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호세아 9장 1-17절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들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9;1)
이스라엘은 험난한 광야에서 만난 포도와 처음 익은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기쁨 그 자체였다.
그렇게 사랑하던 이스라엘이었기에 그들이 우상을 섬겼을 때
하나님의 슬픔은 더 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지 않은가? 많이 사랑하면 더 많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것이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 좀 더 크고 강력한 징계를 예고하시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자기 백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아버지가 자기에게 맡기신 백성을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돌보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잃은 양 한 마리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상이 짓는 큰 죄보다 나의 작은 죄를 더 많이, 더 깊이 아파하신다.
불꽃같은 눈으로 자기 백성을 살피시고 독수리 날개 아래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자.
나의 오늘도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 속에 살아가는 하루임을 잊지 말자.
이스라엘은 우상에 심취하여 그 행위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까지 이방 나라의 방식으로 물들어 버렸다.
우상 앞에서 행하는 음란행위가 기쁨의 이유였고,
타작마당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가 기쁨의 근거가 되었다.
이에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고 하시며,
우상숭배를 멈추고 기쁨의 근거를 다르게 하라고 종용하신다.
하나님 백성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욜 2:2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복의 근원으로 믿으며, 그분만을 기쁨의 이유로 삼는 사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복'에 대한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여
머리로는 성경이 말하는 복을 알면서도 마음은 세상의 복을 향하고 나아가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예언을 듣고 읽으며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에서 팔복은 어떠한가?
시편에서는 죄를 사함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진정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나의 어떠함을 알지 못한다면
이 말들이 공허하게 들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영원히 멸망당할 우리가 구원과 영생을 허락받았음을 확신한다면
성삼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더불어 누릴 영원한 천국을 믿는다면
찰라같은 나그네 인생길에서 만나는 부귀영화는 안개와 같고
그것에 올인하며 목매달고 안절부절하지 않으며 세상 것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깊은 교제만이
진정한 평안으로 인도하고 삶에서 기쁨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채 우상에게 나아가자,
하나님은 은혜를 거두겠다고 경고하신다.
그러면 그들이 누리던 풍요를 잃고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과거처럼 노예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그들은 쫓겨난 곳에서 죽을 것이고 모든 영광도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의 선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부터 타락이 시작된다.
내게는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
'은혜가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죄악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어리석은 사람 취급했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을 도리어 미친 사람으로 몰아 학대했다.
그런 사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가망이 없다.
진리의 쓴소리를 멀리할 것이 아니라 작은 소리라도 소중히 여기며 귀 기울여야 한다.
성령 하나님
오직 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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