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
본문 : 마가복음 5장 21-34절
데가볼리 거라사 광인을 고쳐주심으로 이방선교의 첫 사역과 첫 이방선교사를 파송하신 후
다시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오셨다.
오늘 상황이 절박하고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명은 회당장 야이로이고 한 명은 12년 혈루병을 앓고 있은 여인이다.
야이로는 12살 여자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모든 소유를 다 사용하여 치료에 전념하였으나 고치지 못한 혈루병으로 고통받는 여인이다.
둘 다 여성으로 당시에는 인권이 동등하지 않던 차별받던 신분이었다.
마가는 둘 다 12세, 12년을 언급하고 있다.
오래되었다는 의도일까?
야이로는 회당장이다. 당시에는 지역 회당의 선출된 자로
예배를 총괄하고 주중에는 학교를 운영하며, 건물을 관리하던 위치에 있던 자로서
자신의 높은 지위와 체면을 던지고 아직은 무명이셨던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다.
무엇때문인가? 자신의 어린 딸이 죽게되었다는 것이다.
딸을 치료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해 보았을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아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제는 예수님의 안수기도와 치료 밖에는 기대 곳이 없다.
야이로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느껴진다.
주님은 이에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기 위해 길을 나서신다.
여기 또 한 명의 예수님의 도움이 간절한 사람이 있다.
혈루병으로 12년을 고생한 여인으로, 전 재산을 털어서 병을 고칠려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재산은 다 소비하고 병은 더 악화되고 이제 어쩔 도리가 없는 절망과 속수무책의 상황이고 자포자기의 심정이다.
마지막이다는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 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었다.
혈루병은 부정한 질환이다,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상대도 부정을 타게 된다.
유대인으로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염치불구하고 군중 속을 헤집고 나아가 주님을 옷자락을 만진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얼마나 간절했으면 사회의 통념과 종교의 규례도 뛰어 넘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이 여인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없었을 것이다.
의과대학 시절 들은 이야기가 있다.
많은 분들로 부터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으시던 고 장기려 박사님의 이야기이다.
많은 암 환자나 불치병과 임종을 암둔 분들이
장기려 박사님의 얼굴 한 번 보는 것이, 손 한 번 잡아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오늘 야이로와 혈루병 여인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이다.
야이로와 혈루병 여인의 간절함과 절박한 심정을 묵상하는 아침이다.
주님은 고쳐주시리라는 절대적인 믿음의 발걸음이었다.
나는 이들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며, 기도하고 예배하는 자인지 돌아본다.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이런 마음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맞아 주시고 고쳐 주신다.
야이로의 딸을 '어떻게 고치시는가 보자'하는 호기심 발동한 구경꾼의 마음으로 따르는 무리들과 두 사람은 다르다.
매 주 수 많은 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러나 다 똑같지 않다. 주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누군가?
오늘 본문 속의 야이로와 혈루병 여인같은 자들이 아니겠는가!
본문 중에는 병을 고쳐주심과 더불어 마가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있다.
여인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이웃과의 사회적인 관계와
예수님과의 더 깊은 영적인 관계까지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시고 계셨다.
야이로의 체면과 권위를 세워주시고 즉시 야이로의 집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나는 영원의 구원과 영생에 대하여 간절함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닌가 돌아본다.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느긋하게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간절함이 사라져버린 자신의 삶을 회개한다.
20여년 전 의료사고로 정말 어찌할 수 없을 때
금요 철야기도 시간에 하나님을 부르던 그 간절한 외침을 기억한다.
매일 매 순간 이런 마음 유지하기가 쉽지만은 않지만
구원과 영생을 향한 간절함을 회복하기를 기도하는 아침이다.
성령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에게 야이로와 혈루병 여인같은 간절함을 주소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 영적 목마름으로 몸부림치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은혜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나를 용서하여 주소서.
다시 구원의 감격과 가치를 기억하면서 첫 사랑을 회복하게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