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한 영혼의 가치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3. 25. 09:46

본문 : 누가복음 15장 1-10절

 

한 마리 잃어버리 양에 대한 비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이다.

99마리 양을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고 찾는 목자의 심정,

잃은 양을 찾은 그 기쁨을 감당할 수 없어서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하는 모습,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한 사람의 회개로 더 기뻐하는 하늘 잔치 장면을 상상해 본다.

잃어버린 드마크마를 찾은 여인의 기뻐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한다. 

잃어버린 양과 같은 존재가 우리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들판에서, 계곡에서, 산비탈에서 헤메이는 목자를 생각해본다. 

어떤 심정일까? 아끼고 소중한 양 한 마리를  생각하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을 것이다.

히브리 목동들은 양 한마리 한 마리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어디서 낙오되었을까? 어디가 다쳤을까? 짐승에게 잡혀먹지는 않았을까?

무리와 떨어진 양은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워 떨고 있을까? 

혼자서 갈바 알지 못하고 어디를 헤메고 있을까?

양을  찾는 발걸음이 빨라졌을 것이다. 힘들고 지친 것도 잊었을 것이다. 

남은 99마리에 대한 염려도 내려놓았다. 

얼마 동안 찾고 찾았을까?

드디어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목동의 기쁨은 얼마나 컸을까? 

소리치며 달려가 양을 가슴에 들어 꼭 껴안았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기쁨을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 커서 벗과 이웃들을 불러 잔치까지 한다.

 

그 기쁨의 강도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보다 회개한 죄인 한 명의 기쁨이 더 크다고 ...

잃었다가 찾은 한 마리의 양처럼,

죄 가운데 있다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한 사람이 이렇게 귀하고 귀하다 말씀하신다.

 

만약 그 목동이 삯꾼 목자였다면 그렇게까지 찾아 수고하고 헤매였을까? 

양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성경에서 에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만세 전에 택하신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셨을 때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이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기쁘셨겠는가?

그 일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도 지시고 죽으셨던 분이 아니시던가?

그분의 사랑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다. 

본문의 목자처럼 참으로 집요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잃어버린 양은 구원에 관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무리에서 이탈한 잘못을 범했고, 자신의 신병에 어떤 위험과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내몰려있다.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와 걱정이 온 몸을 경직시켰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빠져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양의 구조는 전적인 목자의 은혜였다.

잃어버린 양같은 존재가 우리가 아닌가?

아무 공로 없이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임을 절실하게 깨닫는 아침이다.  

제 길로 가다가 길을 잃어버린 양을 향해 아무런 책망도, 어떤 탓도, 매질도 없었다.

단지 찾은 것에 대한 기쁨과 잔치만 기록하고 있다. 

양을 향한 목자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모든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릴 뿐이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고...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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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사랑, 하늘의 기쁨]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으신다.

세상은 대량화와 효율성의 방식을 선호한다.

다수를 위해 하나쯤 희생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하늘의 방식은 사뭇 다르다.

다수의 가치와 하나의 가치가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세상의 계산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계산방식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다수의 인류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만일 이 세상에 나 한 사람만 존재했어도 주님은 주저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것이다.

한 영혼을 위한 집요하고도 끈질긴 그 사랑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한 영혼으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기쁨은 세상의 계산법을 초월하여 손해 보는 소비를 하게 만든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되찾은 양 한 마리 때문에 그보다 더 큰 소비를 하는 동네잔치를 열고,

다시 찾은 동전(드라크마) 하나로 인한 기쁨을 나누기 위해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비용을 지출하면서까지 잔치를 벌이는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기이한 사랑이다.

이 어리석어 보이는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한 기쁨이 오늘도 주님을 춤추게 한다. 

그 사랑을 받은 나는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

세상의 기능적 사랑에 상처받고 지쳤는가?

나를 향한 그분의 기쁨과 사랑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 보자(습 3:17)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그릇된 자부심은 '분리 의식'을 낳는다.

그 결과 특정 사람들을 죄인으로 분류하고 배척한다.

하지만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용서받은 죄인들이다.

'의인'의 자격을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로 얻은 것이다.

