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가장 고상한 지식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5. 28. 09:43

본문 : 빌립보서 3장 1-11절

 

사람은 고상한 지식, 품격있는 인격, 멋진 외모, 교양있는 말과 행동을 좋아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소망하며 가꾸고 노력한다.

 

바울은 주 안에서 기버하라고 격겨하면서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가 할레파라고 말한다.

 

세상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자신도 육체를 자랑하고 신뢰할만 하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자신만을 바라고 원한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땋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한다고 강조한다. 

 

십자가의 신비, 부활의 신비보다 더 위대하고 고상한 지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십자가에서 죽어 부활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 깨달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이 고상한 지식을 알고 더 알기 위하여 날마다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며 모든 삶을 다 바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믿는다.

믿음도 ,믿음의 고백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그저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올려드리고 찬양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말씀 안에서 주님을 더 알기 원하고 원한다.

새벽마다 기도 가운데서 주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통해 주님을 더 알기 원한다.

성령이 디다스코 휘포밈네스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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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경주]

 

바울은 교회 안팎의 어려움 속에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재차 권면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매임마저 복음의 진보로 바꾸시는 분, 만유의 주가 되신 그 주님 안에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처럼 기뻐하라고 말한다.

주님에 대한 확신이 어떤 형편에서든 기뻐할 수 있는 이유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보다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며 이미 다 이룬 사람인 양 행세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조롱하고 비난한다.

하나님의 참 백성은 몸에 새긴 할례의 흔적을 자랑하거나 신뢰하지 않고

성령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아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신뢰하는 자들이다.

곧 주를 이용해 나를 높이는 자가 아니라 나를 부인하며 주를 높이는 자들이다.

 

바울에게도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 충분했다.

혈통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었고,

또 이단의 무리를 척결하는 데 앞장설 만큼 더할나위 없는 유대교의 모범이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도 세상의 헛된 자랑거리를 얻으려다가 구원의 주님을 놓치지 말자.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은 후

할례를 비롯한 모든 율법의 의를 배설물로, 과거의 모든 자랑거리를 해로 여긴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와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을 잃어도 그리스도를 얻으면 다 얻은 것이다.

복음은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를 부러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되게 한다.

거룩한 '가치 전복'이다.

하늘 시민의 삶은 땅에 속한 사람의 삶과 다를 수밖에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야 참된 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 밖에서 육신으로 획득한 의나 율법으로부터 나온 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님앞에 내세울 '선과 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은혜도, 믿음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얻고 아는 일이 내 인생에서 가장 수지맞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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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8(수)
[ 복음의 훼방꾼(1), 율법주의 ]
찬송가 538장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사도는 빌립보 교회 때문에 자신이 기뻐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1장에서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 때문에 기뻐한다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면 죽을 것이고,

살아서 제물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장 후반부에서 2장 전반부까지에서는 이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싸움에, 

경주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영광스러운 구원, 큰 구원이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달려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경주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마음, 죽기까지 복종하신 겸비한 자기 부인의 믿음을 품기 위해 달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해 달라고, 이것은 자신이 목숨을 바쳐 이루고 싶은 소원이라고 간곡히 호소합니다.

글의 호소로 부족하였기에, 복음의 본보기가 되는 두 사람을 파송하여 빌립보 교회를 섬기게 합니다. 

자신도 곧 뒤따라 갈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사도가 이렇게 기뻐하며 간절히 기대하는 빌립보 교회의 구원에 훼방꾼 둘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입니다.

1절의 '끝으로'는 '결론적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서신의 맨 끝에 있었다면, 전체를 마무리하는 권면으로 볼 수 있지만, 

중간에 쓰였기 때문에 다시 한번 서신의 핵심 주제를 강조하는 역할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결론은 기뻐하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붙어 있는 단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 안에서'입니다. 기뻐할 근거는 '주 안에 있음을 확인한 것에 있습니다.

1절 첫 머리를 ‘주 안에서’를 조금 더 강조해서 표현하면 ‘주 안에 있음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주 안에 있지 않은데 기뻐하는 것, 주 안에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 기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망하는 일입니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사상 같지만, 

복음의 진리 쪽에서 보면 같은 방향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주 밖에서' 구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자기를 부인하는 은혜의 복음,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을 불편해합니다. 

자기의 노력과 힘으로 의를 이루어보겠다고, 그래서 구원을 얻어 보겠다고 발버둥을 칩니다. 

자신의 의지로 충분히 율법을 지켜낼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에게는 율법을 지켜내는 삶이 자랑이요 긍지가 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일일이 여쭤보며 사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으로는 만족감이 없습니다. 

법을 지켜도 자기가 알아서 지키는 것을 선호합니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부담감이 더 큰가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항상 같이 지내는 삶이 율법에 매이는 것보다 더 큰 속박으로 여겨집니다.

율법폐기주의도 같은 이유에서 계명을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계명, 사랑의 계명을 속박과 억압으로 여기며 불편해합니다.

그래서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모든 죄가 사해졌으니,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 

계명을 지키지 못해도 우리의 구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우기는 교리입니다. 

소위 '구원파'들이 이런 주장을 합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의 계명을 지켜내게 하는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교회의 머리로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이 일을 이루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어떤 고난과 수치도 마다하지 않는 사랑의 주님께서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며 나를 생명의 계명 지키는 자로 만들어 내심을 믿는 것이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자는 자기의 힘으로 계명을 지켜낼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동시에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한 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아직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 그 믿음이 온전치 못하여 더 단련을 받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실수할 수 있고 또다시 넘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훼방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하고 기뻐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의 훼방꾼 중의 하나인 율법주의를 경계시키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한 형태인 할례파를 삼가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복종을 다짐하는 표시로 '할례'라는 의례를 주셨습니다.

생식기의 겉껍질을 도려내어 속살을 드러내는 의례입니다.

겉치레와 외식을 벗어버리는 의식입니다.

자신이 피조물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 고집을 꺾겠다는 결심의 표식입니다.

마음의 할례가 진짜 할례라는 말씀의 뜻이 이것입니다.

[롬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참조 신 10:16, 신 30:6, 렘 4:4, 렘 9:26, 행 7:51).

세례의 의미와 할례의 의미는 사실상 동일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이를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로 표현했습니다.

할례는, 세례는 단순히 잘라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해 기꺼이 죽는 믿음의 의식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만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11절).

[베드로전서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몸을 상해하는 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잘라내는 일’이란 뜻으로서, 

잘못된 의도로 행해지는 할례를 가리킵니다. 

본래 할례는 육체를 신뢰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는 예식인데, 

그 형식만 강조한 결과, 육체의 예법이 됨으로써

거꾸로 육체를 신뢰하게 만드는 악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을 ‘개’라고, ‘행악자’라고 사정없이 매도해 버립니다.

육체의 신뢰할 만한 것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성령께 복종함으로 봉사하는 자가

진짜 할례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곧이곧대로 믿어야겠습니다. 

전에 유익하던 것을 이제는 오히려 해로 여긴다고

 거듭거듭 분명히 말하고 있는 사도의 말을 믿어야겠습니다. 

그가 위대한 복음 사역자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동력이

그의 교육수준과 히브리식 훈련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그가 교육으로 갈고 닦은 실력을 가지고 복음에 헌신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가 인간의 전통과 노력으로 얻은 그 실력을, 

심지어 거룩한(?) 할례까지도 무익한 줄 알고 배설물로 여기며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복종하는 선택을 하였기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아들였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개처럼, 바울이 배설물로 여긴 그것을 다시 탐하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 주옵소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갈 6:14] ...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만이 내게 유일한 소망이요 자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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