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조용히 내린다.
하양게 피어나던 이팝 나무 위에도
흰색과 붉은 색 연분홍빛 철축과 연상홍 위에도 소리 없이 내리고 있다.
멀리 동대산은 안개에 가려 자취를 감추었다.
인터넷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봄비에 내 마음은 감성에 젖어 자판을 두들기게 한다.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데
봄비를 바라보다가 알 수 없는 곡조를 흥얼거리고 있다.
나에게 비는 늘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감성에 젖게 만드는 촉매제다.
어릴 때 방문 앞 마루에 걸터 않아 바라보았던 초가 지붕 처마에서 떨어지던 빗 방울을 잊을 수 없다.
음악도 모르는 나에게 오케스트라 연주만큼이나 좋았다.
무심히 떨어지는 빗 방울과 흙 바닥에 튕겨 오르는 물방울들을 바라보곤 했었다.
학창 시절에는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비가 좋았다.
한 참을 바라다보면 울컥 하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했다.
이런 감정을 카타르시스라고 불러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런 감정이 좋다. 그런 상황이 좋다. 그래서 그런 분위기에 젖어 든다.
돌아보면 그런 것들이 쌓여서 날 감성이 풍성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나보다.
여름 날 장대비처럼 쏫아지는 비도 좋았다.
들에서 어머니 일손을 도와 드리다가 그냥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으며 돌아오는 길도
왠지 모르는 시원함, 후련함, 상쾌함 감정들이 마음을 풍성히 채워주던 것을 기억한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그 비 속을 걸어본 자만이 느끼는 감정이 있다.
묻힌 것들이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고1 때 국어시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운동장을 걸어가는 한 여성이 있었다.
학교 교무실에 일하던 아가씨가 우산을 바쳐들고 걷고 있었다.
무심결에 입에서 튀어 나온 한 마디 했다가 천박하다고 핀잔을 받았지만
그런 장대비는 어떤 장엄함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에게 비는 늘 정겨운 친구와도 같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입안 가득히 머금는다.
연두빛 세상이 푸른 신록의 계절로 건너가게 재촉하는 비다.
먼지와 송화가루로 얼룩진 차도 조금은 씻겨가겠지.
교회와 병원 일로 답답한 마음도 조금은 씻겨가기를 소망한다.
봄 비 내리고
흐르는 크래식 피아노 연주 소리에 지긋이 눈을 감는다.
익숙한 멜로디에 귀를 쫑긋하고 집중을 한다.
은퇴한 날이 31개월 남았다.
32번의 봉급을 받으면 근무하던 병원을 떠나야 한다.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말년 병장처럼
32년째 근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오버랩 해 본다.
목련이 피면 군의관 군복을 벗는다고 봄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의무대 앞에 피어 있던 목련이 화사하게 피고 지면 40개월 군의관 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저 창가에 심겨진 동백꽃이 앞으로 두 번 피고 지고
그 옆자리를 차지한 연산홍과 철쭉이 피고 지며.
가로수 이팝 나무 하얀 봄 눈이 거리를 밝히고
주차장 옆 도로 은행나무 노랗게 물들었다 낙엽되어 거리에 뒹굴고
느티나무 단풍이 지고나면
이 진료실을 떠나야 한다.
언젠가 진료실에서 봄 비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있던 날을 기억하겠지.
그렇게 60 중반의 사내는 글을 쓰고 있었다고 ....
인우와 인서가 이 글을 읽다가 할아버지는 비를 많이 좋아하셨던가 보다라고 말할까?
사랑하는 외동 딸 신혜가 눈물이 많은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까?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아내는 또 눈물을 흘린다고 핑잔을 주겠지만 말이다.
봄 비가 내 마음에 소리 없이 내린다.
저 심연 깊숙히 흘러 간다.
봄 비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