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말이다.
뭐라해도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 고향이다.
지치고 힘들 때 의자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어릴 때 고향 산천이다.
생각할 수 있고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고향은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평안을 가져다 주는 묘약이다.
실향민들이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에게는 귀소 본능이 있다.
이민자들의 뿌리를 찾는 노력, 연어의 회귀본능을 보면 알 수 있다.
명절이면 그 힘든 여정에도 불구하고 수천 만명이, 수천 만대 차가 고향을 찾아 이동한다.
그래서 고향은 엄마 품속 같은 곳이다.
내 고향은 산들로 둘러쌓여 있던 산간 벽촌으로 농촌 시골마을이었다..
기차도 고속도로도 없고 두 세시간 마다 한번씩 시외버스가 운행되는 곳이었다.
내가 태어난 집은 전형적인 초가집이었다.
본채는 일자형으로 초가 지붕에 부엌, 안방, 광으로 쓰인 중간방과 건너방으로 이루어졌고
기억자 형태로 붙은 아래채에는 땔감이나 각종 농기구가 들어가는 공간과 외양간
그리고 퇴비를 저장해 두던 헛간과 화장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중에 벽은 없는 양철 지붕 창고를 대문 옆과 부엌 옆으로 지었다.
그렇게 적지 않은 마당과 부엌 앞에 수도가 있었고, 본채 뒤로는 장돗대가 있었다.
뒤집과 옆집은 돌담으로 그리고 북쪽과 동쪽은 골목길과 접해 있었고
돌로 된 담이었으나 새마을 운동 때 브로크 담으로 개조되었다.
처음 브르크 담을 세울 때 브로크를 찍어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브르크는 크게 세 개의 구멍이 있어서 시멘트를 깔고 브로크를 세운 뒤,
구멍에는 자갈 등을 채웠고 맨 웨에는 유리 조각등을 꼽아 두어 도둑 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던 기억이 난다.
문은 양철대문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큰 누님과 어머니는 벼를 수확하고 남은 볏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빛과 비에 바랜 지붕을 매년 새롭게 단장했다.
보통 하루 일과가 끝나고 밤 시간을 이용해 만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지붕을 새롭게 하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으나 남자가 없던 우리 집안은 어머니와 누나의 몫이었다.
그래도 하루 날을 잡아서 동네 남자 어른들이 이엉을 교체하던 모습을 보곤했다.
옛 이엉들을 걷어내다 보면 뱀도 나오고, 겨울에는 참새들의 둥지가 되기도 하고
처마 밑에는 봄이면 제비가 와서 집을 짖고 새끼를 낳아 기르고 가을이면 강남으로 떠나가곤 했다.
한겨울 눈이 오면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모습은 정겹고
햇빛에 고드름이 녹아 떨어지는 낙수에 땅바닥에는 작은 구멍이 생기고 작은 실개천(과장)이 만들어진다.
마루에 앉아 조용히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의 교향곡을 감상하는 시간이었다.
가을이면 지붕에는 둥글게 익어가는 하얀 박들이 얹혀있고 동구 밖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참으로 목가적이다.
저녁 무렵 굴뚝에서 올라온 연기, 하얀 박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초가 지붕은 붉게 물들은 저녁 노을과 함께
영원히 내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내 고향, 우리 집의 모습이다.
장독대에는 나리가 몇그루 있어서 매년 여름이면 주황색 꽃이 피곤 했다.
그 외에는 치자 나무 한그루가 있어서 할머니는 이 치자나무 열매로 옷감에 물을 들이시고 하셨다.
장독대가 앞쪽에 있어서 채송화, 봉숭아, 해바라기, 포도, 가지, 오이, 고추를 심은 집들도 있었다.
옆집 현주내는 집 뒤로 텃밭이 있어 각종 채소를 심고 감나무도 여러 그루 있었다.
옛날에도 텃밭이라는 개념이 있었고, 작은 공간만 있어도 무엇가를 심고 키우는 부모님들의 삶이었다.
