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빌립보서 3장 12-21절
그리스도인은 두 세계를 살아간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그리고 현재형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얼마나 의식하며 두 나라의 시민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하나님 나라의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이 일반이다.
오늘 바울은 유명한 말을 쏟아놓는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디 그대로 행할 것이라."
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고 권한다.그리고 우리처럼 행한는 자들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나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그 소망을 붙들고 모든 역경과 고난을 감내하고 이겨내고 통과한다.
하늘의 시민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시민권,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그분이 미천한 인간을 자신처럼 영광스럽게 신과 방불한 존재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부활하여 누릴 하늘 영광을 말이다.
그 시민권을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의 시민처럼 살아야 한다. 아니 지금은 이 땅에서 현재형 하나님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already but not yet 에서 힘들어 하지만
이미 우리는 승리한 자로서, 하늘 시민이 되었고, 그 시민권을 누리고 행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나그네 인생길을 담대하게 살 수 있다.
분명한 소명이 우리에게 주어졌기에, 이 엘피스의 소망을 붙들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믿음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하흐의 하나님, 에크의 예수님, 할라크의 성령님이 우리 인생을 붙들고 계신다.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 나라의 시민이다.
이 모든 영광이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을 믿는다
그래서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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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시민처럼]
그리스도인은 완성을 추구하는 도상道上의 존재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백성이 되는 삶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날마다 이루어가야 한다.
주님을 알아가고 그로 인한 사랑이 깊어져가야 한다.
바울도 육체를 신뢰하던 과거를 뒤로 하고, 지금도 부르심의 날을 고대하며 달려간다고 고백한다.
가야 할 푯대가 앞에 있다.
바울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곁길로 나가지도 말고
주께 붙잡히고 주만 붙들고 오늘도 신앙의 경주를 멈추지 말자.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다 이룬 것처럼,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자만은 하나님의 자비에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 여정에서 가장 치명적인 올무이다.
신앙의 성숙은 남다름이 아니라 한마음에서, 독주가 아니라 합주에서,
신령함이 아니라 신실함에서, 많은 지식이 아니라 바른 실천에서 확인된다.
성숙한 자들은 이미 완전해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며 완전을 향하여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이다.
본받음과 모방은 인간의 본성이다. 문제는 '대상'이다.
바울은 자신을 본받고 또 자신을 본받아 행하고 있는 이들을 눈여겨보라고 말한다.
맹목적인 지도자 추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따르라는 뜻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고 육체를 자랑하며 자기만족을 위해
땅의 일에 매여 십자가의 은혜를 외면하는 자들은 주의하라고 말한다.
누구를 본받고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최후(영광 혹은 멸망)를 결정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지만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사는 하늘나라 시민이다.
이 세상의 것으로, 육신에 속한 것으로 만족하기엔 기대가 높고 소망이 크다.
주께서 오시면 만물이 그 권세 앞에 굴복할 것이고,
우리 낮은 몸도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할 것이다.
소속이 달라졌으니 삶의 방식도, 사는 이유도 달라져야 한다.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자는 오늘을 다르게 살 수밖에 없다.
소속을 기억하고, 소망을 잃지 않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날까지, 하늘 시민답게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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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훼방꾼 2]
왜 율법주의자가 되고, 또 율법폐기주의자가 될까요?
근본적으로 복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는다 하면서도 복음이 아닌, 복음이 주는 생명과 소망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요, 율법폐기주의입니다.
내적 자아와 자존심을 추구하는 쪽은 율법주의에 빠지고,
육체의 자랑과 만족을 추구하는 쪽은 율법폐기주의로 빠집니다.
둘 다 땅의 만족과 자랑을 추구합니다.
크게 보면 이 땅의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의 자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십자가를 통한 부활을 추구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구원은 자아 실현 곧 자기 만족입니다.
한쪽은 정신적인 자기 만족, 다른 쪽은 육체적인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가치는 '자기'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부활의 생명, 부활의 영광을 추구하는 바울은
자신에게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였지만, 그는 여전히 계속 경주합니다.
그만큼 부활의 영광은 크고 고상합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정도로 부활의 소망은 놀라운 것입니다.
이 영광의 소망을 가진 자는 결코 멈출 수 없고 결코 포길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처럼 살면 된다. 디모데, 에바브로디도처럼 하면 된다."
정말 자기를 닮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닮게 된 자기를 닮으라는 말입니다
복음에 대한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굴복이 예수님 닮은 삶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율법주의에 이어 복음에 대한 두번째 훼방꾼은, 나태와 쾌락의 삶을 조장하는 율법페기주의입니다.
18-19절의 말씀은 아예 세상의 향락을 좇아 사는 불신자들에 대한 경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정작 십자가의 길은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대신 지셨는데,왜 우리가 십자가를 또 져야 하느냐고 반발합니다.
터무니 없는 반발입니다.
우리 자신의 참여가 전혀 없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십자가는 반드시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여야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자기 부인의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심어 놓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여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됩니다.
이런 자에게 영광의 부활, 영생의 부활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에서는 그 계명이 항상 부담으로만 여겨집니다.
하나님보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보다, 언제나 자기 자신이 우선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명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이 '원수'같이 싫은 명령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인으로 영접한 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자기 일이 아닌 주인의 일이 관심사가 됩니다.
주인이 머리로 계신 교회의 평안과 행복이 관심사가 됩니다.
이런 사람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즐거워합니다.
단지 형벌이 두려워서 지키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 나라의 법을 생명으로 여기며 지키려고 애씁니다.
그 계명이 자기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행복하게 만드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계명을 지키는 상태에 이르기를 소원하며,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달려갑니다
단지 형벌이 두려워서 계명을 지키는 일에 힘쓰는 자들은,
형벌이 면제되고 나면 결코 계명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형벌이 두려워서 계명을 열심히 지키는 자들이 율법주의자이며,
형벌이 면제되었으니 계명을 지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율법폐기주의자들입니다.
둘은 하나님의 계명을 부담으로만 여긴다는 점에서 동류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계명이 목적이 아닌 수단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삶이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을 이들은 납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것은,
그것이 생명이요 복이 되기 때문임을 알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가치는 다른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 즐기는 일, 권력, 명예가 이들에게 가장 큰 가치입니다
진심으로 남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느끼는 만족감, 행복을 이들은 모릅니다
천국이라는 곳이 단지 결핍이 없고 아픔도 죽음도 없는 곳이라니 들어가고 싶을 뿐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나라, 사랑의 나라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일 뿐입니다.
주 예수님,
특별했으나 그 모든 특별함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갔던 바울을 바라보겠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 바울의 뒤를 따라갔던 디모데를 생각하겠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못한 처지에서 주님의 심장으로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에바브로디도를 꿈꾸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즐거이 따라갈 수 있도록 권고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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