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좁은 문, 좁은 길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3. 21. 09:29

본문 : 누가복음 : 13장 22-35절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한다.

"주여 구원을 받을 자가 적으니이까?"

의외의 대답을 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어서 비유로 말씀하신다.

주인이 문을 닫아버리면 후에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하여도 모른다 하리라

과거에 주님에게 듣고 배우며 함께 먹고 마시던 사람이라고 친분을 내세우지만

주인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행악자들아 떠나가라고 하신다.

쫓겨난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고 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고 덧붙히신다.

 

바리새인들이 와서 헤롯 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고 일러주자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는 죽는 법이 없다고 하시며 예루살렘행의 발길을 이어가신다.

자신의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아시는 주님이

자신을 배척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시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이다 할 때가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신다.

 

신앙생활하면서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단어 들 중에 하나가 '좁은 문', '좁은 길'일 것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쉽고 편한 길이 아님을 지적하는 말이다.

회개는 가던 길을 뒤돌아서 가는 것이다. 180도 방향 전환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고 제자의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일이다.

삶의 목적이 다른 길이다. 대충 해도 되는 길이 아니다. 

값싼 은혜론에 빠져 예수님이 모든 것을 그냥 다 이해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주실 것처럼

태평하게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제자의 길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이다.  

 

늘 궁금한 질문중의 하나를 오늘 질문하고 있다.

구원받을 자가 얼마나 될까? 나는 그 구원의 반열에 속한 자인가?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위해 걸어가는 길 위에 있는 상태이다. 

늘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도 아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이다. 

구원의 성취와 구원의 완성 사이를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실제적인 모습이다.

이 길은 좁은 길이다. 들어가는 문도 좁고 걸어가는 길도 좁다.

습관처럼 배인 자신의 종교생활이 구원을 보장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언젠가 비그리스도인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고 ...

어쩌다 생각나면 절에 가서 시주나 불공 드리는 불자들과는 다르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으로 가는 길이다.

한번 십자가를 지는 일도 엄청난 일인데,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다.

그런 길임을 알고 그 문을 들어서야 한다. 그래서 좁은 문이다.

그래서 그  문을 들어서는 자들이 적은 것이다.

진정 좁은 문, 좁은 길은 그런 길이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냥 따라오라고, 맘 편하게 따라 오라고 하지 않으셨다.

뭐 그리 힘들지 않은 길이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문, 가고 싶은 길은, 넓은 문, 넓고 평탄한 길이다.

편한 길, 쉬운 길, 안전한 길만 추구하는 것이 죄악된 인간의 모습이다. 

문이 넓어서 들어가기도 쉽고, 특별한 제한이나 조건도 없어야 한다.

들어가는데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없다.

그 길은 넓고 평탄해야 한다.

위험하지도 않고, 장애물도 없어야 한다.

마음대로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고, 가기 싫으면 포기하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좁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한쪽에서는장로가  되어서 그 길을 가야하지 않겠냐고 부추키는데,

또 한편에서는 힘들다고 다른 길로 가면 안 되겠냐고 유혹한다.  

내 안에 끝없는 싸움이 계속된다.

언제쯤 이런 갈등 없이 한마음으로 묵묵히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완주할 수 있을까?

성령의 도움 없이는 힘들겠다는 탄식이 나온다.

나는 죄와 허물이 참 많은 연약한 존재다.

나의 어떠함만으로는 이 길을 완주할 자신이 없다.

오늘도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이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없다.

 

성령이여 이 길을 완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연약한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고 힘과 능력을 주셔서

그 부어주신 은혜로 잘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길 끝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고 당신이 영접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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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은 분명한 목적을 품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다.

그곳에서 죄인들을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남으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실 것이며,

껍데기만 남은 성전 대신 참 성전이 되실 것이다.

주님이 이 일을 성취하시면 예수님을 거부한 예루살렘은 무너질 것이고,

그 대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찬송하는 곳곳이 새 예루살렘으로 세워질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헤롯 같은 권력자라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을 막을 수 없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가 있을 거라 하신다.