농작물을 심을 땅이 적던 시절에는 심지어 논두렁에도 콩을 심었다.
보리와 밀 농사 그리고 벼농사 이모작을 하던 것이 당연시 되었는데 요즘은 벼 일모작만 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6월이면 보리타작을 하고 모심기를 했으며 10월이면 벼 베기를 하고 보리와 밀 씨앗을 뿌렸다.
그래도 사람은 많고 수확량은 적어서 늘 배고팠고 삶은 고달팠다.
그러다 통일벼가 개발되고 보급되면서 수확량이 몇 배로 늘면서 배고픔도 사라졌다.
품질은 점점 개량되어 좋아 졌지만 당시에는 질보다 양이었다.
수도가에는 가죽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가을이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김과 가죽나무 잎으로 자반을 만들곤 하셨다.
김장 양념을 만들듯이 갖은 양념과 고추가루로 고무 다라에 넉넉히 양념을 만들고
푸른 김 한장 한장에 양념을 앞뒤로 발라 대나무 채반에 널어서 햇빛에 말리면 김자반이 되고 가죽 자반이 된다.
이렇게 김 몇 톳을 자반으로 만들면 수백장 자반을 장만해 놓으면 여름날 넉넉한 반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여름 더울 날씨에 밖에서 일을 하고 들어와서, 학교 갔다와서 누가 밥을 챙겨주지 않아도
부엌 선반에 퍼둔 꽁보리 밥에 수도가에서 펌프질을 하고 퍼올린 시원한 지하수를 부어
김자반, 가죽자반과 먹으면 별반찬 없어도 밥 한그릇은 뚝딱이었다.
바삭바삭한 김 자반이 그리워 아내에게 부탁하지만 본 적이 없어 만들어주지도 못한다.
그 옛날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김자반이 그립다.
사람은 어릴 적에 먹었던 음식에 대한 향수가 있다. 우리 뇌는 이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다.
어릴 적에 잘 먹고 즐겨 먹엇던 음식은 평생 그 음식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자주 먹고 즐겨 먹게 되지만
음식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배탈이 났다든가 하는 경험이 있는 음식은 그 이후로 그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아주 어릴때에는 마을 공동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물동이에 길어오곤 했었다.
그러나 국민학교를 가기 전에 부엌 앞에다 10n 이상을 땅을 파고 지하수를 퍼올리는 수도를 설치하였다.
정확한 때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새마을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집마다 스레트 지붕이 초가 지붕을 대신하고, 돌담이 브로크 담으로 대치되고
가정마다 수도가 설치되고, 전기가 들어오며 가로등이 켜지게 되었다.
얼마나 편하고 수고를 덜 수 있었는지 모른다.
물론 우물가에 모여서 나누는 동내 아낙네들의 수다는 줄어들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공동의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나타나는 문화는 갈수록 줄어든다.
문명의 발달은 점점 공동체적 문화는 줄어들고 개인주의적 문화로 대체되고 말았다.
여름이면 몇 번만 펌프질을 하면 시원한 지하수가 올라왔다. 냉장고, 냉수가 필요 없었다.
여름이면 이 물로 등물을 하면 시원했다.
겨울이면 수도가 얼지 않도록 꽁꽁 싸매여둬야 했다.
강추위에 얼어버리면 뜨거운 물을 붓고 녹이는 일이 여간 힘들고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세상은 갈수록 편리해져만 간다.
갈수록 기계에 의존도는 점점 늘어만 간다.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는 삶에서 기계에 의존하는 예속의 삶으로 전환되고 있다.
각종 미디어는 그 편리함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지속적으로 광고를 한다.
이제는 그 광고에 세뇌가 되어버렸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상업주의와 경제이론에 속고 또 속는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서 현대인들은 그렇게 길들여지고 게을러지고 나약해지고 말았다.
