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5장 27-39절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른다.
레위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인다.
그 자리에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초대되었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어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냐고 비난한다.
그러자 예수님이 한마디 하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기도하고 금식하고 바리새인들도 그러하는데
너희들은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자 예수님이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어떻게 손님을 금식시킬 수있겠느냐고 하시고,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할 것이다고 말씀하시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죄인에게 먼저 다가가시는 예수님이셨다.
레위가 몸담고 있던 직업 '세리'는 당시 동족 유대인들의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세리는 유대를 식민지로 만든 로마 제국의 하수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백성을 속여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하면서 부당한 재물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세리 레위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그를 제자로 부르신다.
'보시고'라는 표현은 단순히 발견하신 것 이상을 의미한다.
신중하고 사려 깊게 레위를 응시하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심한 관심과 사랑의 시선으로 주목하신다.
우리가 그분을 찾기 전에 먼저 찾아와 불러주셨기에 우리가 믿고 회개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예수님은 레위의 집에서 그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셨다.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찍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들에게 베푼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함께 누리시는 교제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이 식탁 교제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지켜볼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며 종교적인 엘리트 의식으로 무장한 채 타인을 하대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하늘 잔치에 그런 자들이 참여할 자리는 없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수용하는 자들이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의로운 자들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찾아 그들의 회복과 구원을 돕는 것이다.
예수님은 새 시대를 열어주셨다.
예수님은 규례와 전통으로 점철된 유대교의 낡은 종교 체계를 수선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율법을 완성하고 오래전부터 예언되어 온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시기 위해 오셨다.
옛 종교가 율법을 제공하고 규례 준수에 몰두하도록 종교적으로 속박한다면,
예수님이 가져온 복음의 새 시대는 '은혜와 안식'이 그 표지이다.
나를 살리는 것은 묵은 교리와 전통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예수님과 나누는 생생하고 역동적인 친교의 자리이다.
옛 시대의 산물인 종교가 아닌 새 시대의 선물인 복음 안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예수님은 언제부터 레위를 응시하고 계셨던 것일까?
레위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비록 세리라는 직업으로 경제적 안정을 우리고 살고는 있지만
거룩한 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삶으로 인하여
동족으로부터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죄인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허무와 공허함, 외롭고 슬쓸함으로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들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의 마음을 많이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기대감과 열린 마음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있던 레위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은 기름에 불씨를 던진 것처럼 레위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으셨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간적, 충동적 결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님은 이런 레위와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진 자들을 아시고 찾아가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만세 전에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찾아 이 땅에 오셨고
몸소 찾아나셨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 부르심 앞에 우리는 순적하게 반응하고 따르는 순종의 삶이어야 한다.,
이 얼마나 복되고 은혜로운 부르심인가?
그 부르심의 가치를 알 때만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수 있다.
나는 보수적인 생각과 행동을 보일 때가 많다.
나이가 들수록 더 보수적이 되어가고 있다.
포도주도 오래된 것이 더 맛이 있다고들 한다.
가치가 확인된 것들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에 익숙해져 간다.
바리새인들가 서기관들의 생각들과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과 삶이
율법과 전통을 강조하는 종교적, 사회 분위기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었을까?
진보적인 사람들은 특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고 강조하지만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지금 시대는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해가 갈수록 그 변화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변화의 기간도 단축되고 있다.
최소 6개월이 지나면 새로운 것들이 등장하는 시대이다.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한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변화의 속도는 엄청나다.
토인비의 말처럼 지식의 폭발이 이루어지고 있어, 이 변화에 적응하기가 벅차고 쉽지 않다.
만일 내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었다면
새 시대, 새 복음의 예수님 매시지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조상대대로 유지하고 지켜온 율법과 전통을 버리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이런 변화의 갈등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나안 교인들, 온라인 예배에 대한 인식,
찬송가와 복음송(CCM), 구역예배와 구역모임, 교제와 친교, 헌금에 대한 인식,
어른 세대와 MZ세대 그리고 다음세대들의 사고와 가치의 차이는
신앙생활의 차이를 가져오고 있다.
교회가 그리고 성도들이 이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적응해 가고 있는가?
어른들은 다분히 보수적이다. 어떻게 다음세대들을 대해야 할까?
늘 고민이다. 그리고 조심스럽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가치들이 틀린 것이 아니기에, 맞다고 살아온 삶이기에
그것을 포기하고 다음 세대들에게는 다른 길을 가라고 말해주기가 쉽지 않다.
세상의 변화에 교회의 변화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교회는 변하지 않고 보수적으로 과거의 가치들을 지키는데만 머물러 있을 것인가?
지켜야 할 것과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할 것을 잘 구분하고
현명하고 지혜롭게 판단하며 대처해야 할 것이다.
복음, 진리, 본질적인 것에는 보수적으로 지키고 유지해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에는 유연성을 가지고 대처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가 열린 마음으로 복음과 믿음을 지켜가고, 시대의 변화에도 잘 적응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
급변하는 시대에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지혜와 능력을 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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