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6장 4-13a 절
구구절절 사랑하는 아내를 향하여 모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노래한다.
나는 지금까지 아내를 이렇게 표현해 본 적이 있었던가?
주님을 향하여 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해 본 적이 있었던가?
변치않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두 연인을 묵상한다.
사랑의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한결같이 이러하였다.
항상 사랑이 식고 어긋나고 비틀어진 것은 우리의 사랑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렸을 것이다.
절기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였을 것이다.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내어 주신 그 사랑을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본 받으라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다. 요구하신다.
이것이 좁고 험한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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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전한 사람 ]
우리를 그 어떤 것보다 특별하게 여기며 사랑한신다.
남자는 오아궁에 아무리 아리따운 여인들이 많아도 자기 사랑은 단 한 사람, 아내뿐이라고 한다.
아내만이 자기에게 완전하고 유일한 사랑이라고 고백한다.
왕궁의 여인들도 자기의 아내를 보면
눈부시게 청초하고 기품있는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을 것라고 확신한다.
그는 임금이 되어 모든 것을 얻는 것보다 아내를 얻기를 원한다.
이런 남자의 모습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모습이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땅으로 내려오신 까닭이 바로 사랑하는 나를 얻기 위함이었다.
주님께 우리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다.
남자는 아내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아내의 기품은 성읍들고 군대처럼 장엄하고, 아내의 눈은 마추치기 힘들 정도로 위엄 있다.
이어서 아내의 머리카락, 치아, 뺨의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찬사는 첫날밤에 들려준 고백과 다르지 않다.
아네의 눈짓 한 번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첫날밤에 아내를 어여쁘게 보았던 남편의 시선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하다.
아내가 변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이 변하지 않은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더는 사랑스럽지 않다면,
나의 사랑이 변하지 않았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하기는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여자는 자기 남편이 있을 것이라고 믿음 동산으로 내려갔다가.
기쁘게도 그들의 관계에 다시 봄이 찾아왔음을, 사랑을 나눌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자석에 이끌리듯 남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친구들이 '돌아와서 자기들과 함께 있자'고 하지만 여인의 몸과 마음은 이미 남편에게 다다랐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남편에게 달려간 여인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른 일을 멈춰야 할 때가 있다.
사랑을 위한 시간은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주님에게 또한 배우자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이 있을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변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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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가 6:1-13a>
(친구들)
1. 여인들 가운데서도 빼어나게 아리따운 여인아, 너의 임이 간 곳이 어디냐?
너의 임이 간 곳이 어딘지 우리가 함께 임을 찾아 나서자.
(여자)
2. 나의 임은, 자기의 동산, 향기 가득한 꽃밭으로 내려가서, 그 동산에서 양 떼를 치면서 나리꽃을 꺾고 있겠지.
3. 나는 임의 것, 임은 나의 것. 임은 나리꽃 밭에서 양을 치네.
(남자)
4. 나의 사랑 그대는 디르사처럼 어여쁘고, 예루살렘처럼 곱고, 깃발을 앞세운 군대처럼 장엄하구나.
5. 그대의 눈이 나를 사로잡으니, 그대의 눈을 나에게서 돌려 다오.
그대의 머리채는 길르앗 비탈을 내려오는 염소 떼 같구나.
6. 그대의 이는 털 깎으려고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이 희구나.
저마다 짝이 맞아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7. 너울 속 그대의 볼은 반으로 쪼개어 놓은 석류 같구나.
8. 왕비가 예순 명이요, 후궁이 여든 명이요, 궁녀도 수없이 많다마는,
9. 나의 비둘기, 온전한 나의 사랑은 오직 하나뿐. 어머니의 외동딸, 그를 낳은 어머니가 귀엽게 기른 딸,
아가씨들이 그를 보고 복되다 하고 왕비들과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10. 이 여인이 누구인가? 새벽처럼 밝고, 보름달처럼 훤하고, 해처럼 눈부시고, 깃발을 앞세운 군대처럼 장엄하구나.
11. 골짜기에서 돋는 움들을 보려고, 포도나무 꽃이 피었는지 석류나무 꽃송이들이 망울졌는지 살펴보려고,
나는 호도나무 숲으로 내려갔다네.
12.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어느덧 나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왕자들이 타는 병거에 올라앉아 있네.
(친구들)
6:13a. 술람미의 아가씨야,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
눈부신 너의 모습을 우리가 좀 볼 수 있게, 돌아오너라, 돌아오너라. 술람미의 아가씨야.
진실한 사랑이 확인되면 상황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건이나 문제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문제입니다.
부족한 것도, 성격이 괴팍한 것도, 사랑하면 다 용서가 됩니다.
이 사랑의 기초는 자기 부인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과 우리의 결혼은,
사람이 남녀처럼 서로 대등하게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고 그에 붙은 지체요 종으로 맺어지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의 바탕이 되는 것이 자기 부인의 믿음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위하여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사랑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사랑 앞에서 모든 자존심을 다 죽일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세례를 받을 때,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10:1-2]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우리는 자신을 예수님께 속한 자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께 딸려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겠다는 고백이 세례의 고백,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
이 찬양은 세례 고백 찬양입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은 하나 됨을 이룹니다.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일방의 복종과 희생이 필수적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기 부인의 믿음입니다.
나는 임의 것(나는 임에게 속하였고), 임은 나의 것(임은 나에게 속하였습니다).
이 고백으로 다 풀렸습니다. 서운했던 마음, 야속한 감정, 들끓었던 분노... 모두 사그러들었습니다.
실제로 서로가 다시 만나 화해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을 아직 하지 못하였지만(6:13a),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이전보다 더욱 놀랍고(5절), 완전하며 유일한(8-9절) 사랑이 고백 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 또 우리 성도 간의 관계가,
때로 아름답지 못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의 사랑이 완전하며 유일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아직은 우리의 믿음이 완성되지 못했고 아직 우리가 죄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이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믿음이 완전해질 것입니다.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자존심 죽일 때까지, 자기 부인의 믿음이 확고해질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리십니다.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하시며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주님의 이 사랑 앞에서 우리는 자존심 얼마든지 죽일 수 있습니다.
실수한 것 때문에 너무 부끄러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관계를 잘 실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 때문에 실망하거나 낙망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관계는 단지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관계가 아닌 임시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연습하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앞에서 체면과 자존심 내세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 자기 부인의 믿음이 분명하다면,
우리의 사랑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의 믿음과 주 예수님의 끈질긴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기필코 완성할 것입니다.
믿음이 분명하다면, 믿음에 바탕을 둔 사랑의 고백이 분명하다면,
관계의 완성도가 부족하다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존심에 너무 목을 매지 않는 지혜를 여기 아가서에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실수를 자기 부인의 믿음과 사랑으로 덮어가는 두 연인의 모습을 통해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랑 예수님은 우리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우리의 자존심이 우리가 신랑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술람미 여인처럼 자존심 팍 꺾고 죽으나 사나,
내 자리는, 내 소속은 예수님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편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자존심을 내세웠다면 아마 그순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훌륭한 점이 이 부분입니다.
면목 없어서 고개 숙인 채로, 자존심 다 죽이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주님을 일시적으로 떠났지만, 결코 영원히 떠나지는 않은
베드로의 고백을 나도 되뇌며 힘을 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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