인간이 기계를 개발하고 이용하고 있어서 사람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곰곰히 아니 조금만 생각해봐도 인간은 점점 기계에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편리함이 행복은 아닌데 현대인은 편리함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없고 편리함만을 추구하는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옳고 그름은 없고 좋고 싫음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진리가 왜곡되고 정의가 사라져가도 나만 괜찮으면 괜찮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사라지고 상대적인 것만이 존재한다.
과연 행복한가?
방글라데시나 티벳 등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행복지수는 높게 조사된다.
그렇지만 현대적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그 조사 결과에 얼마나 진정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일까?
잠시 그럴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일지는 모르나 결코 그런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의 가치 개념이 달라져 있는데 전적인 동의가 되지 못할 것이고 돌아갈 수도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내가 살던 마을은 면소재지였다.
1구에서 6구 까지 있었고 보통 한 마을에는 30~40가구가 살았으니 쾌 큰 편이었다.
마을 한 가운데로 비포장 신작로 있고
도로 위에는 5구와 6구가 위치하고, 도로 아래로 1,2,3 구가 자리하고 있다.
4구는 큰 홍수에 떠내려가 없여다고 들은 기억이 어렴픗이 생각나는데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면사무소와 큰 창고, 지서와 소방서, 우체국, 농업진흥청 지소, 교회와 국민학교가 있었다.
학교 관사는 학교 안에도 있었고, 교회 뒷편에도 별도로 한 채가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거기에 사셔서 놀러가곤 했었다.
물레 방앗간과 정미소도 있었고 마을회관은 구마다 하나 씩,
점방이 3~4개가 있었으며, 중국집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양조장도 있었다. 그 집은 상당히 큰 집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은 초가집이었고 몇 몇 기와집도 있었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 후 대부분은 스레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지붕만 바뀐 것이 아니라 담도 브로크로 바뀌고 바닥도 흙길에서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었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 마을의 풍경을 상당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이 당시에는 최선일 수 있었겠지만, 미관상으로는 획일적인 모습을 만들어 내었고,
석면이 포함된 스레트를 사용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 많이 있다.
이것이 계획경제, 통제 시스템이 가져다 주는 피해라고 할 수 있다.
나만의, 우리 집만의 개성과 전통 문화는 점점 사라지게 되고
획일성, 통일성, 편리성, 합리성 등이 더 강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주거의 변화는 사람의 의식까지도 변하게 만들어 버렸다.
공동체성, 개방성, 교류의 용이성, 품앗이 등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은 점점 사라지고
익명성, 보호, 단절, 개인주의, 사적인 공간 등 현대적인 자본주의 환경과 의식이 자리하게 대치되었으니
과연 새마을 운동의 장기적인 성과를 논할 때 분명 많은 유익한 것들이 많았지만
무엇이 진정 긍정적인 효과였고 부정적인 효과였는지 냉철히 돌아볼 필요는 있겠다.
경제 성장과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겪어야 했던 문제들이 어디 한 두가지겠는가?
마을 앞에는 삼기천이 흐른다.
여름 장마가 지면 불어난 물에 많은 것들이 떠내려 온다.
심지어 돼지도 떠내려오고 호박도 떠내려 온다.
각종 밭 작물들이 떠내려오면 어른들은 긴 장대를 이용해 건져내기도 하시는 모습이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에는 우산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비를 자주 맞았지만 몸에 해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랐다.
무더운 여름날에 소낙비를 맞으며 걸어도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그래서일까 가끔 실컷 비를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지금은 대기 오염으로 빗물이 깨끗하지 않아서 비를 맞고 걷는다는 것을 상상을 하기 힘들다.
냇가에서 유리 어항에 된장을 풀어 넣고, 냇가 바닥에 돌로 고정하여 놓고
물고기(주로 피래미 지만) 를 잡아 매운탕을 해 드시던 모습
우리는 주로 민물 새우나 다슬기를 잡기도 했다.
