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누가 더 사랑하느냐?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2. 28. 10:33

본문 : 누가복음 7장 36-50절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집으로 초대했다. 

그 동네에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눈물로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으며 향유를 붓는다.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시몬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자가 빚을 탕감 받으면

탕감해준 사람을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가 물으신다.

감사가 용서와 비례하는 것은 당연하다.

 많이 탕감받은 자가 더 사랑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여인을 비교하며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신다.

손님이 집에 왔는데 발을 씻은 물로 주지 않았고

손님을 초대해 놓고는 입맞춤 인사도 하지 않았으며

환대의 의미로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 시몬, 죄인으로 알려진 여인 그리고 예수님이시다.

누가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일,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일에 이어

죄인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일을 연이어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누구에게는 병을 고치는 일이, 누구에게는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일이 복된 소식, 복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이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는 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의 사역은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고

그것을 수행하시는 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바리새인은 예수를 선지자나 좀 뛰어난 랍비 정도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시몬은 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을까?

진정한 접대의 마음이었다면 그가 보인 태도와는 맞지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서 트집을 잡으려는 선하지 못한 동기로 볼 수밖에 없다.

 

내 안에 바리새인처럼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지 생각한다.

주님을 적당히 섬기고, 적당히 사랑하며, 그래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바리새인을 보면서

진실로 내 안에 예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확실한 믿음이 있는지 점검해본다.

 

대조적으로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누가는 그녀를 죄인으로 소개한다. 바리새인도 그녀를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믿음은 자신이 누군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죄인이고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하고 허물많은 존재임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오늘 주님이 이 여인에게서 보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실 때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

자기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마음 때문에

발을 적셔 씻을 정도로 하염없이 흐르는 회개의 눈물로

자신의 소중한 머리털로 가장 더러워진 발을 닦아내며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예수님의 뒤에서 무릎 꿇고서 주님의 발만 처다보며 

그 발에 가장 비싼 향유를 부으며 예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마음

예수님만이 자신의 죄를 이해하시고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보신 것인가

 

자신의 죄와 허물의 정도를 아는 만큼, 용서를 받은 만큼에 비례하여 더 사랑하게 된다. 

작은 질병을 고침받았을 때 보다, 중한 질병을 고침받았을 때

의사에게 표하는 환자의 감사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다. 

나의 어떠함을 알고, 나에게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을 때만이

감사와 사랑의 정도가 결정된다. 

 

오늘 여인의 마음을 묵상한다.

그녀의 마음으로 구원자 예수님을 바라본다.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성령이여 나에게 애통하는 마음, 가난한 마음, 겸비한 마음을 주소서.

 

 

--- 김진웅 목사의 묵상
누가의 복음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났는데, 계속 복음의 어조가 바뀌지 않네요. 

시작부터 제사장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 선포되더니, 

가난한 자의 소망이 되는 긍휼과 은혜의 복음이 계속 울려 퍼집니다. 

구약 율법의 핵심인 제사, 그 제사의 중심에 선 제사장들(사가랴-세례요한으로 대표되는)의 오랜 탄식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히브리서 기자의 이 탄식이 그들의 탄식이었을 것입니다.

죄인 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음,
가난한 자에게 부어지는 복음,
소외된 자에게 쏟아지는 복음, 

이것이 누가를 통해 주신 복음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이 진짜 택하신 백성은 이방인이 아닐까?’ 

왜냐하면 버림받았다고 여겨지던 이방인이 오히려 복음을 붙들게 되었거든요(롬 9:30-32).

택함을 받았다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이 버림받은 것 같은 상태에 이르고,

버림받았다고 여겨지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택함받은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버림받았기에, 버림받은 자임을 인식했기에;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애통하는 자, 복음을 간절히 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대역전이 일어난 것이지요.

이 역전은 오늘 우리들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미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여기고 있는 자들, 교회 안에 있는 자들, 

심지어 교회의 직분자들에게도 마찬가지 역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실제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킨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영접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한 자로 판명 났습니다. 

이에 반해 더러운 죄인 취급을 받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자로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인정되었습니다.

아직 괜찮은, 누가 봐도 그런대로 봐줄 만한 죄인인 시몬은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구원의 복음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는 복음을 간절히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절망감에 몸부림치던, 누가 봐도 죄 많은 여자는 

그 필사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를 예수님께 드린 대접의 소홀함과 극진함의 문제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대접하는 정성을 문제 삼아 한쪽은 핀잔을 주고 다른 쪽은 칭찬하시는 것으로 본다면, 

그래서 예수님께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 예수님의 수준이 너무 낮아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주이시지 않습니까?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분의 최고 관심사는 우리의 구원일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구원의 복을 주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지 않습니까?

