, 적게 받은 자가 충성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적게 받은 자입니다.
왜냐하면 충성은 곧 믿음이고. 믿음은 자기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음을 고백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함을 많이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하신 말씀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충성은 내 것을 떼어 놓지 않고 전부를 드리는 마음입니다.
적게 받은 자는 전부를 드리는 믿음을 때때로 발휘하는데, 많이 받은 자들은 거의 믿음에 실패합니다.
많이 받아서 드리는 감사에 충성스러운 마음이 깃들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많이 받은 자는 오히려 그 마음에 욕심이 깃들기 쉽습니다.
적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은 확실히 충성된 마음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이 맡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의 믿음(충성)이 완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게 주신 상태로 믿음 훈련을 시키십니다.
과부가 계속해서 충성된 믿음을 유지하기에 안전한 자리는 지금의 가난한 자리입니다.
나의 자리는 안전한 자리인가요...?
우리 모든 관계의 근원이신 주 예수님,
삶의 출발점이 주님께 있음을 일깨워 주심 감사합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 땅의 가족관계보다 더 진하고 깊은 사랑의 관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옵소서.
우리가 혈연의 형제, 친척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보다
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 사랑하며 섬기게 되기를 원합니다.
가난한 자리에서 기꺼이 전부를 드리는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옵소서.
내 소유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내 주인 되어주심에만 소망을 두는 믿음 주시옵소서.
주의 기뻐하시는 뜻이오니 이루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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