하천을 따라 수십년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수 십 그루 줄지어 심겨져 있다.
동네의 얼굴같은 나무다. 사람들은 떠나도 지금도 그 나무들은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여름이면 삼나무를 쪄서 껍질을 벗겨 한 뭉큼씩 묶어 말리는데
이 느티나무를 새끼로 연결하여 200m 정도 줄을 치고
이곳에 걸어서 말리는데 바람에 흔들릴 때면 참 보기 좋은 정경이었다.
멋진 사진 한장이 나오는 모습이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철사 빨래줄에 빨래들이 널려있는 한가하고 여유로운 모습처럼 말이다.
여름이면 사내 아이들이 멱을 감고 놀았고, 여자들은 저녁으로 멱을 감기도 했었다.
겨울이면 꽁공 언 냇가에서 수십명의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놀았다.
냇가에는 곳곳에 빨래터가 여럿 있었다.
내가 살던 마을 시냇가 빨래터 위에는 빨래터로 내려가는 계단 양편으로
높이 1m , 폭 0.5m 정도의 긴 돌담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 밤이면 저녁에도 냇가에서 미역을 감고 올라와
이 돌담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 보았던 은하수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강물처럼 흐르던 천상의 황홀경을 생각하면 지금도 흥분이 된다.
30년도 지나 몽골 테르치 국립공원에서 다시 이 은하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면사무소 안에는 호두나무가 한 그루가 있어서 면 직원들 몰래 따 먹던 기억이 난다.
학생들은 한 학년에 약 100명 전후였다.
학생들이 많아서 본교에서 삼명, 통명 두개의 분교가 분리되어 나갔다고 한다.
보통 한 집에 자녀가 평균 5명 정도였으니 참 많았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는 구락별로 아이들이 줄지어 등교를 했고,
새 아침이 밝았네 ~~ 등등 노래를 부르면서 등교를 하기도 했다.
북한은 아마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요일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생들이 나와 함께 마을 골목길을 청소를 하기도 했다.
중학교는 10리 정도 떨어져 있어 걸어서 등.하교를 해야 했다.
2학년 때는 중고 자전거를 사주져서 6개월 정도 자전거 통학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 삼천리 자전거가 유행하였는데, 중학교 교정에는 자전거 거치를 할 수 있는 가건물이 있었고
수십대 자전거들이 거치되어 있었다.
중학교는 면소제지에 하나가 있어 20-30리를 걸어서 등교를 해야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집에서 중학교를 가기 위해서 신작로를 걸어가야 하는데
비포장 신작로 양편에는 수 십m 높이의 포플러가 줄지어 심겨져 있었다.
바람에 살랑살랑거리는 잎사귀 부딪치는 소리는 지친 걸음에 위로를 주는 정겨운 위로의 음악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손 흔들며 인사를 나누곤 했었지.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친구에게 가방을 부탁하면
이 친구는 핸들에 가방을 서네게씩 싣고 운전을 해야 했다.
당시에는 교복을 입고 다녔고 동복, 하복이 정해져 있었고
머리는 2부 이상 기를 수 없었으며 신발은 운동화를 싣었다.
남.녀 공학이라 여학생들은 단발머리를 하였다.
남학생 두 반, 여학생 한 반으로 여학생들은 70-80명이나 되었다.
전교생이 대부분 걸어서 등.하교를 하였으니 골짜기 마을마다 학생들이 나오면
시냇물이 모여 천을 이루고 강을 이루듯이 많은 학생들이 교문을 들어섰다.
난 2학년 까지만 다니고 3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하였다.
고향을 생각하니 단편적인 생각들이 하나 둘씩 연달아 올라온다.
어찌 몇 줄로 유년 시절을 다 기록할 수 있으리요마는 그래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니 신기하고 아직은 기억력이 꽨찮은가 싶다.
먼 훗날도 이 기억들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머굼을 수 있을까?
