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9장 38-50절
작은 자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데 요한은 자기편이 아니라고 배척한 것을
자랑스런 행동이라고 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나님 나라의 일에 내 편, 네 편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참으로 사소한 것들로 인해
수많은 갈등과 대결과 분열이 있어 왔다.
한국의 교단의 숫자를 보노라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리스도인 작은 자 하나에게 물 한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작은 자를 실족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서운 경고를 주셨다.
믿음이 작은 자를 넘어지게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한다.
소흘함, 무시, 홀대, 억압, 자존심 상하게 하는 언행 ....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이 죄의 무거움을 말씀하시면서
작은 자를 실족케하는 자는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차라리 낳다고 하신다.
그리고 자신을 범죄하게 하는 그 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습적으로 행하는 죄를 짓게하는 원인이 되는 것들을 잘라버리라고 경고하신다.
이어서 그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지옥의 고통스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벌겋게 달아오른 냄비에 소금을 뿌려본 적이 있는가?
톡 톡 튀어오르는 장면을 본다면 지옥의 유황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으리...
그리고 소금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① 소금이 제물에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상기시켰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② 소금이 음식의 맛을 바꾸듯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맛'을 바꿔야 한다.
③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듯이 우리는 사회의 '도덕적 부패'를 막아야 한다.
소금이 그 효과를 내려면 소금을 필요로 하는 음식에 닿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발을 뺄 것이 아니라 세상에 지혜롭게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메시지로 세상에 소금을 치려는 갈망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그분에게 쓸모없어진다.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야 맛을 내듯이,
내가 소금에 절여져야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내가 소금에 절여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소금을 치기 전 배추와 소금에 절여진 배추를 비교해 보자.
소금을 치기 전에는 배추가 뻣뻣하고 제 모습을 유지하지만
소금에 절여진 배추는 풀이 죽어 축 처져있다.
그때 양념이 들어가야 제대로 맛을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소금에 절여진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충만한 모습이 소금에 절여진 상태가 아닐까?
나의 혈기와 모든 죄악된 말과 행동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으로 변화되고,
섬김과 겸손의 모습으로, 작은 자를 섬기는 모습으로 절여져야 서로 화목할 수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소금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소금은 귀했고 물물교환의 물품으로 쓰이기도 했었다.
[소금의역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 바이킹이나 해양민족들은 소금을 만들 수 있는 곳을 따라 식민지를 개척했다고 한다.
그만큼 소금은 중요하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소금같은 역할을 하는 것들이 있다.
말씀, 기도, 예배, 교제, 전도는 신앙인에게 소금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이 제대로 작동해야 건강한 신앙인이 된다.
소금이 들어가야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듯이 ...
내 안에 소금이 없던가,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니라
맛을 내는 좋은 소금이 내 안에 있어야 맛을 낼 수 있다.
소금에 잘 절여진 그리스도인인 되어 세상을 화목케하는 자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