자신이 '돌이켜야 할 죄인'임을 인정해야 참된 거룩함, '연대 의식'과 '참여 의식'이 생긴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죄인의 돌아옴을 기뻐하는 사람인가?

 

한때 잃어 자였던 나를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날마다 기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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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식적이지 않은 예수님의 사랑 ]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비상식적인 논리를 펴시는데,

예수님의 감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그 논리를 수긍할 수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립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변론이 좀 궁색(?)합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으러 다니지 않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펴십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되는가요?

어떻게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내팽개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나섭니까?

아흔아홉 마리를 우리에 안전히 데려다 놓고 난 다음이면 몰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혹시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납득이 되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십니다. 

계산이 빠른 바리새인들은 이 첫째 비유를 들으면서 웃었을 것입니다.

 ‘1마리 양 때문에 99마리 양을 팽개쳐? 

허허벌판에 99마리를 놓아두고는 1마리 찾는다고 온 천지를 헤매고 다녀? 그런 바보가 어디 있냐? 

그러다가 늑대라도 나타나서 양 무리를 습격하면 어쩌려고?

1마리 땜에 열 마리, 스무 마리를 잃을 수 있는 바보 같은 짓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다니...?’

그 다음 비유는 드라크마 한 개 잃어버렸다고 난리를 치는 이야기입니다.

1드라크마는 노동자 1일 품삯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꽤 되는 돈이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 난리를 칩니까?

찾을 때까지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1드라크마 찾았다고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입니다.

잔치 비용이 몇 배로 더 들었겠습니다.

단지 잃어버린 돈을 찾았다고 잔치를 벌이며 그 돈보다 몇 배의 돈을 쓰는 것이 상식적입니까?

물론 이 열 드라크마를 결혼 패물로 설명하면 약간 수긍이 갑니다. 

그렇다 쳐도 동네 사람 다 불러서 잔치까지 벌이는 것은 좀 지나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비유들은 머리로 들어서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슴에 품었던 한 영혼이 떠나간 빈자리 때문에 헛헛한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셨네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사방으로 헤매고 다니는 목자의 마음으로,

드라크마 하나 잃어버리고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는 여인의 마음으로 표현하셨네요.

예수님께는 양 한 마리가, 드라크마 하나가, 

영원 전에 가슴에 품었던 한 잃어버린 영혼의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 

집 나간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저녁 늦게 돌아다니는 아이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듯이 말입니다.

이성적으로, 계산적으로만 따져보면 하나님께 한 영혼의 가치가 뭐가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새로운 영혼을 만들어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가 없어졌다고 해서 부족하거나 아쉬울 이유가 없습니다.

[말라기 2:15]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런데 얼마든지 새로 만들어내실 수 있고 얼마든지 대체할 다른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영혼을 잊지 못하십니다. 포기하지 못하십니다. 

계산상으로는 별 것 아니라고 여길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포기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한 영혼을 이렇게 사랑하실까요? 한 영혼에 이렇게 집착하실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한 영혼을 영원의 시간 동안 품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남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여 예수님께 맡긴 한 영혼을 

단지 그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가슴에 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베소서 1:4절 말씀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택한 백성은 창세 전에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창세 전에,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 안에 품고 계셨습니다.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계속 품고 있었던 우리 각자는 예수님께 얼마나 애틋한 존재이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이 왜 차이가 날까요? 

요즘은 아이를 아버지가 키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아빠가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아이를 엄마가 뱃속에 열 달 동안 품고 있다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속에 품고 있었던 그 시간을, 그 정을, 그 애틋함을 아빠는 어떤 노력과 시간으로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해 이런 엄마의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제자들도 느꼈기에 

그렇게 강하게 야단치고 창피하게 만드셨어도 계속 예수님을 따랐던 거네요. 

예수님의 이 마음을 나도 가질 수 있기를,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마음 주시기를... 

그 마음 가진 인생이 가장 존귀한 인생임을 믿기에 그렇게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해산하는 수고입니다. 잉태하는 수고입니다. 

한 영혼을 잉태하고 해산하는 수고가,

우리로 하여금 정말 그 영혼을 가슴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갈라디아서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만들어주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도 가지게 해 주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해산하는 수고와 잉태하는 고통 없이 그런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이 사랑 가진 자가 하나님께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에게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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