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백부장의 믿음과 나인성 과부를 향한 마음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2. 26. 10:14

본문 : 누가복음 7장 1-17절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마친신 후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방인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어갈 때

유대 장로 몇 사람을 보내 예수님의 도움을 청한다.

예수님이 함게 갈 때에 백부장이 보낸 전갈이 깊은 울림을 주는 본문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믿음(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과 백부장의 믿음) 두 명 중에 한 명이다.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셨다고 하신다.

 

그 일 후에 나인성으로 가셔서 과부의 독자가 죽어 장사지내는 곳을 찾아가셨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미래가 없는 절망감에 통곡하는 여인의 울음에 비통해 하신다.

죽은 아들을 살려 그 어머니에게 주신다.

 

- 김 진웅 목사의 묵상

겸비한자, 애통하는 자를 발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자랑하려는 자, 떠벌이는 자들은 경계하며 막으시면서

 애통하는 자는 일부러 드러내시고 

요청하지도 않는데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애통함, 겸비함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자질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행보입니다.

겸비함은 천국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은 믿음을 얻게 하는 근본 자질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과 폭력이라는 말은 완전히 상반되는 말 같지만

 ‘불가항력적인’이라는 표현이 덧붙여지면 비슷해져 버립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어찌보면 폭력적인 은혜를 경험하면서 당황해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당황함을 일으키는 상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뜻을 존중해 주지 않고, 나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듯한 그런 상황입니다. 

백부장이 지금 그런 꼴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다른 길을 찾을 수가 없어 납작 엎드려 

오직 긍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한 것이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믿음에 대해 칭찬하신 장면은 두 군데입니다. 

모두 다 이방인이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신보다 소중히 여기는 딸과 아들처럼 여기는 종의 목숨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감격하시어(?), 현장에 가시지도 않고 말씀만으로 그들의 딸과 아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자에게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셨고, 

백부장에 대해서는 기이히 여기시며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상황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상황이 어찌 비교가 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비슷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매정하게 멸시하며 거절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백부장의 초청에도 의도적으로 달가워하지 않는 표시를 내셨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마태복음에서도 다루고 있습니다(마 8:5-13).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직접 부탁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복음을 보니 사실은 유대인 친구들을 통해 부탁한 것입니다(3절).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인 로마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규례가 있지요. 

정결 규례 때문입니다. 부정한 사람과 접촉한 사람은 부정해지는 규례입니다.

길을 가다가 스치거나 떨어져서 대화하는 것 정도야 괜찮을지 모르지만 

병을 고치기 위해 이방인을 만나 그의 몸을 만지는 것은 부정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결 규례를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은 대부분 부정한 상태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콧대 높은 장로들이 처음부터 예수님께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눅 7:4-5절). 

이런저런 말을 하며 꼭 직접 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백부장이 유대인을 사랑하고 유대인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이라고, 

유대인의 율법도 잘 아는 사람이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설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태복음 8장 7절). 

이 말의 헬라어 문장은 주어가 강조된 형태입니다. 

그래서 “꼭 내가 직접 가서 고쳐 주어야 되는군” 정도로 고쳐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좀 튕기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주 꼬치꼬치 따지는 유대인의 장로들이 동행하는 가운데 있으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들으라고 일부러 이렇게 말씀하신 듯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백부장은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백부장과 유대인 목수의 아들은 신분 격차가 아주 크게 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백부장의 마음에 이런 불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내가, 백부장이나 되는 내가 이 정도로 숙였는데 어찌 이럴 수 있지? 

신적인 권능은 있는지 모르지만 인간성은 너무 아니네.‘

그러나 백부장은 이런 불만을 조금도 품지 않았습니다. 아니 감히 품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부랴부랴 사람을 보내어 집에 들어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만 해 주셔도 족하다고, 

자존심을 완전히 죽이고 엎드려서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언감생심 불만을 품을 수 없는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처럼 귀히 여기는 종의 목숨 앞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 앞에서,

이미 그는 겸비하며 애통하는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7:5-10절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큰 믿음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17:6). 그것은 무익한 종의 믿음입니다(17:10). 

자기에게 아무런 자격이 없음을 겸비하게 고백하며, 

예수님밖에는 아무 소망이 없는 자임을 인정하며, 

아무리 구박을 받아도 '예수님 아니면 안 됩니다.' 하고 매달리는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구유에 오신 아기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메시아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았다 하는 자들은 피하시고, 죽은 자에게는 굳이 찾아오셔서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인 성 과부를 만나는 장면은 의도된 연출입니다.

12절 상반절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 보라! 바로 그때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왔다.’ 