학교를 다녀오면 대부분 책보(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친구는 몇 없었다.)는 던져 놓고
어머니를 도와 일을 하거나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야했다.
망태를 매고 나가 소 먹일 풀을 베어오거나, 양잠을 하는 시기에는 뽕잎을 따거나
방학이면 땔감을 하러 산으로 가거나 했다.
솔가지를 긁어 오거나 죽은 나무뿌리나 고자배기를 해 땔감으로 쓰기도 했다.
농번기 때는 어린이들도 노는 일이 없이 농사일에 다 동원되었다.
보리 타작, 모심기, 벼베기, 벼타작,...다 손으로 하는 수작업이니 작은 손 하나도 보태야 했다.
벼도 기계농이 아닌 시절이라 일일이 한 움큼씩 벼를 들고 쇠고랑 같은것으로 낱알을 흝어냈고
그 이후로 발로 돌리는 탈곡기를 이용했다.
밭에서 하는 일들은 어디 한두가지였던가...
여자 아이들은 새참 나르는 일에 함께 했다. 난 달음질을 잘하여 심부름을 곧잘 했다.
겨울에는 마을 회관에서 새끼를 꼬기도 했다.
어린 아이였지만 시골에서 하는 일들을 왠만큼은 다 해본 것 같다.
분무기를 매고 농약을 치기도 하고, 겨울이면 보리 밝기, 벼 심는 논에서 잡초 뽑는 일,
목화 밭에서 목화따기, 여름 밤에 논에 물대기, 삼나무 껍질 벗겨서 저릅대 챙겨 오기
모판에서 모찌기, 모 심을 때 줄 잡아주고 모심기, 감자 캐기, 고구마 캐기..보리와 벼 이삭 줍기
국민학교 때는 집에 리어카가 생기고 나서는 자주 리어카를 운전했다.
키가 작아서 리어카 뒤에 무거운 짐이 실려 중심이 뒤로 쳐지면
나는 리어카 손잡이에 매달려 공중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용을 써서 바닥으로 끌어내려야 하곤 했다.
한번은 논에서 무거운 짐을 싣고 언덕 내리막 길을 달려 내려와 다리를 건너오다가
속도를 조절하지 못해서 다리 난간에 부딪힌 적이 있었다.
자칮하면 큰 부상을 입을 뻔한 적도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인가 보다. 리어카로 짐을 옮겨야 할 일이 있었는데 집에 남자가 나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선생님에게 리어카르 ㄹ몰아야 한다고 조퇴를 신청한 적도 있었다.
참 어린 나이에 철이 들었다고나 해야 할까....
선생님은 기특하게 보셨는지 조퇴처리를 하지 않으셨고 그 해도 개근상을 탈 수 있었다.
열심히 일했던 기억은 많은데 공부했던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난 어릴 때 공부를 하고 책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공부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는다.
행복한 세대인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행한 세대인 것 같기도 하다.
국민학교 5학년 대 고전읽기 대회에 나간 것이 전부다.
학교 도서관에도 책이 별로 없었다. 물론 우리 집에는 학교 교과서 외에는 일반 서적이라곤 없었다.
빈민국가의 어린이들이 경제활동에 동원되는 모습들을 보면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의사가 된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영어 알파벳을 외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는 작은 누나가 국민학교 5학년 땐가 큰 누나에게 학습지도를 받으면서 혼이 나고
난 어깨 너머로 귀동냥으로 배우며 은근히 누나에게 자랑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한 학년이 끝나 종업식을 하고 학교에서 우등상과 개근상장을 받아와 어머니에게 드리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방에서 길쌈을 하고 계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밝아지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우리 집에서 제일 똑똑한 큰 누나도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주위 어른들은 공부를 더 하지 못한 누님에 대하여 늘 안타까워 하셨다고 한다.
마을의 각종 계돈 관리를 다 했고 결혼식에 축사도 누님이 자주 읽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를 도와 가정 살림을 살아야 했으니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도 엄청난 생활력으로 세 자녀를 대학 다 보내고 출가시키고 집들도 마련해 주셨다.
