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 원장을 떠나보내며>
“현대 자유 문명국에 사는 사람에게 가장 괴로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설교를 듣는 일일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안토니 트롤롭(Anthony Trollope)이 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아왔다. 성도들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정작 가장 괴로운 설교는 반복되는 절기설교와 함께 생명력 없는 장례식장의 설교다.
이번 박상은장로 장례식의 장례감독으로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설교자 선정이었다.
박상은장로의 오랜 친구였던 정현구목사(서울 영동교회 담임)는
가장 탁월한 장례설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장례를 끝낸 후, 이혜경권사(박원장의 부인)는 설교 영상을 다시 볼 수 있는가를 문의해 왔다.
나는 이 설교문을 건네받아 청란교회 성도들에게 거의 그대로를 낭독설교 형태로 전달했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 놀라운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파 전문을 그대로 옮긴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울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고전 15장 42-44, 58)
한 사람의 장례는 일반적으로 세 번의 장례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입관, 발인, 하관 혹은 안치입니다.
세 장례의 절차는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입관은 고인을 관이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마지막 자리에 누인다는 의미입니다.
발인은 고인을 고인이 살던 이곳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보낸다는 의미입니다.
하관 혹인 안치 예배는 땅에 묻어 흙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세 과정의 장례는 유족들에게 깊은 슬픔과 애곡과 호곡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장례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입관은 고인이 누운 마지막 자리는 차가운 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따뜻한 품입니다.
발인은 고인의 떠남이지만 아버지의 집이란 도착지를 향한 도착입니다.
하관은 고인의 유골을 땅에 묻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땅에 심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장례에는 깊은 슬픔도 있지만 깊은 소망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죽음을 영혼이 육체를 벗어남이라고 생각했던 헬라시대의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의 비밀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은 땅에 씨를 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씨라는 낮은 생명을 심으면 나무란 높은 생명으로 다시 자라나는 것을 통해서, 육의 몸을 땅에 심으면 신령한 몸으로 다시 난다는 부활의 진리를 알려줍니다. 박상은 장로님의 유골을 땅에 안치하는 것은 부활의 봄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 소망이 담아 씨앗을 심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시 죽음을 잠에 비유합니다. 하루의 고된 일과를 끝내고 깊은 단잠에 드는데 그 잠은 다음 날의 활기찬 아침에 일어날 소망을 담고 있는 잠입니다. 박상은 장로님은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최선을 다한 후에 영적 단잠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땅에 심긴 씨앗은 완전히 죽은 것입니까? 아니면 살아 있습니까? 땅에 심긴 씨앗은 그 모양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죽은 것이지만, 더 높은 나무의 생명으로 살 것이란 점에서 살아 있습니다. 아니 씨앗의 생명에서 나무의 생명으로 전환하는 사이의 생명이란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낮의 활동을 끝내고 잠자리에 든 사람은 마치 죽은 것 같지만 동이 트면 이러날 생명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죽은 자를 산 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후에 바로 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산 자라고 말씀하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에서 죽은 박상은 장로님을 포함한 성도들은 죽었지만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시선으로 보면 죽음의 의미가 너무 달라집니다. 관에 누웠지만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고, 우리 곁을 떠났지만 아버지 집에 도착했고, 땅에 묻혔지만 봄날의 꿈을 담은 씨로 심긴 것입니다.
믿음의 시선으로 보면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ending’이 아닌 그 다음의 생명, 영생으로 이어진 ‘anding’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 박상은 장로님을 안치하면서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깊이 슬퍼하지만, 동시에 그 슬픔을 이기는 깊은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 땅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 땅의 생명은 이 땅 위에서 다른 형태로도 이어집니다. 고인이 생전에 뿌린 씨앗들이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고인은 부친이신 박용묵 목사님을 통해서, 10만 명 전도의 꿈이란 씨를 자기의 마음속에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겨진 씨가 박상은 장로님의 삶 속에서 나무가 되었고, 장로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프리카 사람들, 선교지의 사람들의 가슴 속에 심겨졌습니다.
고인이 다녔던 고려의과대학의 전신이었던 조선의학강습소를 개설하신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 조선 땅에서 남편을 잃고 딸을 잃었음에도 계속 남아서 여성의 치료를 위해서 병원을 세우고 의학 강습소를 세우신 그 의사 선교사의 꿈의 씨가 고인의 마음에 심겨졌습니다. 고인이 의사로서 수련을 했던 고신의과대학 복음 병원을 세우신 장기려 박사 밑에서 인턴으로 인술을 배우면서 장기려 박사의 인격과 삶의 씨가 고인의 마음에 심겨졌고, 그 씨가 치료를 받은 환자들 속에, 같은 비전을 가진 의사들 속에 생명사랑 존중의 사역 속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고인은 교회 장로로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좋은 남편과 아버지로서 사랑의 씨가 마음에 잊을 수 없는는 추억을 남기셨습니다.
아버지 박용묵 목사님, 선교사 로제타 홀, 의사 장기려와 같은 분이 심었던 씨가 박상은 장로님 속에 심기자 박 장로님은 자란 나무가 되었고, 그의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 속에 또 씨를 심는 일을 하셨고, 그 뿌린 씨가 누군가의 가슴에서 누군가의 삶에서 자라고 있으니 죽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봄을 기대하며 고인을 아름다운 땅에 심습니다. 부활의 봄을 기다리며 나무로 자랄 소망을 담아 수목장을 통해 땅에 심습니다.
박상은 장로님을 아는 수많은 사람들,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의 땅에 심습니다. 박 장로님을 기억하는 여러 사람들, 여러 전도자들, 의사, 선교사님들 속에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故 박상은 장로님을 한국교회 역사의 땅, 세계 선교역사의 땅에 심습니다. 아버지 박종묵 목사님, 선교사 로제타 홀, 의사 장기려가 심겨진 선교 역사의 땅에 심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참여한 유족들과 친구들 성도들의 가슴에 심습니다. 그 씨가 자랄 것입니다. 나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씨를 뿌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부르심의 길을 달려가다 그 선교의 현지에서 부름을 받은 박상은 장로님의 유골을 안치합니다.
말씀이 주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장례를 치르는 유족들의 마음에 하늘 소망과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곳에 함께 한 친지들과 신앙의 동지들과 성도들 속에서 슬픔을 이기는 큰 소망이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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