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글 모음

감각적 세계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1. 6. 29. 13:27

나는 어린 시절을 시골 농촌 마을에서 성장했다.

당시 1960년대 농촌 환경은 많이 낙후되고 척박한 환경이었으며 도시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기차길도, 고속도로도 없었고, 비포장 신작로 길을 흙먼지 날리며 두 세시간 마다 운행하는

시외버스가 전부였던 벽촌이었다.

운송수단으로 소가 끌던 달구지가 사라지고 리어카가 등장했으며, 이어 경운기가 등장하고 ...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서 호롱불과 남포등이 전부였다.

형설지공이라는 한자숙어를 얼마나 실감할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요즘 아이들은 알까?

밤에는 달빛을 따라 길을 걸었다. 달은 바다의 등대처럼 소중한 길잡이였다.

중앙아시아와  피지 등에서 봉고로 밤길을 달릴 때면

도로변에 작은 돌들을 세워놓고 돌에 흰색을 칠해 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달빛을 받은 표지석은 환하게 보여 도로의 경계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지혜였다.

 

가전 제품이라고는 트렌지스터 라디오, 벽시계,

간혹 잘사는 집안 어른들이 차던 손목 시계 등이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시계하면 집집마다 시계추가 좌우로 왔다갔다하는 벽시계가 먼저 떠오르고

오디오하면 손바닥만한 트레지스터가 각종 음악이라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기였고,

차범근이 멩활약하던 아시아국제대회 축구경기 방송도 듣을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다.

당시 아나운서들의 감칠맛 나는 중계는 일품이었다. 그들은 아마 변사들의 후예들이었을까?

귀로 들려오는 음악과 중계에 머리에서는 수많은 그림들을 그려내고 있었으니.

청각은 이렇게 상상력을 키우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흑벽 필름으로 상영되는 영화를 강변의 임시 극장에서 구경하던 시절이었다.

노들 강변의 임시극장이라 상상이 가는가?

긴 말둑을 여러개 박고 높이 5m 정도 광목 천으로 빙 둘러치면 극장이 되고 스크린이 된다.

수없이 돌려 화면은 지직거려도 16mm 영사기로 비추던 영화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가까이서 들리는 것이 전부이던 시절에서

전파를 통해 들려오는 것과 보여지는 시청각이 점점 많아지고 가상의 현실 까지 발전과 진화는 끝이 없다.

석유곤로가 있는 집도 흔치는 않았다.

대부분 검은 가마솥이었다. 그러다 양철, 양은, 플라스틱 부엌 물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기는 국민학교 2학년 때 쯤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밤에 어디를 갈 때는 손전등에 의존하였고 간혹 남포등을 들고 왕래를 하기도 했다.

전기가 들어오고는 가로등이 켜지고 손전등은 사라져 갔다.

어둠이 사라지고 어둠의 귀신들도 사라져 가고 동화도 사라져 갔다.

요줌 같이 빛의 세계에 사는 아이들이 질흙같은 어둠이 무엇인지 알까?

매일 밤이면 하늘에는 늘 별들이 찬란히 빛났고,

한 여름 밤이면 눈부시도록 반짝이며 강물처럼 흐르던 은하수를 기억한다.

어린 소년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던 그 황홀한 천상의 장면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는 은하수를 보려면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성인이 되어 몽골 국립공원 테르찌에서 다시 볼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동물적 감각, 본능, 감각이 발달하게 되었다.

배꼽시계라는 말은 들어봤을 것이다.

들에서 일을 할 때도 해를 보고 시각을 가늠하여 생활하였고

동틀 무렵, 해질 무렵, 저녁 무렵, 점심나절, 새참 때, 한 밤중 ...등등

정확한 시각보다는 그 언저리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많았다.

또한 거리도 미터 단위를 쓰지 않았기에 오리, 십리, 이십리, 백리 등 용어를 사용하였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 오십보 백보 ...

무게는 어떻던가.  한 되, 두 되, 한 말, 한 섬, 한 가마니 ...천석꾼, 만석꾼...  

눈대중이라는 말이 있다.

깊이도 마찬가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러다보니 감각이 발달하여 직접 정확히 재보지 않아도 얼충 맞아떨어진다.

이것뿐인가. 어머니들의 음식을 만드는 것도 지금같이 어디 래시피가 있었던가?

몇 스푼, 몇 gm, 몇 cc  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 어머니 장솜씨는 일품이었고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들의 손맛이었다.

 

문명이 가져다 준 기계화, 과학화 등은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퇴화하게 만들고 있다.

