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6장 1-9절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공사역을 하시면서 여러가지 기적을 베푸셨다.
오늘 요한은 예수님이 베푸셨던 기적들 중에서 7가지를 선별하여 기록한다.
기적으로만이 아니라 표적으로 삼기 위해서다.
무슨 표적인가?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표시, 무엇을 위한 signs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구원자요 성부 하나님의 유일한 기름부음 받으신 그리스도,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요 신인양성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받을 이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요한은 숫자를 좋아했다. 그래서 완전수 7을 통해, 7가지 표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7가지만으로도 예수가 누구는지를 증거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햇을 것이다.
요한이 20장 31절에서 언급하듯이 예수 그리스도 생명(영생)임을 말이다.
오늘 본문은 The book of signs 의 4번째 표적, 오병이어를 기록하고 있다.
4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이다.
많은 무리가 들판에 앉아 있다.
말씀에 굶주린 영적 허기와 육신의 배고픔에 힘들어 하는 인생들이 앉아 있다.
장정만 5천명,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2~3만명이라고들 한다.
주님은 이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시고 영의 양식에 이어 육의 양식을 먹이시려고 한다.
오늘 두 제자를 주목해서 봐야 한다.
빌립과 안드레다.
이 많은 무리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데 두 제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말이다.
성경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출 애굽 백성들이 먹었던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가 생각난다.
아합을 피해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는 이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공급하셨던 고기와 떡이 떠오른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결하시려고 하는 것일까?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먼저 빌립에게 물으신다. 어떻게 이 양식을 구할 수 있겠느냐?
이성적이고 계산이 빠르고 현실적인 빌립은 대략작인 인원들을 둘러보고
적어도 200데나리온이 있어야 음식을 구할 수 있다고 답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친구 나다네엘을 주님으로 인도하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냉소에
"와 보라"고 전하던 빌립이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할 때에 그들을 안드레에게 인도하였다.
그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을 보았다.
회당장 딸이 살아가는 것도 경험했다.
그리고 베데스다에 있은 38년 병자가 고침받는 현장에 있었다.
그가 따르고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으면서도
지금 자기 앞에 놓인 문제 앞에서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며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다.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이 자기 옆에 계시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
그러자 적극적이고 행동파인 안드레가 끼여든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보고는 바로 베드로에게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하던 자다.
빌립에게서 소개받은 헬라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던 자다.
예수님과 빌립 대화에 끼여 들어서 소년이 가졌던 물고기와 떡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이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실 수 있는지 묻는다. 그렇지만 온전한 믿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안드레의 말 중에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빌립과 안드레가 보인 반응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려움 앞에서 보이는 대표적인 반응들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이성으로 제한하고 우리의 생각 안에 가두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말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이시다라는 생각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믿음이 무엇인가?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밑바땅 아닌가?
이 믿음과 신뢰가 깨어져 버린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내 생각과 내 이성적 판단과 내 감정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온전히 새로움을 입게 된다. 온전히 거듭날 수 있다.
거듭나야 하나님이 하나님되시고 예수가 구원자가 되고 그리스도되시며 생명의 주가 되심을 믿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하여 힘들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하에 있다.
안드레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다.
행동파, 좌충우돌하지만 자신의 기대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실망하는 모습 말이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나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 같다.
내 시선을 주님께 향하게 하신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묵상하게 하신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던 것처럼
울산신정교회도 회복케하시고 건강하고 성숙한 공동체가 되게 하실 것이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되신 주님을 의지하고 믿고 신뢰하며 잠잠히 아뢸 뿐이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는다.
내가 짊어진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다.
이 또한 내 안에 이루시는 오병이어의 지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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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남은 것들을 다 챙기게 하신다.
무리들은 이 기적을 보고 자신들을 로마의 식민지에서 구원할 정치적 구원자와 해방자로 생각한다.
구약에서 언급한 '그 선지자;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 저들의 생각을 아시고 무리를 떠나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요, 무리들의 충동에 휩쓸리지 않으시려는 모습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4번째 표적을 기록한 의도와 목적이 따로 있다.
기적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적을 베푸시는 분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그가 누구신가? 생명의 양식, 생명의 떡을 주시는 분이시다고 말이다.
우리의 생명수가 되시고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라고 권면하고 있다.
표적이 의미하는 것이 이런 것 아닌가?
sign이다. 예수가 '생명의 떡'이심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음식이듯이,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이 영생할 수 있는 것도 생명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되시고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생명의 떡이 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생명의 떡보다는 세상의 떡을 더 좋아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진실로 생명의 떡을 향한 간절한 구함과 갈급함이 얼마나 있는가?
생명의 떡 없이도 육신의 떡만으로도 만족하고 살아가는 인생들 아니던가?
날마다 이 생명의 떡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그가 생명의 떡을 주실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값없이 주시는 주님, 먹고 남도록 넘치게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전능한 종 지니가 아니라 전능하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바라보자.
내가 주인이 아니라 종임을 잊지 말자.
무엇을 시키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것을 따라 행하는 종이다. 그 일에 충성할 따름이다.
그럴 때 주되신 주님이 남은 것은 다 책임지실 것이다.
좋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최선의 것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은혜 베푸실 것을 믿는다.
이틀 동안 새벽을 깨우는 말씀을 전해 주신 신치현목사와 시티교회를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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