아닐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을 대가로 치르신 것일까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무슨 영광이 그리 더 필요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갖은 수모와 희롱을 당하며 하나님께 버림받는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말이 안 되지요.

때로 우리가 복으로 여기는 그것이 복이기는커녕, 

오히려 복을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오늘 말씀이 보여줍니다.

내게 결핍이 없다면, 내게 아쉬움이 없다면, 아니 아쉬워도 그런대로 견딜만한 아쉬움 정도라면, 

나는 그래도 ‘자기 부인의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게 될(되었을)까요? 

절박한 심정으로, 구박받으면서까지도 매달리는 그 ‘믿음’ 가지게 될(되었을)까요?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을 초대한다는 것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시몬은 그래서 ‘이만하면 충분히 예수님 대접해 드린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복음은 언제나 복음이지만, 누구에게나 복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적당히 예수님을 대접해 놓고 칭찬을 기대하는 그런 심령에는 복음이 임하지 못합니다.

적당히 예배에 참여하고, 적당히 봉사하고, 적당히 헌금도 하면서

‘이만하면 신자로서 할 도리는 한 거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구원하기 원한 사람은 이렇게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비천함 때문에,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자신의 무지함과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비참함을 알고 

그것을 해결해 주실 유일한 구주 예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다면 발에 입을 맞추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만이 진짜 믿음, 자기 부인의 믿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잊어버리고 마치 구원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뭔가 다른 일에 마음을 쏟고, 예수님 아닌 다른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어 사는 때가 있습니다. 

많이 받은 만큼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단지 많은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명과 소유 전부입니다. 

전부를 받았으니 우리의 사랑도 전부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전부를 받은 자의 마땅한 사랑은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전부는 우리 마음의 전부입니다.

우리 마음을 여러 곳에 나누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는 일로 충분하다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에 말씀도 담고, 정치도 담고, 돈도 담고 ... 

그러다 보면 말씀의 순위는 3순위, 4순위로 밀려버립니다. 

그래도 말씀을 마음에 담기는 했으니 괜찮은 것일까요? 

그래도 예수님 초대는 했으니 그만하면 훌륭한 믿음일까요?

마음을 예수님께만 쏟으면, 말씀에만 쏟으면, 그러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가족도 버리고, 돈도 신경쓰지 않고, 사회나 정치에도 완전 무관심해지면 어떻게 살 수 있나? 

그냥 죽으라는 소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신경 쓰지 말고, 나는 예수님께만 신경 쓰고,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만 신경 쓰고,

세상살이에 대해서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만 신경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이 일에 막 열을 내실까? 

예수님이시라면 이 일을 기뻐하실까? 

이렇게 생각하며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 말씀을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말씀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예수님께 두는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전부를 받은 자의 마땅한 사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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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세인의 초청에도 응하신다. 자신을 책잡으려는 시도임을 모르실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 시몬의 초대에 응하시며,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여 주신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견디는 힘이다.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대하는 예수님의 사랑은 

가난한 자나 부한 자, 병든 자나 건강한 자, 특별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 모두에게 평등하다.

내가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하여 놓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 전부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은 여인의 죄까지 사하시며 

자신이 하나님임을 드러내셨다.

여인의 죄까지도 사용하신 예수님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지 못할 것이 없다.

주님은 내 약점과 실수까지도 결국 선한 일을 이루시는 데 사용하실 것이다.

 

낮은 마음이 예수님을 보는 눈이다.

죄인을 판단하던 바리새인은 자기 습성대로 죄를 책잡으려는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그러럼 높아진 마음은 예수님을 선지자 이상으로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렸다.

하지만 여인은 예수님을 마주 보지 못하고 뒤에 서서 울며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여인의 이 같은 낮은 마음이 죄를 사하시는 능력의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었다.

'겸손한 왕이신  예수님'(슥 9:9)이기에 그분과 동행하는 법은 낮은 마음으로 사는 것밖에 없다.

 

용서받은 만큼 감사할 수 있다.

예수님은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큰 사랑을 베푼다고 하시며,

자신에게 향유를 붓은 여인과 아무것도 행하지 않은 시몬의 행동을 비교하셨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인정했기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감사는 용서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많이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많이 사랑하고 많이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