본능이나 감각을 사용하지 않고 기계 의존형 인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본능을 따르기 보다 정확한 테이터에 의한 결정을 선호하는 현대이다 보니

인간의 감각은 상요하지 않거나 주렁가니 갈수록 무디어져만 간다.

인간이 기계와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예속되어 가는 경향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지혜보다 AI에 의존해 가는 것을 본다.

빅테이터의 분석과 결정에 의존하는 기업들, 과학들 ..아니 우리의 미래도 이것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가?

 

이동 수단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그냥 두발로 걸었다.

난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걸어다녔다.

지금은 조금만 가도 차를 이용하고 택시를 탄다.

우주를 여행하는 시대에 본능, 감각을 논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다.

 

시계가 없으면 지금 시각이 언제인지 판단을 잘 하지 못한다.

옥외 활동 보다 실내 활동이 많아진 탓이다.

사무실 안에 있으니 해를 볼 수도 없고 하루의 시간대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휴대폰이 없으면 통화가 되지 않는다. 요즈음은 전화기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집도 전화기를 없앤지가 몇년 되었다.

 

편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기다림의 미학은 옛날 옛적일이 되어 버렸다.

과거에는 밤이 맞도록 편지를 정성드려 써서 우체국이나 우체통에 넣어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는 그 시간동안 수많은 상상의 세계를 살았고, 설레임, 기대 등이 가져다 주는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공상이 정신을 건강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조급함은 현대 문명의 부산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속도전, 각종 기기는 점점 더 빨라져가고, 이런 현대 문명세계는 시간도 점점 더 빨리 흘러가는 것 처럼 느끼게 한다.

모든 것이 빠르다. 차도 빠르고, 컴퓨터 속도도, 휴태폰 속도도 빠르다, 배달도 속도전이다.

음식도 인스턴트 식품이 난립해 있다.

어디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가족을 사랑하는 사랑과 정성을 느낄수 있을까?

느리면 퇴보하고 도퇴 되고 만다. 속도의 강박관념 속에서 늘 빨리 빨리가 입에 달라붙어 있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단어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빠름에 위기와 불안을 느끼는 것인가?

 

우리는 동물세계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동물들의 감각이나 본능은 아직도 살아있는데

인간의 본능은 갈수록 퇴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창조주, 신을 향햐고 찾는 감각 마저도 희미해져 간다.

과거의 삶과 환경에서는 신을 생각하고 의지하고 경외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나

현대 물질문명과 과학, 기계중심 사회에서는 신을 생각할 기회나 환경이 갈수록 줄어들어만 간다. 

 

몽골의 대초원을 보고, 캐나다 로키산맥의 대자연을 보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피지의 돌고래와 산호초들을 보고

은하수가 폭포수처럼 쏱아지는 몽골의 밤하늘을 보고, 예레레스트 등의 고봉 아래서 인간은 신을 찾는다.

아니 저절로 조물주의 능력 앞에 무릎을 꿇고 경외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나 실험실 안에서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이런 감각을, 감정을 가지기란 힘들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자연 앞에 겸손하고 겸허함을 안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은 자연의 위대함을 알고 인간의 연약함을 온 몸으로 안다.

쌀이 나무 열매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생명의 생사화복과 생멸, 성장, 변화에 대한 감각이 있을까?

인구의 90%가 도시문명에 살고 있다. 갈수록 도시문명을 향한 이동은 줄어들지 않고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도시문명은 바벨의 문화요, 가인의 문화요, 타락의 문화다. 죄의 문화요 하나님과 멀어지는 문화다.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문화다. 옳고 그름의 문화가 아니라 좋고 나쁨의 문화다.

 

갈수록 무디어지는 감각, 본능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든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찾고 향하도록 지음 받았고 본능에 심기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디어진 감각은 도시문명에 물들어가고 하나님과 멀어져 간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구분되고, 개몽주의와 인본주의 진화론을 거치면서

신은 다락방 한 구석에 모셔놓고 필요할 때만 찾는 존재가 되어 버렸고

신앙은 정신적 위안을 얻는 수단으로 인간의 삶의 영역 속에서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다. 

 

본능을 깨우자. 감각을 민감하게 하자.

탈문명화, 도시문명을 거부하고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퇴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그곳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삶이, 가치가 존재하지 않을까?

물질문명이 떠들어대는 행복의 정의에 세뇌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거대한 시대의 물결은 돌이킬 수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필연적인 과정이다.

그런데 이 결국이 지구의 파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은 어찌해야 할까?

 

잠시 눈을 감고 감각과 본능에 더 의존하며 살았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무엇이 진정 더 가치있는 삶이고 행복인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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