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스더 9장 1-19절
아달월 곧 열둘째 달 십삼일 왕의 어명이 실행된다.
하만의 조서와 모르드개의 조서가 시행된다.
모든 민족이 그들을 두려워하고 하만이 처형되고 모르드개가 2인자가 되자
백성들도 돌아서는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한다.
칼로 그 모든 대적들을 처서 도륙하고 진멸하고 자기르 미워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행하게 한다.
그러나 대적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왕궁이 있는 수도 수산성도 에외는 아니다.
오백 명을 죽이고, 바산다다와 달본과 아스바다와 보라다와 아달리야와 이라다다와 바마스다와
아리새와 아리대와 왜사다와 함므다다의 손자요 하만의 열 아들도 죽였다.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높은 관직에 있었던 인물일 것으로 보인다.
왕은 에스더에게 수산성의 처형자들과 다른 지방에서의 상황을 언급하며 만족하느냐 묻는다.
그러나 에스더는 후한을 없애기 위해 수산성에서 하루 더 조서를 집행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하만의 열 아들을 나무에 매달도록 허락해 주기를 구한다.
다음 날도 삼백 명이 추가로 도륙되었다. 지방은 칠만 오천 명이 도륙되었다.
국가적인 슬픈 날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잔치를 베풀어 들기는 명절이 되었다.
아달월 십사일을 부림절로 정하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나누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
풍전등화, 삼척간두에 서 있던 민족에게 역전, 반전, 180도 다른 상황이 펼펴졌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결코 이 날을 잊지못할 것이다.
에스더 기자는 의도적이었을까?
전혀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전면에 들어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셨을까? 결론적으로는 하나미의 계획 아래, 하나님의 때에 일하셨다고 믿는다.
이런 에스더서가 우리 앞에 있어서 감사하다.
우리 인생길도 이렇지 아니한가?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문제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염려하고 근심하며 절망하다가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우연 처럼 문제가 잘 풀리고 해결된 것을 경험하고 살고 있다.
에스더 기자는 대적의 재물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말을 세 번이나 언급한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동, 하나님의 대리자인 우리가 취할 자세가 이렇다.
대적만 진멸하기를 원했지, 재물 때문에, 욕심 때문에 에스더가 왕에게 간청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단지 자기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고, 그래서 대적을 처벌하는 것만을 원했다는 뜻이다.
나는 어떻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더불어 뭔가를 기대하고 구하는 욕심이 있지 않는가?
종에게 기대하는 것은 주어진 일에 충성하는 것뿐이다. 종이 상급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다시 한 번 묵상한다.
인간의 조급함과 성급함이, 인내가 부족하여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도 새벽 기도를 하면서 나의 생각, 감정, 계획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다. 십자가에 못을 박는다.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다. 십자가를 붙들기 위해 내 손에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다.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기 위해, 주님만을 붙들기 위해, 하나님만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기 위해 다 내려놓는다.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것들 때문에 힘들고 괴로워한다.
성령이여 도와 주소서. 다 비우게 하시고 내려놓게 도와 주소서.
오직 성령님만이 충만히 내주하여 주소서.
그래서 하나님을 ,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고 신뢰하며 믿고 소망하며 살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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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와 축제와 인식]
하만의 조서와 모르드개의 조서가 동시에 이행되는 날이 밝았다.
죽은 하만의 편에 서서 유다인을 공격하려는 이들이 있지만, 페르시아에 사는 대부분의 민족들은 유다인의 편에 선다.
유다인들에게 임한 극적 반전을 목격했기 대문이다.
유다인들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감지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사라잡힌 것이다.
에스더서의 하나님은 철저히 숨어 계시자만,결코 숨길 수 없는 능력을 드려내신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 삶의 배후에 임재해 계신다.
하만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열 아들들이 죽임당하고, 하만을 따르던 수산궁의 500명도 조서에 기록된 대로 멸절된다.
아들들의 이름이 낱낱이 열거된 것은 이것이 단순한 감정적인 복수가 아니라,
아말렉의 진멸을 예고한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한 듯하다(민 24:20).
에스더가 하루를 더 얻어 유다인의 대적들을 더 제거하고 열 아들들의 시체를 높이 달게 한 것은,
유다인들을 해하는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보여줌으로써
잠재적인 위험까지 근절하고 아말렉에 대한 철저한 진멸을 성취하려는 뜻일 것이다.
사탄과의 영적 싸움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고, 얼마나 약속에 의지하여 순종해야 하는 싸움인지 보여준다.
조서대로 하면 재산을 탈취할 수 있지만, 유다인들은 자발적으로 재산에 손을 대지 않는다.
이 싸움이 사무엘상 15장의 사움의 연장선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울은 전쟁에서 이기고도 전리품을 취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버림받앗지만,
유다인들은 전리품을 취하지 않음으로 이 전쟁이 철저히 하나님의 전쟁이 되게 했다.
