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눅4ㅏ복음 23장 26-43절
Via dolorosa, 고통의 길, 고난의 길을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르셨다.
피 흘리며 힘들게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며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다.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못 박히고 달리셨다.
좌우 두 행악자와 함께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셨다.
무리들의 조롱이 쏟아진다.
네가 그리스도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자신을 구원하여 능력을 보여라.
군인들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 조롱한다.
두 행악자의 극명한 대조의 장면을 대한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여 당신의 하나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인생의 마지막 죽음 앞에서 보이는 두 행악자의 모습을 보면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떠오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새벽 기도회 시간에 본문의 3 장면을 말씀하셨다.
애통하며 우는 여인들, 조롱하는 사람들, 십작가에 달린 강도의 고백이다.
모두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십자가 앞은 진실의 거울 앞에 선 모습과 같다.
십자가 앞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는 화인 맞은 심령이리라.
나는 지금 이 새벽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세상의 왕과는 180도 다른 진짜 왕 앞에선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오늘도 나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눈물로 세리의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
진정 애통하는 심령으로 비우고 내려놓지 못하고,
채우려고 하고 내려놓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는 것들로 인하여 울고 또 운다.
그런 울산신정교회가 아닌가 하여 운다.
내가 지고 올라가야 할 골고다 언덕길
내가 못 박혀 달려야 할 십자가
난 오늘도 그 십자가에서 죽었는가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도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다.
성령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십자가의 신비, 부활의 신비를 깨닫는 은혜를 내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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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을 사하여 주소서]
고난보다 사명에 집중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 많은 무리;가 따닸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그들에게 "내가 아닌 너희를 위하여 울라"고 하시며,
후에 예루살렘에 닥칠 일로 고통받을 사람들을 더 불쌍히 여기신다.
고통 중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진정으로 사명을 다라 사는 사람은 바로 그때도 타인을 향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
나는 현재의 고난에 집착한 나머지 세상을 위로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잊고 살지는 않는가?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좌우에는 사형을 선고받은 두 행악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비록 죄가 없으셨지만(히 4:15),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셔야 했기에(갈 3:13)
흉악한 죄인의 자리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까지 가셨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가시지 못할 자리가 있겠는가?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주님은 그곳에, 내 곁에 계신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은혜의 시작이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은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그 일로 그의 인새이 바귀었고,
후에 그의 아들 루포는 교회의 중요한 일꾼이 되었다(막 15:21, 롬 16:13)
억지로 멘 십자가도 은혜의 통로가 된다면, 자원하여 지는 십자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늘 내가 주님의 남은 일을 위하여 져야 하는 십자가는 무엇일까?
군병들은, 고문을 당하는 중에도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고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도 가장 곁에서 예수님을 보았지만,
그들은 희롱하고 비방하면서 구원받을 기회를 놓쳤다.
반면에 십자가에 달린 다른 한 사람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의지하여 낙우너을 허락받았다.
회개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
다만 구원은 바로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는 사람에게만 베풀어지는 은혜이다.
구원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있음을 기억하며, 끝가지 주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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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의 십자가, 능력의 십자가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부터 너무나 많은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같이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들과는 형편이 달랐습니다.
그들과 달리 예수님은 밤새워 심문을 당하고 군병들에게 희롱까지 당하며
체력이 바닥이 난 상태에서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출발하였습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운반해야 했습니다.
기진맥진한 가운데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때 무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지쳤을 때는, 힘들 때는, 아플 때는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짜증이 나는 법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절).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아가페의 사랑이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하나님의 특별하심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나지 않았으면 제게 좋을 뻔하였을 인간들의 멸망을 내다보고 안타까워하시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 그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남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안식을 포기하시는 희생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이십니다.
사랑이 크신 만큼 진노도 그만큼 클 것이기에
그 진노를 감당해야 하는 멸망의 자식들을 생각하며 예수님은 너무도 안타까우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쳐다보며 슬피 우는 여자들을 향해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28-31절)
예수님은 어떤 조롱과 멸시 가운데서도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포기할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 멸망의 자식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포기할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인 십자가를 포기할 수 없으셨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가 주님께는 영광이요 보람이며 보물입니다.
행악자 중 하나가 이 영광을 알아보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의 희생과 아가페를 그가 알아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도 다른 행악자와 똑같이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했습니다(마 27:44).
그러다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아가페 사랑의 실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조롱과 멸시의 십자가가 그에게는 이제 영광의 십자가로 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받으시는 그 조롱과 멸시에 동참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멸시받고 조롱받으며 죽어가는 그 분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곧 하나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은 기뻐하며 그를 자신의 영광의 나라에 받아주셨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는 예수님, 자기를 구원하시지 않는 예수님,
얼마든지 벗어날 능력이 있으면서도 비웃음과 조롱과 모욕을 받는 그 자리에 계속 남아 계시는 예수님,
나는 이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가?
힘이 있어도 핍박과 모욕을 묵묵히 받으며, 나아가 핍박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며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을 나는 진정으로 영광스러워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다 조롱하고 멸시하는 십자가를 나는 영광의 십자가로, 생명의 십자가로 여기는가?
한 행악자는 서슴지 않고 그렇게 하였는데...'
오 주님, 한 행악자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제게도 주옵소서.
십자가의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그 십자가를 영광스러워 하며,
오직 십자가만이 생명임을 고백하고 자랑하는 믿음에 확실히 이르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습니다.
강도를 단숨에 무릎 꿇린 십자가의 능력, 그 능력의 십자가에 동참하며
그 십자가만을 전하는 믿음의 전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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