작은 누이는 늦게 공부 눈이 뜨였나 보다. 중학교 졸업할 때는 교육장상도 받았다.
가난 때문에 고등하교 진학은 못하고 서울로 돈벌러 갔다.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 고등하교를 나오고 나중에 두 아들을 대학 졸업시키고 나서
만학도로 대학을 나왔다. 참 가슴이 아린 가난한 시절 이야기이다.
등잔 밑에서 숙제를 하던 생각, 몽당 연필을 모나미 볼펜 뚜껑에 끼워 쓰던 기억
돈이 없어서 계란을 들고 점방에 가서 도화지와 물물교환을 하여 미술 준비를 하던 기억
용돈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군것질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국민학교 6학년 때다. 학교별 축구시합을 하는데 대표선수가 되었지만 축구화가 없었다.
찢어진 운동화로는 힘들어 할머니에게 졸라서 축구화 살 돈을 받았지만 아까워서 차마 사지 못했다.
지금도 이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어린 마음에 가정의 형편을 생각해야 했던 기억이 오랜 시간이 흘러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찍 질환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홀어머니가 오남매를 키우셨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오형제는 막내인 나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름 다 열심히 살았다.
큰 형님은 착하고 여린 심성이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사춘기에 방황하게 만들었고
제대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셨으며 적절한 직업을 가지지도 못하셨다.
그것이 어머니에게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고 자주 안타까움을 말씀하시곤 하셨다.
작은 형님은 자수성가하셔서 미대교수와 학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셨고
지금은 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계신다.
존경하는 형님의 삶은 감동의 스토리다. 한 편의 자서전을 꼭 써 보셨으면 좋겠다.
나 또한 의사로 장로로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농촌의 저녁은 어둠이 찾아와도 일은 멈추지 않았다.
아낙네들은 긴긴 겨울밤이면 길쌈을 하기도 하고 배틀에 앉아 북질을 하며 삼베를 짜고 계셨다.
잠결에 듣는 어머니의 배틀질 소리 ... 철거덕 척척, 철거덕 척척..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렇게 짠 삼베는 한 필 , 두 필 잘려서 할머니가 장에 가셔서 파셨고
그 돈으로 월사금을 주시고, 운동화와 교복을 사 주셨다.
농가에서 목돈을 만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부업으로 수입을 얻거나 보리와 벼를 공판하고 돈을 만졌다.
당시에 부업으로는 소나 돼지를 키우고, 봄에서 여름에는 양잠, 겨울이면 삼베를 짜서 부수입을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닭을 키우 계란을 얻어 먹기도 했지만, 알을 부화시켜 병아리들이 자라면 닭을 장에 가서 팔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닭을 키워도 명절이나 닭고기를 먹었고평상시는 먹지 못했다.
명절에 먹는 떡국에도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아니라 닭고기가 들어갔다.
계란을 먹어 본 기억도 많지 않다. 가끔 생계란을 먹기는 한 것 같다.
소풍이나 운동회 때 삶은 달걀을 먹었었지...
농촌의 삶이란 낮에는 집 밖의 일로, 밤이면 집안 일로 쉴 틈이 없었다.
밤이면 어머니는 빨래를 하고 다리미로 아이들 교복을 다려주고 음식을 만들고 남은 일들을 계속 하시고 ..
어머니는 정말 소처럼 일하셨다. 그 정도면 지쳐 쓰러질만도 하실 텐데 아마도 자식들 때문에
그 몸이 무너져가고 있어도 참고 일을 하셨을 것이다.
언제 한 번 편히 쉬시지도 못하셨다. 그 삶의 고달픔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보냐
중년에 들에서 일하시다 허리를 다치셨으나 치료를 받지 못하셔서 늘 허리 통증으로 힘들어 하셨다.