유다인들은 수산성뿐 아니라 제국의 각 도에서 대적자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는데,
무려 7만 5천명을 쳤다. 사망의 날이 될 뻔했던 그날이 생명과 축제와 안식의 날이 되었다.
우리의 절망과 탄식도 생기 있는 찬양과 간증으로 뒤바꾸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한다.
선하 ㄴ싸움에서 주만 의지하여 승리의 기쁨과 안식을 누리는 날을 맞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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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멸의 전쟁 ]
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성도가 승리하여야 하는 전쟁은, 진멸의 전쟁입니다. 진멸의 전쟁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진멸하지 않으면, 오히려 진멸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진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멸의 대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개인적인 원수를 갚으면서 성도의 전쟁으로 미화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진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진멸하는 것입니다.
그 원수가 우는 사자와 같이 끊임없이 우리를 삼키려 들기에 진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만의 아들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고, 칠만 오천 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를 도륙하였으며,
도성 수산에서는 하루를 연장하면서까지 진멸의 전쟁을 수행한 것에 대해서 과잉 대응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는 바로 다음 날에 잔치를 베풀며 즐거워했다는 기록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해입니다. 에스더서의 문맥, 나아가서는 성경 전체의 문맥과 상황을 잘 살펴야 이런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절에 '바랐더니'는 단순히 희망 사항이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계획적으로 뭔가를 도모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만 바란 것이 아니라 상황과 가능성을 조사하며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해당 동사 ‘사바르’에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죽이기를 바라며 도모했습니까?
유다인이 아말렉 족속에 대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아말렉 족속이 유다인에 대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까닭 없이 유다인을 미워하였습니다. 1절, 5절, 16절이 거듭해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달 월 13일은 뿌리 깊은 증오, 이유 없는 증오로 유다인을 미워하기를 그치지 않는 자들을 진멸하는 전쟁의 날이었습니다.
대적이 더 이상 대적하기를 포기하고 그 증오를 멈추었더라면, 진심으로 화해를 청하였더라면, 진멸의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만이 처형당하는 결과를 보고도 하만의 잔당들은 유다인을 죽이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뿌리 깊은 적대감과 숫자상의 우위로 인해 그들은 오판을 하게 되었고,
아달 월 13일에 사실상 승산이 없는 전쟁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망하거나 항복하지 않았고 유다인과 싸우기 위해 각 읍에 남아 있었습니다.
유다인이 그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한 곳에 모여 뭉쳐야 했습니다(2절).
죽은 자들만 칠만 오천 명이 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세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 세력이 있었기에 그들은 하만의 죽음 이후에도, 모르드개의 권세가 강대해진 것을 보고도,
유다인을 죽이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하만의 10 아들이 있었습니다.
8:11절에서 에스더의 청원에 의하여 새롭게 쓰여진 조서에 보면,
유다인이 아말렉 족속을 임의로 죽일 수 있는 권리는 없었습니다.
조서는 공격에 대한 자위권 발동을 허락할 뿐이었습니다.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도륙하고 진멸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조서였습니다. 그 재산까지 탈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대적들의 재산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세 번이나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0절, 15절, 16절).
유다인들의 관심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따위를 낼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서로 얼싸안고 기뻐한 것은, 이제 살게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습니다.
왕후 에스더의 등장, 하만의 갑작스런 몰락, 모르드개의 위상 강화 등의 일련의 사태들이 없었더라면
유다인들은 대적들의 강대한 세력을 결코 이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진멸 당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향후의 위협 요소까지 제거하게 된 유다인들이
잔치를 벌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잔치는 그동안 그들이 얼마나 두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었는지를 나타내주는 잔치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즐거워하는 잔치가 아니라...
더욱이 이 사건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은
이 싸움이 가나안 전쟁과 같이 죄악을 진멸하는 전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통합적으로 가르쳐주는 대적의 실체는 마귀이며, 더 근원적으로는 '죄'입니다.
성도를 위협하고 성도를 증오하는 대적의 세력은, 진멸하기 전에는 꺾이지 않습니다.
이길 승산이 없음에도 끝까지 해보자고 덤빕니다.
십자가를 통해 결정적으로 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그날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니 적당히 끝낼 수 없습니다. 진멸해야 합니다.
진멸한 후에는, 너무나 기뻐서 만세를 부를 수밖에 없을 만큼 이 전쟁은 치열한 전쟁입니다.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하는, 남은 잔당을 샅샅이 추적하여 제하여야 하는, 그런 진멸의 전쟁입니다.
[고전 15:24-26]
24.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주 예수님, 주 성령님, 죄의 삯인 사망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때까지
죄와 피 흘리며 싸우는 진멸의 전쟁을 계속하도록 독려하시고 지도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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