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성장은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부흥 운동은 회개를 통해 일어났다.
사경회를 통해 말씀을 알아가는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한 순종이었고,
죄에 대한 통감이었으며, 서로에게 대한 고백과 용서와 회해의 장이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 영적으로 각성되어 더 이상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에
그 자리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사회에 대한 신뢰가 되어, 한국 교회는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신뢰를 상실해 버렸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복음을 오해하기 대문인가?
그렇지 않다 !
사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복음에 대한 인식이 없지 않다.
예수님에 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공교육 시간에도 각 종교를 비교하며 기본 교리를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지 못해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한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러면 한국 사회가 상실하고 신자 수가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물질 만능주의와 개인주의, 왜곡된 칭의에 따른 잘못된 구원관,
이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는 실천론적 무신론에 의해 잠식 당하고 있다.
이런 현상의 당연한 귀결은 한국 교회의 신뢰성 상실이다.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이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실망에 따른 신뢰성 상실이다.
당신의 인격이 너무 크게 소리치고 있어서 당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위의 말처럼 한국 교회의 행태가 너무 크게 소리치고 있어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한국 교회의 대 사회적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쇄신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 속에서 교회의 사명, 즉 전도와 선교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신뢰를 회복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마 16:24)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바울서신 등 말씀의 원리를 따른 것이 "십자가를 본 받는 삶"(Crucifotmitry)이다.
말로써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대로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 삼위 하나님을 볼 때,
우리는 점진적 계시를 통해 나타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선명히 보게 되고, 우리 신앙을 공고히 하게 된다.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에 따른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성부 하나님을 만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모든 관계에서 회복하고 화해하게 하신 성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살게 하심으로
믿음의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시을 받는다.
십자가를 통해 삼위 하나님을 만날 때,
기독교의 핵심 가치이자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덕목인
믿음과 사랑과 능력과 소망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십자가를 본받는 믿음, 사랑, 능력,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구체적인 실천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십자가를 본받는 삶으로의 믿음의 결단을 드리도록 한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따라 응답하는 근본적 선택이자 순종이기에
우리의 믿음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않는다.
은혜를 따른 응답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로,
십자가를 본받는 삶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패턴으로 나타나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의 패턴을 따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 속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그것은 철저히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이런 십자가를 본받는 삶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베푸신다.
분명히 말하지만 능력의 목적은 사랑이다.
십자가를 본받는 삶의 능력은 한국 교회가 그동안 보여 왔던 카리스마나, 은사의 차원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즉 약함을 통해 나타나는 역설적인 능력이다.
그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랑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 능력은 철저히 온유하며 겸손하게 만든다.
능력으로써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삶에 발생하는 모든 고난과 환난은 인내와 연단을 낳는데,
이는 곧 십자가를 본받는 삶의 소망으로 연결된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죽음-부활이라는 패턴과 굴육을 당함-높이 들림이라는 패턴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현재적 믿음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다.
이런 소망은 결국 믿음과 사랑과 능력의 삶의 동력이 되고,
현세에서 앙갚음하거나 보상받으려는 반신앙적 형태를 상쇄하고 화해와 화목을 이끌어 낸다.
십자가를 본받는 삶의 순종을 통해 믿음, 사랑, 능력, 소망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믿음 , 사랑, 능력, 소망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모여 십자가를 본받는 삶의 공동체를 이룬다.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참여적, 실천적 영성으로써 공동체성을 띠기 때문에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연합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본받는 삶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가족을 이루고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하나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기에 우상들을 향해서는 배타적이지만
이웃에 대해서는 심지어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으로 대함으로 포용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인되셔서 다스리기에 누구나 차별이 없고 참여를 통해 서로를 세워주는 공동체다.
또한, 빛과 사랑을 전하는 사신으로, 평안과 안전을 전하는 왕의 전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십자가를 본받는 삶으로 복음을 주해하여, 말이 아닌 삶으로 세상에게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 다시 복음으로, 다시 말씀으로,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를 본받는 삶으로의 결단을 통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점검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돌아본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함께 꿈꾸며 소망하며 협력하여 그 사랑을 실천하기로 결단한다.
우리의 결단에 하나님은 능력을 더하신다.
신뢰 회복과 전도는 불가분의 관계다.
이제 한국 교회가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부흥을 꿈꾸게 되기를 소원해 본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을 구원 받게 하라(고전 10:33)
전도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십자가를 본받는 삶, 곧 믿음, 사랑, 능력, 소망이다.
.........[십자가를 본받는 삶], 손영호 지음 에서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