예수님께서 성문에 가까이 가신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라!”로 번역되어야 할 헬라어 ‘이두’의 번역이 왜 생략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죽어서 이미 멸망한 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도움을 받으러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자들을 예수님은 피하십니다.

반면에 절망과 애통 중에 자기를 살려 줄 유일한 소망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들은 일부러 찾아가십니다.

그들의 겸비함과 애통을 확인하시고 그것을 믿음으로 바꿔주십니다.

주님이 나에게도 이런 애통함과 겸비함이 있는지 확인하시면, 

나는 백부장처럼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애통함이, 이런 가난함이 있는 것이 복입니다.

나라가 잘살게 되고 소득 수준이 높아지게 되니 사람들에게서 애통함이 많이 없어진 듯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까지도 그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경제적인 풍요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애통함과 겸비함을 잃게 된다면 

그 풍요는 복이 아니라 독이 되는 것이겠지요. 

다행히도 주 하나님께서 제게 간난과 애통의 마음을 주셨네요. 

칭찬까지는 아니라도, 적어도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거절하거나 떠나지 않을 애통함은 주셨네요.

소경을 찾으시고, 앉은뱅이를 찾으셨던 주님, 

저를 더욱 가난하게 하시고 애통하게 하셔서, 

말씀으로 가까이 다가오실 때 더욱 간절함으로 받게 하옵소서. 

 

아멘!

 

1절

예수님은 말에 그치지 않으신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증거는 말과 행동의 일치에 있다.

 

2-3절

세상에서 멸시받는 자들을 존중하고, 미움받는 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종은 인격체가 아니라 주인의 소유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백부장은 자기 종을 사랑했습니다.

세상에 하찮은 사람은 없고 무시해도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군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박대하더라고 우리만큼은 그들을 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4-10절

남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에 찬사를 보내십니다.

이방인 백부장은 자기 종을 존중하고,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으며,

이방인 자신과 함게 있었다는 이유로 예수님이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집으로 오시는 수고마저 거두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한 믿음으로 그의 병든 종을 위해 간청합니다.

이 모습에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칭찬하십니다.

믿음은 주님의 주권에 대한 완전한 인정이자, 능력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며,

행위의 동기를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12-15절

우리가 겪는 슬픔에 가슴 아파하십니다.

죽은 과부의 아들을 매고 나오는 일행고 마추치시면서, 예수님은 과부의 슬픔을 비통해하셨습니다.

과부의 고달픈 삶과 미래이자 희망인 아들을 잃은 슬픔을 깊이 동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과 고달픈 현실을 아시는 분입니다(히 4;15).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심으로, 우리 삶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11, 16-17절

예수님 주위에는 제자들만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다수는 예수님 곁에서 보고 듣기만 할 뿐,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귀로 듣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는 '제자'가 아니라 '무리'에 불과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

백부장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

천성적으로 신을 믿고, 겸손하며,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었을까?

본문에서 깨닫는 것은 '믿음은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인정과 그분의 능력에 대한 전적인 신뢰 말이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백부장의 믿음을 이스라엘에서도 찾기 힘든 믿음으로 인정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 백부장처럼 행동해야 한다.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저리로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에 능력이 없는 것은, 생명력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로 다가오는데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문제이다.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아침이다.

 

과부의 애통함 앞에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이 있다. 

'불쌍히 여기시다'는 창자까지 뒤틀리는 슬픔이다. 

아들 하나만 의지하고 살아가던 과부에게 아들의 죽음은 어떤 감정일까?

그녀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미래의 희망도, 의지할 구석도 없다.

존재할 이유와 목적도 사라진 것이다. 

절망감, 애통함, 허무와 허전함, 슬픔, 무력감, 외로음, .....

무엇으로 그녀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리요.

그런 그녀를 아시고 주님은 의도적으로 나인성을 찾아오신 것이다. 

누가는 두 사건이 무슨 연관성이 있어 백부장 사건 뒤에 이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은 병으로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도, 과부의 독자 아들의 죽음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연약함과 죽음, 고달픈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의 관심과 시선이 이곳을 향한다면, 우리의 시선도 주님의 시선을 따라가야 한다. 

단순히 죽어가는 자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감탄만 하고 있는무리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던 그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제자의 삶이다. 

예수님의 그 시선과 마음을 따라 죽어가던 교회를 살리고자 신정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주님의 마음과 시선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한 복된 시간이었다. 

오늘도 초심을 잊지 말고 주님 따라서 열심히 달려가리라. 

 

성령이여 백부장처럼 인정받는 믿음을 갖게 도와 주시고

과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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