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스더 4:1-17
하만의 유대인 멸절 조서가 페르시아 전역에 배포된다.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두집이 쓰고 성중에서 대성통곡하며
대궐 문 앞까지 나아간다.
전국의 유대인들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긁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였다.
그런데 구중궁궐에 있는 에스더만 그 소식을 모른다. 아이러니하다.
조서가 작성된 궁주에 있건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이런 것인가?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모르드개의 상황을 전해온다.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에스더는 내시 하닥을 보내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게 한다.
조서와 문제의 자초지종을 들려주고 유대 민족을 위해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 간절히 도움을 구하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에스더는 지금 자신이 왕에게 나아갈 수 없는 처지를 알려온다.
모르드개의 말이 엄위하다. 전국의 유대인들이 다 멸절하게 되었는데 너만 살고자 하느냐!
내가 지금 왕후에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회답에 죽음을 결심한다.
수산 성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3일 금식에 동참을 부탁한다.
자신도 3일 금식 후에 왕에게 나아가겠다고, 설령 법을 어겼음으로 죽겠된다면 죽겠다고 ...
수산 성에 모든 유대인들이 금식하며 민족의 생사가 달린 문제 앞에서 간절한 기도한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
믿음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는다.
에스더의 성장 과정에서 모르드개의 신앙교육이 있었을 것이다.
민족의 정체성,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자신의 현 상황 인식,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자세 .....
이후 기독교인들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고 믿음을 지켰다.
오늘 나는 적색 순교는 아니지만 백색 순교의 자리에서 에스더의 고백을 할 수 있는가?
난 지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사랑하는 교회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나만 편하게 살겠다고 은퇴하려고 하는가?
사랑하는 교회는 어찌되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수도 없이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다.
성령님이여 나를 선하게 인도하여 주소서.
나아감과 멈춤을 가르쳐 주소서. 내가 성령님보다 앞서지 않게 하소서.
내 안에 평안을 허락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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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과 울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유다인 진멸 계획 앞에서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은 무력하다.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통곡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기도조차 할 수 없어 내뱉는 한숨 소리까지 기도의 언어로 받으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백성의 울음에 답하실 것이다.
왕궁 밖의 유다 백성이 애곡하는 동안 유다 민족 중 단 한 사람, 왕궁 안의 에스더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다.
그 와중에 모르드개가 베옷 때문에 왕국에 들어갈 수없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더가 왕궁 출입을 위한 의복을 보내지만 모르드개는 이를 거절한다.
그제야 비로소 에스더는 성 밖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하게 된다.
의도치 않은 작은 일에서 촉발된 사소한 알아차림이지만 ,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자 에스더의 역할이 시작된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딸처럼 사랑했기에 안위를 위해 유다 민족임을 숨길 것을 당부했지만,
그녀 민족적 위기를 외면하도록 두는 것은 사랑일 수 없었다.
사랑하기 대문에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가 유다인임을 밝히고 동족의 어려움을 호소할 것을 촉구한다.
이방 나라에서의 특권을 버리고 바로 앞에 섰던 모세처럼 사명자로 나서줄 것을 요구한다.
무조건적 보호는 사랑이 아니다. 주님의 뜻에 헌신하도록 돕는 것이 더 큰 사랑이다.
왕의 부름 없이 왕에게 나아가려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으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에스더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유다 백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
그런 방식 중 하나가 '이때를 위해 왕후의 자리를 얻은' 에스더를 통해서라면,
그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 에스더가 살길이고 민족 전체가 구원 바을 길이다.
우리도 소명을 다해야 생명을 얻을 것이다. 내게 맡기신 자리에서 희생적인 결단이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
이때를 위해 저를 보내신 줄 알고 희생적인 삶으로 남을 살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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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믿음 ]
찬송가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유다인의 멸족 위기 앞에서 애통하며 회개와 기도를 드리던 모르드개는,
통곡하는 가운데 점점 대궐문 앞까지 나아가기에 이릅니다.
에스더를 만나서 그녀를 통해 해결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모르드개는 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기다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인간적인 수단을 너무 쉽게 동원하고 인위적으로 뭔가를 해 보겠다고 서두르는 것은 아닌가요?
하나님의 역사하심보다, 에스더의 지위에 더 의존하는 모습 아닌가요?
아닙니다. 모르드개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에스더가 왕비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사용하실 계획을 진행하고 계심을 감지하였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자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즉각 알아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다음 말은, 그가 단순히 에스더에게 의지하여 위기를 벗어나려 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에스더가 나서지 않아도 유다인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이 일에 에스더가 나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에스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기를 기다리는 것을 장려하시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노력을 기대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꼭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계획을 틀림없이 성취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교회를 반드시 세워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여를 통해, 나의 순종을 통해 교회 세우기를 기뻐하십니다.
`굳이 나의 참여가 없어도 하나님의 교회는 든든히 서 갈 거야` 이런 생각은 얼핏보면 훌륭한 믿음의 생각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앙과 게으름을 포장하는 핑계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에스더 4:14상]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물론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죄인의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른 내 욕심이 발동하여, 엉뚱한 열심을 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열심은 대부분의 경우, 내가 하기 싫은 일에 대한 열심이 됩니다.
하고 싶은 일은 오히려 가만히 기다리고, 하기 싫은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믿음의 일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 훈련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서,
우리를 장려하는 말씀은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약 1/4),
우리를 경계하고 금지하는 말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3/4).
그만큼 우리의 믿음 훈련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노력은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죽을 힘을 다해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믿음을 키우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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