먼저 부름받은 유대인들이 구원역사의 중심부에 있었지만,

그 영적 특권과 자부심은 좁은 문을 대신하지 못한다.

오히려 주변부에서 헤메다 나중에 주님을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간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출석한 지 오래되었더라도

피상적인 지식에 머물고 관습적인 종교행위만 일삼는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걸음이 없다면,

아무리 신앙의 연수가 길다 해도 주께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내일에 관심을 두려 한다.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오늘에 있다.

'내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는지를 신경쓰기보다는,

'오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신다.

좁은 길로 가는 '오늘의 걸음'이 구원이라는 '내일의 도착지'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은 영원히 열려 있지 않다.

언젠가 그 좁은 문이 닫히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주님의 거절을 경험할 것이며, 그 나라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인생의 유한함과 한시적인 기회를 자각하고 늦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리로 초대받은 지금이

"은헤 받을 만한 때이고 구원의 날"(고후 6:2)이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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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사람이 적은 문, 좁은 문 ]

잔소리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니 협박까지 하십니다.

경고를 하시다 못해 협박을 하십니다.

구원의 문이 닫힐 수 있다고요. 문이 닫힌 후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다고요.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우면 그러실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이 마음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공감하면 좋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의 의미는 어렵고 힘든 관문이라는 뜻보다는,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이 적은 문’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구원받는 자가 적으냐는 질문의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는 자가 소수인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셨고,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많고, 기독교 인구가 많은데도 구원받는 자가 적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좁은 길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 그냥 다들 살아가는 방식으로 모나지 않게 살다가,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그렇게 정신줄 놓고 있다가, 

문이 닫힌 후에 때늦게 두드리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은 문이 닫힌 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과 내일은 기회가 있지만, 제 삼일에는 끝을 낼 것이라 하십니다. 

심판의 준비가 끝나고 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눅 13:32 표준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한 방종을 허용하는 그런 자비가 아닙니다. 

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법이 없으면 자비도 자비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용서하시고, 넘치게 관용하시지만, 

반드시 엄격한 잣대로 시비를 가리는 때를 두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사랑 되게 만드십니다.

만약에 형벌이 없이 끝까지 용서만 하신다면, 모든 죄에 대해 무조건 용서해 버리신다면, 

그 용서는 무의미한 용서가 되어버립니다. 당연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죄가 죄가 아닌게 되어버립니다.

법이 있어도 형벌이 없다면, 심판이 없다면, 법은 무의미해집니다. 

법이 무의미해지면 죄도 무의미해집니다. 

그렇게 될 때 용서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죄가 없는데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겠습니까? 

자비를 베푼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만약에 형제를 돌보지 않거나 해치더라도 

아무 손해(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가 없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무가치한 일이 됩니다. 사랑은 오히려 쓸데없는 간섭에 불과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법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반드시 형벌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말할 수 없이 그 마음이 아프시면서도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진짜 문이 닫히기 전, 문이 닫힌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은혜를 거두시는 은혜입니다.

아하스의 할아버지 웃시야(아사랴) 왕이 죽던 해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 6:9-12]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말씀이 들리지 않고 기도가 되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를 못하겠는 때가 있습니다. 

말씀에 아무 관심이 생기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은혜를 거두시는 은혜를 발동하셔서 그렇습니다. 

이 은혜를 경험할 때, 정신차려야 합니다.

이 은혜마저 무시하면 그다음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눈으로, 손으로 확인하게 해 주시면 잘 믿을 수 있을텐데...’ 하며 아쉬워합니다. 

확인하고 나서 반응하면 이미 늦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인한 자들이 내놓은 반응을 무가치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시는 마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듣고 믿는 믿음, 말씀에 의해 생긴 믿음입니다.

구원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이 아닙니다. 

적은 무리의 사람들만 가는 길입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가 잘 가지 않을 때, 말씀이 잘 믿어지지 않을 때,

특히 경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이 깨달아지게 해 달라고, 말씀이 믿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남들이 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면 망합니다.

좁은 문으로 난 길, 이 길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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