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영성일기

복음 전파와 고난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4. 11. 19. 11:23

--- 옮긴 글

 

본문 : 디모데후서 4:1-8 선한 싸움
찬송가 360장 행군 나팔 소리에​

<디모데후서 4:1-8>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결론적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명령을 합니다. 엄히 명령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라고,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직무를 다하라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복음은 구구절절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선포함으로 복음의 전도는 시작됩니다. 

복음이 능력 있게 선포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하지만, 

복음 전파자가 그 복음을 삶으로 구현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또한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전도는 선포가 그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선포를 뒷받침하는 것은, 확신과 증거, 실천이지 깊은 이해나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복음은 의탁하는 것(나란히 세우는 것)이고 전수하는 것입니다.

​처음 복음을 접하거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성경 속에 들어 있는 구원의 지혜를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에 민감하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아직 육신에 속한 자이거나, 영적으로 육신에 속한 자와 거의 같은 상태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복음 증거자의 육신적인 상태(마음과 삶)를 보고 느끼면서,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는 몸에 밴 복음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 전도자가 불신 상태에 있는 영혼들에게 보여주는 복음은 

영적인 복음이 아니라, 마음과 몸에 밴 복음입니다.

​물론 복음은 선포될 뿐만 아니라, 권면과 설득으로 가르쳐지기도 해야 합니다. 

복음을 이미 믿기 시작한 자들,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긴 자들에게는 

말씀을 꾸준히 가르치는 일이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울 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시어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3:15). 

선포되는 복음과 가르쳐지는 복음이 합쳐져서, 

복음을 선포하며 전수하는 전도자를 만들어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3:2,13절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의 사람들을 말합니다)은 

복음의 능력(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능력)을 부인하고, 비복음적인 것에 환호를 보내며 따라갑니다. 

당연히 고난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고난을 기꺼이 받는 전도자의 직무를 다하라고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잘 가르쳐야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에도 능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줄기차게 '고난을 받을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살아내는 것은, 곧 고난을 기꺼이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의 십자가를 지고 거꾸러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세우셔서(살리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실 것을 믿는 믿음,

이 믿음이 고난을 기꺼이 받게 만듭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상당수 한국 교회가 차별방지법, 특히 동성애차별방지에 대해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그 주된 이유가 혹시 고난을 두려워해서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비슷한 유형의 죄인 낙태죄, 간음죄의 폐지에 대해서는 과연 이렇게까지 열심히 반대했던가?’ 

하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낙태와 간음이 세상 법정에서는 죄가 아니라고 판정하더라도

 우리는, 교회는, 그것이 여전히 죄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것과 죄를 용납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에 그렇습니다. 

동성애가 세상 법정에서 죄가 아니라고 판정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죄임을 가르쳐야 하고, 

또한 동시에 여전히 동성애자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음죄 폐지보다 (동성애)차별방지법 반대에 교회가 특별히 열을 올리는 이유가

이것이 교회에 핍박을 가져올 것이 우려되기 때문인 것 같아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간음을 죄라고 가르친다고 해서 목사가 처벌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성애가 죄라고 가르치면 처벌 받는다는 소문(정확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때문에,

핍박 받을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고 교회가 세력을 동원하고 힘을 모으는 것은 아닌지요.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과정에서 발생할 핍박을 막기 위해서 애쓰라고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그 핍박을 막기 위해서 물리력이나 세력을 동원하는 것은 금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오히려 핍박은, 고난은 받으라고 하셨습니다(5절).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1:8]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고난을 받는 것은 전도자의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5절). 

전도자는 복음의 증거자이고, 복음 속에는 고난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차별방지법은, 

우리 교회가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는 법이 아닐까요...?

차별방지법 중 동성애 합법화를 찬성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대는 분명히 표명하되, 그것이 죄임을 분명히 지적하되,

세력으로, 힘으로 그것을 막으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력으로, 무력으로 세상의 죄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실패한 전쟁입니다.

기독교는 세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핍박 받는 가운데, 우리의 약함이 드러나는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나타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자기 부인의 믿음으로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자기 부인의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소식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죄와 죄의 세력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죄를 이기지 못하는 무기력한 죄인임을 인정하며, 

스스로 십자가의 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되살아나고,

이기게 된 은혜를 증거하는 자가 복음 가진 자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이러하기에, 복음을 위한 '선한 싸움'은 고난을 피하지 않는 싸움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고난을 피하지 않고 당하는 싸움입니다.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복음 증거를 핍박하는 세력을 무찔러 없애겠다고 

교회가 세력을 동원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부인하는 짓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핍박을 피하려고 싸우는 싸움이라면, 

그 싸움을 열심히 싸웠다고 주님께서 칭찬하시며 

의의 면류관을 선뜻 내어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 교회가, 세상 권력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죄를 죄라 선포하고 복음을 가르치며 

그에 따른 핍박도 기꺼이 받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세력,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싸움을 선한 싸움이라고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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