아마도 지금 생각하면 척추 골절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골에서는 여자들은 대부분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니셨다.
무거운 땔감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실 대는 마을 회관 오르막 길에 힘드셔서
나에게 허리를 밀어달라고 부탁하시곤 했다.
이 후유증으로 어머니는 할머니보다 일찍 꼬부랑 할머니가 되고 마셨다.
가슴 아픈 현실 앞에서 난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는 불효자의 마음은 늘 죄송하고 무거웠다.
어릴 때 즐겁고 편하게 놀았던 기억은 많지 않다.
가끔은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틈틈히 친구들과 마을 앞 면사무소 앞에서 벽치기,
땅따먹기, 나이먹기 등 놀이를 하였고
멱을 감기도 하고 겨울에 시내가 얼면 썰매를 타기도 했다.
냇가에서 설매를 타다가 물에 빠지면 양지 바른 곳에서 옷을 말리고 ...
친구들은 형들이 썰매를 만들어 주곤 했는데,
난 형이 두 분이나 계셔도 모두 외지 생활을 하시는 바람에 형들과의 추억이 별로 없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마을이라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눈이 방문 앞 마루까지 쌓였다.
마당을 쓸고 골목 눈을 쓸어서 리어카에 눈을 실어 강변에 버리는 일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 고향을 찾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어릴 때 그렇게 커 보였던 건물이나 마을이 너무 좁고 작고 왜소해 보인다.
600명이 뛰놀던 학교 교정은 겨우 20-30명 학생들도 남아 있지 않은 분교로 전락했다.
전교생이 가을 운동회를 하면 장관이었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청군.백군은 치열한 우승경쟁을 위해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달리고 뛰었다.
그때 기만전과 계주가 정말 흥미진진 했던 기억이 난다.
상품은 노트나 연필, 크레파스, 스케치 북 등이었다.
추석때면 구락별 체육대회가 열렸다.
마을의 명예를 걸고 유니폼을 맞혀 입고 도시에 돈 벌러 나갔던 형들도 열심히 뛰었다.
릴레이 달리기, 축구시합, 배구시합, 씨름...
마을의 축제였다. 장사꾼들도 나타나고 ...지금은 이런 정겨운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명절이라도 차로 왔다가 제사만 지내고 쌩하고 가버리니 말이다.
정이 사라져 버렸다. 낭만이 사라져 버렸다. 고향 찾는 재미가 반감되고 말았다.
교정의 플라타너스는 늘 시원한 그늘이었고 편백나무는 학교 울타리였다.
교실 앞 계단에 심겨있던 벚나무가 만개하여 화사하게 피고
봄바람에 꽃잎이 휘날리며 떨어지는 모습은 어린 마음을 흥분되게 하였다.
교사 벽을 타고 매어 놓은 철사줄을 따라 자라올라가던 나팔꽃을 기억한다.
야외 학습장을 만들고 벤치와 의자를 만들고
작은 연못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유지들에게 편지를 쓰던 기억..
실과 시간에는 수십 마리 토끼를 기르기 위해
산에 가서 칡넝쿨을 띁어 오기도 하고 길겅이를 캐서 먹이를 주고 방학이면 당번을 서기도 했다.
중학교 때 기억은 별로 없다.
나름 공부를 잘해서 반장을 했던 기억,
음악 선생님이 수학을 가르치시다가 힘들다고 나를 지명하여 내가 학생들 수학을 가르쳤던 기억,
전교 1등을 했다고 어머니가 음식을 하여 선생님들에게 대접하고
처음으로 어머니와 단 둘이서 신작로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던 일
그때 어머니는 조금은 행복하셨을 것이다.
국어 시간에 어머니에 대한 작문을 하던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손을 클레오파트라의 손과 바꾸지 않겠다고 썻던 기억이 난다.
사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화상으로 엄지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없으며 손가락 사이가 붙고
화상의 흉터와 온갖 갖은 일로 성기고 상처 투성이닌 손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때 내가 자랑스럽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 까지 고향에서 살았다.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고향에서 마지막 2년을 살았다.
