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빌립보서 2장 5-1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바울은 권면한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든본 하난미의 본체시나 하난미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자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잇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랭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그러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미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게 기뻐하라.
수없이 들었던 구절이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수십년을 들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본받아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 있는가?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심에서 보여주신 성자 하나님의 겸손과 낮아지심의 모습이 나에게는 있는가/
하나님까지 높아지려던 아담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있지 않는가?
빌립보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전제로 자신을 드려지는 것도 기쁘다고 하는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나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왔던가?
큰 바위 얼굴을 생각하면서 걸어온 60평생의 믿음의 길 위에 난 얼마나 예수를 닮았을까?
참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이 길을 포기할 수 없다.
이 길이 진리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구원이 그렇게 쉬운 길이던가?
은혜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지 않는가? 세상의 어떻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값비싼 것이다.
성령이여 도와 주소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이 가신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그 길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
죽음을 선택해야만 한다 할지라도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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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 했던 아담과 달리,
예수님은 동등한 권리를 내려놓으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이 되셨다.
또 인류의 구원을 위하 십자가의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
주님처럼 나를 비우지 못하니 매 안에 타인이 들어설 공간이 없고,
시기와 교만, 갈등과 반목이 가득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더 비울 것도, 더 버릴 것도, 더 낮아질 곳도 없을 만큼 철저하게 순종하신 아들 예수임을
더 올라갈 곳이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이르게 하셨다.
모든 이의 '주'가 되게 하셨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나라'가 서게 하셨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타인을 존대하는 사람을
칭찬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
순종과 섬김의 내리막길은 큰 자가 되는 오르막길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셨지만 우리도 두려움과 떨림으로 함께 이루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자기 부정과 복종과 사랑의 삶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공동체가 온전할 수 없고, 구성원의 구원도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두신 선한 소원에 화답하여 하나 됨과 거룩함을 이루어가고 있는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야 할 것은 '너의' 구원만 아니라 '너희' 구원이다.
공동체가 함게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것은 지체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고,
어둡고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사는 것이다.
원망과 시비로 인해 분열된 공동체는 이룰 수 없는 구원이다.
빌립보 교회가 이 세대처럼 어그러진다면 바울의 달음질은 헛수고가 되지만,
흠 없는 자녀가 된다면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한 수고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고백한다.
나의 수고와 헌신으로 더욱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원망과 시비 없이 함께 그리스도를 본받아 구원을 이루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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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6(월)
빌립보서 2:5-18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찬송가 316장 주여 나의 생명
(5-11)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신 구원의 소식입니다.
이 복음을 위해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여 이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복음이 이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복음을 믿는 자들은 복음을 모든 것보다 우선순위에 둡니다.
자신의 자존심보다 복음을 더 귀하게 여기고, 복음을 위해 핍박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의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산 삶이 그러했습니다.
자신을 종으로 낮추며 사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세상 권력에 의해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임을,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몸소 십자가 지심으로 증언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사도는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행위를 본 받으라고 하지 않고 그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를 주장하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너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는데 하는 생각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6절).
복음을 누리기 위해 자존심 완전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이요 영생의 길임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벌레 같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면서 자기 부인의 믿음이
복음에 합당한 마음임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12-18)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또한 스스로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온전히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이는 사도의 기쁨이 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완성하라고) 권면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사도가 두 가지 구원의 증거에 의거하여
구원을 확신할 정도로 복음에 대한 믿음이 분명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왜 사도는 그들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는 것일까요?
구원이 무엇인지를 많은 분들이 오해합니다.
그래서 이 권면에 대해 이상하게 여깁니다.
구원에 대한 오해는 복음에 대한 오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복음을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받게 되는 죄 사함의 기쁜 소식'으로 오해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제물로 보내어 죄를 사하셨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로 복음을 축소시킵니다.
복음은 죄인이 단지 죄를 ‘용서받게’ 되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믿고 그분을 주인으로 받아들일 때,
죄를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길 수 있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죄 문제에 대한 근본 해결책이 복음입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도무지 없어서,
그냥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받게 함으로써
죄 사함을 선언해 버리는 무능한 분이 아니십니다.
여전히 인간은 죄를 짓고 있으나 단지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 없는 자가 되었다는 이상한 소식은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주 하나님께서 예수님 믿는 자들의 죄를 도말하시고 기억하지도 아니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자들은 죄를 이기는 구원을 이룰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영접한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그들을 죄짓지 않는 자로 만들어 내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의롭다 함을 얻었지만,
그리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는 온전함에 분명히 이르게 될 것이지만;
아직은 죄를 짓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남아 있는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12절).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나가야 하는 구원은
죄 사함의 바탕 곧 칭의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계명, 사랑의 계명을 즐거워하며 행하는 거룩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에 즐겁게 순종하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결정적인 것이고, 선행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자발적인 반응도 반드시 따라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 사함 받은 인간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하는 자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소원이 곧 그의 소원이 되는 일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13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강압적으로나 기계적으로 베풀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원하여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도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강압적으로 우리를 복종시키실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복종은, 죄를 짓지 않는 복종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의로운' 복종은 아닙니다.
'가치' 있는 복종도 아닙니다.
사랑의 복종만이 가치 있고, 의로운 복종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것을 기대하셨기에,
은혜를 주시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발적인 참여로 구원을 이루게 하십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 해주시는 은혜는 진정한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 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복종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행위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들의 행위 때문에 기뻐하시거나(17, 18절) 노여워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베푸신 은혜는 동식물에게 베푸신 은혜와 차원이 다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자들은
이 은혜를 등한히 여기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이 은혜의 완성 곧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겸손히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종속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그 자발적인 복종, 의로운 복종을 배워야 합니다(5-11절).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힘써야 할 것은
생명의 말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에 마음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16절).
곧 자기 부인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도 품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분의 마음을 느끼며 사모하며 닮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소원의 문제,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주저하지 않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 마음과 영을 바꾸어 가실 수 있도록, 주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5절).
내 안에서 성령님께서 즐겁게 하나님의 소원을 펼칠 수 있도록
나의 고집과 욕심, 주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13절).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을 죽여야 합니다(14절).
그럼으로써 우리는 선한 일, 사랑의 계명에 즐겁게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이 일이 이루어져 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내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말씀 사역자가 기뻐합니다.
당연히 나의 마음에도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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