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예레미야 38명 1-13절
AD 589년 왕위에 올랐던 애굽의 바로 호브라(Apris)가 시드기야와 조약을 맺고
유다를 도우러 올라오자 바벨론은 일시적으로 퇴각하였다.
베냐민 아스돗에 가서 친족이 죽자 그 땅을 상속 받기 위해 가다가
베냐민 성문에서 성문장 이리랴에게 붙잡힌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친바벨론파로 분류되어 요주의 인물이었나 보다.
관리들에게 얻어 맞고 감옥에 있는 상황에서 오늘 4명의 고관들이 시드기야에게 나아와
예레미야의 처형을 요구한다.
그는 국가가 외세 침입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침략국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다 죽을 것이라 외치는
군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반국가적 위험 인물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백성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붓돋아주어도 부족할 판에
예레미야의 행동은 백성들의 평안이 아닌 재난을 청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의 손을 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드기야는 이런 고관들의 요청에 방임한다.
자신의 왕권이 강하지 못하고 주관이 뚜렷하지 못하여 그들의 요구한대로 그들의 손에 예레미야를 맡기고 만다.
그러자 예레미야를 감옥 뜰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줄로 달아 내려 가둔다.
그 구덩이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었다.
예레미야가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닌가 보다.
구스 출신 내시 에벳멜렉이 이 소식을 듣고 베냐민 성문에 앉아 있는 왕에게 나아가 예레미야의 생명을 구명한다.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시드기야의 마음이 움직였다.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구덩이에서 구원하라고 지시하자,
에벳멜렉이 헝겉과 낡은 옷으로 밧줄을 만들어 구덩이에 내려 보내어 잡고 올라오게 했다.
구덩이에서 나왔지만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고 시위대 뜰에 머물렀다.
오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믿음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고관과 관리들,
갈팡질팡하고 있는 무기력한 왕,
구명운동을 펼치고 있는 예상치 못한 인물이다.
고관들의 위치에서 취할 수 있는 건의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예언자의 말에 대한 신뢰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없었다.
이런 모습이 유다 말기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왜 징계하시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일국의 왕이 한없이 나약하고 주관도 없고 리더십은 더더욱이나 없다.
예레미야의 말에 긍정을 하면서도 온전히 결단하고 따르지 못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예레미야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고관들의 눈치를 보며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특히 조직이나 국가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때는 더욱 그러하다.
강한 리더십, 정확한 판단과 강한 추진력 말이다.
유과 고관들과 백성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이방인에게서 본다.
구스(에디오피아) 출신 내시 에벳멜렉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을 분아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지자가 부당한 대우로 굶어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믿음은 이렇게 용기있는 행동을 하게 만든다.
오늘 세 부류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으려 한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면서도 믿음 없는 행동을 하는 고관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답게, 하나님 자녀답게 믿음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행동하기를 원한다.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왕의 리더십을 보면서
교회의 리더로서 바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도록 지혜롭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함을 절감한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에 합당한 용기있는 행동을 하는 내시 에벳멜렉 을 보고
나의 신분이나 상호아이 어떠하든지 믿음에 합당한 용기있게 실천하는 신앙인이기 되기를 소망해본다.
성령님이여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에 합당한 용기있는 행동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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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바벨론에 항복하면 살겠지만, 저항하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예루사렘이 바벨론에 포위되기 전에도, 포위되었을 때에도 같은 말씀이다.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수용하라는 뜻이다.
항복이 굴욕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불편해도 나를 살리는 주님의 말씀이다.
지켜야 할 것은 나의 자존심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고, 나의 안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항복을 권유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네 고관이 왕을 찾아가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요청한다.
포위 중에 절망적으로 싸우는 상황에서 사기를 떨어뜨리는 재난과 패배의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이 나라의 명운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알아들을 만큼 계속 전했지만 그들은 완악한 마음을 꺾지 않았다.
하나님도 심판 의지를 꺾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인데도 고집을 부리는 것은 없는가?
죄에서 돌이키라고 주신 시간을 죄를 더하는 시간으로 삶지 말자.
시드기야왕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의 손에 그를 넘긴다.
시드기야는 힘 있는 나라들 사이에서 줄타기하다가 나라의 위기를 초래하더니,
이번에는 힘 있는 자들의 말에 휘둘리며 선지자를 사지로 내몬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권력자들의 말이 더 두려웠고,
진실보다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자기 아성이 무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유대인' 고관들은 선지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왕궁 내시인 '이방인' 에벳멜렉은 위험을 무릎쓰고
왕에게 은밀히 다가가 두려워하던 고관들의 악행을 고발하며 무고한 예레미야의 구명을 요청한다.
자신과 동족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의 살리는 손이 되기로 자청한 것이다.
의로운 이들이 겪는 부당한 고난에 분노하고, 그들을 지지하고 변호하는 벗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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