고향에 대한 기억은 여기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제는 일가친척도 다 남아있지 않은 고향산천이지만
아련한 기억들만 남아 나를 어릴 적 고향으로 인도한다.
아직 밭에 조상들의 묘가 있어서 일년에 한 두번은 찾게 된다.
농촌의 상주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어서 내가 살던 집은 철거되고 작은 소공원으로 변했다.
이제 내가 살던 고향집은 기억속에서만 존재한다.
마음에 고향은 좋은 추억들만 가득 안고 찾아온다.
함께 뛰놀던 친구들도 그립고, 친구들과 공유했던 추억들이 생각이 난다.
까까머리 국민학교 졸업사진 속에 친구들은 하나 둘씩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고 있다.
마을 회관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던 일,
공공근로 사역에 동원되어 전표를 받아 오고 모아서 하얀 밀가루를 배급받던 일,
밀가루 반주을 해서 만든 칼국수, 콩칼국수, 팥칼국수, 수제비가 별미이던 시절
옥수수 한 솥 삶아내면 멋지게 하모니카 불어대던 시절
그 때는 왜 옥수수를 한 알, 한 알 손으로 떼어 먹었는지 모르겠다.
배고파 밀과 보리를 구워 비벼먹던 시절, 입가는 시커멓게 되어도 행복했다네
감나무가 비바람에 떨어지면 떫은 감나무를 장독에 담가 쓴맛을 제거하고 깍아먹던 시절
겨울철 간식이 없으면 안방 웃묵에 왕겨 더미 속에 쌓아든 고구마를 꺼내 깍아먹던 시절
배고프면 땅 속에 묻어 둔 무우 꺼내어 깍아 먹던 시절
여름철이면 하지 감자 삶아서 사카리에 찍어 먹던 시절
지하수 시원한 물 한 사발에 사카리 몇 개 녹여서 시원하게 들이키던 시절
돼지 방광으로 축구하던 일
포도농장에 여러명이 포도먹으로 가던 일
들에 일하러 가서 배가 고프면 가지도 생으로 먹고, 오이도 먹고 옥수수대도 씹어먹었지..
겨울 방학이면 전교생이 산으로 산토끼 잡으로 동원되기도 하고
농번기에는 농촌 일손 돕기에 동원되기도 했다.
잔디 씨앗을 받아 학교에 제출하기도 하고
쥐잡기 ...
국기 하향식 ..
명절이면 마을에서는 소나 돼지를 잡았다. 집집마다 필요한 만큼의 고기를 사고
일가친척집에 두군 세근씩 나워 신문지 등에 둘둘 말아서 선물을 하곤 했다.
나 이 선물의 배달원 노릇을 톡톡히 했다.
큰 누나가 시집을 간 후에는 버스를 타고 사돈집까지 선물을 배달하는 심부름을 했다.
정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던 멋진 풍속이었는데 지금은 택배가 대신한다.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온다.
다 잊혀졌나 했는데 다 기억하고 있었다.
고향도 그렇지 않을까? 결코 잊을 수 없다.
우리 몸이 기억을 하고, 기억이 기억을 하고, 영혼이 기억을 할 것 같다.
옛날 어른들이 그랬다.
원한이 맺히면 고향산천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는 혼령이 있다고 ..
신혜가 인우가 나중에 이 글을 읽으면서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을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이토록 나를 고향 앞으로 달려가게 하는지 모르겠다.
고향이 그립고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움은 인간의 아름다운 감정이다.
본향을 향하는 본능적인 감정이 아닐까 싶다.
영원한 본향을 향하는 그리움은 아담이 에덴을 나온 뒤로 생겨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본다.
고향도 이렇게 그립고 가보고 싶은데
영원한 본향을 향한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오늘도 그 본향을 사모하고 언젠가 그 본향에 갈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마음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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