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
물건은 바꿔써도 사람은 바꿔쓸 수 없다.
세살 버릇 여든 까지 간다.
세상에서 가장 변하기 어려운 존재가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는 개과천선 하는 사람들도 있다.
180도 바뀐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변화가 좋은 방향인 경우도 있지만 나쁜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다.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부모나 선생님의 훈계, 사랑의 매, 고난, 실패, 경험, 환경, 친구, 교육, 신앙 ...
어제 수요기도회 김목사님은 성경의 인물 중, 특히 열두 사도 중 요한을 통해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살아 생전의 요한은
1. 성질이 급한 인물 : 예수님으로 부터 보아너게(천둥)라는 별명을 받음
2. 이기적이고 성공지향적인 인물 :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한 자리를 구함, 청탁
3. 편협한 사람 :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는 자들이 귀신을 좋는 것을 보고 금하게 함.
이랬던 성격의 제자 요한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요한의 모습은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어 있었다.
그가 기록한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요한 일.이.삼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씀하고 있다.
과연 요한이 경험한 사랑은 무엇이었는가?
바뀌기 어렵다는 기질을 180도 바뀌게 하는 사랑은 어떤 힘이 있는가?
이런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거듭남, 중생이라고 불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인으로 모시며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래서 과거의 삶에서 완전히 뒤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도 바뀌지 않았던 그의 성격이
이렇게 바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자신을 사랑하셨던 스승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니
가르침이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말씀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놀라운 능력으로 다가온 것이리라.
그의 모든 것을 송두리채 바꾸어버린 이 사랑은 세상의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다.
이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바뀔 수 있다.
이 사랑을 경험한 자는 바뀌지 않을 수 없다.
왜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많은가? 이 사랑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연약한 인생이라 이 사랑을 날마다 기억하면서 이 사랑 안에 젖어 살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대학교 C.C.C 하기 수련회 때 나는 이 에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마음을 열었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회개하며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에 나의 전부를 의탁하기로 결단하였다.
그래서 주님이 계신 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도 따라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시작된 신앙의 여정이 40년이 지났다.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 사랑에 대한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면 충분하다.
그것을 믿는다면 세상의 풍파와 고난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부모의 사랑이 크면 자녀가 세상에서 방황하고 흔들리다가도 그 사랑이 그리워 돌아올 것이다.
돌아온 탕자처럼 말이다. 성 어거스틴 처럼 말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시대에서도 종종 듣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심기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는 그런 사랑을 베풀 수 있고, 사람은 그 사랑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안에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다면
이웃에게 그 사랑과 은혜를 흘려보낼 수 있으리라.
이것이 축복의 통로의 삶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부름받은 인생의 모습이 아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쓰임받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존재의 살아갈 이유가 아닌가?
수많은 설교와 가르침이 이것으로 요약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사랑, 이웃 사랑이 이렇게 실천되는 것이 아닌가?
사랑,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랑, 사람을 변화시키는 그 사랑은
사랑이라고 표현되는 것들이라고 다가 아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에 목말하고 갈급해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쉽고 편한 자극적인 사랑에서 답을 구하는 것 같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이 변화를 가능케하는 능력이 되는 사랑이다.
진실로 이 사랑을 한 번만 경험하고 나면 그 어떤 사랑에 관심 두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다.
이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도 바뀔 수 있다.
무자비한 살인마도 그 사랑을 경험하니 온순한 양처럼 변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갈 때
오늘도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으며 행복의 찬양을 부를 수 있다.
사도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던 것 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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