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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자기부정과 자기포기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4. 4. 19. 12:08

1. 십자가의 길 : 사랑의 길

 

"너 답게 살라"는 말이 유행처럼 회자되는 시대에 자기를 부인하라는 십자가의 메시지는

다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나답게 사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구현한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아셨기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비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더 욱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소명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사랑의 길은 어떤 길일까요?

어떻게 하면 각자에게 주어진 몫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추구하며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를 묵상하며 주님을 따르는 길이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2. 자기 부정 :칼뱅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종교개혁가 칼뱅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자기부정이라고 말합니다.

자기부정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데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소유나 권세, 명예 같은 이익 추구뿐만 아니라 근심과 걱정도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힘을 다해 추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최선을 다해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에 대해서는 잊는 자기부정은

우리 마음에 이기심과 탐욕, 교만과 허영심이 들어올 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부정을 잊으면 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어떤 일을 하든 개인적인 욕심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칼뱅은 자기부정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일생 동안 생활의 핵심으로 삼아야 할 태도라고 말합니다.

자기부정이 인생의 방향성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관심과 헌신이 나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칼뱅은

자신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나 판단보다는 새롭게 된 심령으로(엡 4:23)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갈 2:20) 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나의 뜻이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바람이 나의 바람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동역자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친한 친구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듯, 예수님의 마음을 알면 그 뜻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부정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이웃에 대한 태도도 바르게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으며,

그들의 모습이나 행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그들을 섬겨야 할 의무를 갖는다고 칼뱅은 가르칩니다. 

 

칼뱅이 자기부정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자기부정이 역경을 견디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전적으로 주께 드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맡긴 사람은

어떤 이유로 다가오는 고난이든지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어두운 밤을 보내야 하는 시간도 인생에는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영원히 맡겼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도 영적 기쁨으로 감사하며 견디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자기포기 : 장 피에르 드 코사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자기부정은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납니다.

장 피에르 드 코사드(Jean -Pierre de Caussade, 1675-1751년)는 [신의 뜻을 따르는 길]에서

자기 포기가 영적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제시합니다.

성화의 길을 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 앞에

전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긴다는 의미의 '자기포기'(abandonement)라는 용어를 통해

코사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코사드가 말하는 '자기포기'는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면서 그분의 사역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성례'로 알려진 코사드의 영적 교훈은

말 그대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때문에

현재의 순간, 지금 이 시간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미래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감당해야 할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과 함께하면서 

현재의 의무에 성실한 것,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지금 이 순간의 성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코사드가 말하는 자기포기는 수동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 부여받은 현재의 일에 능동적으로 헌신하는 것 외에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어맡기는 것이 자기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코사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고난을 견디는 것도 하나님을 닮아가는 길이 된다고 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감추지만 믿음의 눈을 지닌 사람은 오히려 고난을 통해 순수해지기 때문입니다.

 

4. "3호실의 죄수", 세례 요한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자신을 내어맡긴 자기포기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세례(침례) 요한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진 에드워드(Gene Edward)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깊이 있게 그려낸 이야기 [3호실의 죄수]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삶에 찾아온 고통에 대해 어떤 이는 불공평한 상황과 사람을 원망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때때로 다가오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을 거쳐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의 기대대로 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분을 계속 따르겠습니까?"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보냄받은 세례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라는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을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으로 높이고,

자신은 그저 신랑 친구의 기쁨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소명에 충실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기시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3호실의 죄수는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입니다.

요단강으로 찾아온 사람들에게 죄에 대해서는 죽고 영적으로는 살게 하는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오히려 죄인이라는 이름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들으려고 광야에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소리가 되었던 그에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죽임을 당하고 머리가 잘려 쟁반 위에 놓였던 세례 요한은 그렇게 이 땅에서의 소명을 마쳤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죽음을 앞서 경험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더 큰 이가 없다"(마 11:11)는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5. 높은 데서 사슴처럼 : 한나 허나드

 

하나님은 때로 우리 삶에 도저히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을 허락하십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맞닥뜨리게도 하시고 낙담과 절멍 속에 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지배당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기 원하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십자가를 자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한나 허나드(Hannah Hurnard)는 [높은 데서 사슴처럼]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시련을

하나님이 주신 영광스러운 기회로 만들어 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승리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바로 '높은 데'입니다.

그 높은 데로 가는 길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자기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곤경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에도

'높은 데'로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가슴에 사랑의 꽃이 핀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꽃은 예수님이 심으신 참 사랑의 씨앗이 자라난 것입니다.

사랑의 꽃을 가슴에 피운 사람은 사슴처럼 날랜 다리로 당당하게 걷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노래하듯이 말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9)

 

...[묵상과 기도]에서 옮긴 글

 

글을 옮겨 쓰면서 생각한다.

젊은 날 생각했던 나의 큰 바위 얼굴, 그것은 예수님이었다.

[큰 바위 얼굴]의 글 내용처럼 나는 큰 바위를 기다리며 살았고, 닮고 싶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늘 암송하면서 자기 부정과 자기 포기의 삶을 추구했다.

더불어 성령 충만한 삶,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이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분량에 이르고자 몸부림쳤다. 

그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것, 

그래서 예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예수님의 발자취가 나의 삶의 흔적이 되는 것이었다. 

지난 50년 반 세기의 신앙생활을 뒤돌아 본다.

이제 그 열매가 맺혀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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