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영성일기

예루살렘 입성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4. 3. 13. 09:20

본문 : 마가복음 11장 1-10절

 

유대인의 명절,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시작될 주간이었다. 

세계 전역의 유대계 디아스포라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요한복음 11장 55-57)

 

마침내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이다.

로마 시대에 개선 장군들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왕의 입성 장면으로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환호하고 있다.

 

"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인간적인 화려하고 근엄하며 웅장한 왕의 입성이 아닌데도 그들은 어떻게 찬송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구역 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다윗에게 언급한 말씀 때문에 다윗의 나라를 언급하지 않았을까?

 

스가랴 9장 9절

" 시온의 딸들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사무엘하 7장 12-14절

"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지시하신다.

"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어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기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이 말씀에 제자들은 그대로 순종한다. 그리고 나귀 주인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얼마나 이유를 따지기 좋아하는가

모든 지식과 경험과  이성을 총동원하여 불순종의 핑계거리를 찾기에 바쁘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지시요 말씀이다.

나의 생각을 뛰어 넘으시는 분이 나를 인도하고 계신다. 

머리로,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삶이기를 소망하는 아침이다. 

주님도 마지막 십자가를 지실 때에 잔을 피하고 싶으셨다. 

다른 방법으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방법은 없을까? 꼭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의 생각들을 다 내려놓으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나 또한 주님처럼 내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이라면 토 달지 않고

온전히 순종의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승리의 행진을 목격한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큰 기대가 있다. 

우리 삶이 더 나아지고 더 안전해지며 더 즐거워지도록 하나님이 이러저런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흥분한 구경꾼들처럼 우리도 고난이 그치고 불의가 바로잡히며 번영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싶어 안달이다.

그날 예루살렘 길거리에 늘어선 사람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우리의 환호와 외침에 개인적 욕망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제자도의 의미를 놓치고 만다.

흥분하고 환호할 때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는

어려움과 고난, 심지어 죽음가지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군중들의 '호산나'를 외치는 환호 속에서 나는 무엇을 느끼는가?

나 또한 이제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하며 기다리던 왕이 오셨으니 

로마로 부터 해방과 영광스런 왕국의 건설, 번영과 행복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메시아가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리라는 기대로 환호하며 소리지르고 있지는 않는가?

개인적 욕망은 배제된 채 순수하게 왕의 입성만을 찬송하고 있는가?

제자도는 나의 욕망과 나의 생각을 다 내려놓고 따르는 길 아니던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오늘도 뭔가를 기대하며 기도를 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영성일기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하니하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찬송하겠습니다.'라는

다짐으로 시작하는 아침이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렝 성에 입성하신 후 성전을 둘러보시고는 베다니로 돌아가셨다.

메시아의 입성의 퍼포먼스는 너무나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주인이 자기집에 돌아와 집안을 쭈욱 둘러보듯,

주님은 성전을 둘러보시고 때가 저물매 베다니로 가셨다. 

 

주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 성전의 회복, 예배의 회복이셨다. 

성전의 주인이 오셨음을 보여주신 것일까?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시려함인가?  

 

주님의 생각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참 쉽지는 않다.

땅을 밟고 살아가는 부폐한 인생이 세상 살아가는 일에 더 마음을 빼앗기기가 싶다. 

그래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발버둥치며 용을 써 본다. 

 

[호산나] 

우선 '호산나!'라는 환호가 있다. 이는 본래 절박한 호소이며, 대략 '도와주세요!'라는 의미다. 사제들은 초막절 축제 일곱 번째 날, 일곱 번에 걸쳐 번제물을 바치는 제단 주위를 돌며 비를 청하는 호소로서 이 말을 단순하게 반복했다. 하지만 초막절이 청원의 축제에서 기쁨의 축제로 바뀌었듯이 이 청원의 외침 또한 점점 환호로 변화되었다.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지음, 이진수 옮김, "나자렛 예수 2권"(Jesus von Nazareth II) 20쪽
찬송가 등에서 많이 사용되는 호산나(Hosanna)는 히브리어 호쉬아-나에서 파생된 말로, 그리스어로 음역되면서 호산나가 되었다.

'호쉬아'는 구원이라는 뜻이며 호세아 여호수아와 같은 어원에서 온 말이다. '나'의 경우엔 지금이라는 뜻이므로 호쉬아-나의 직역하면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된다. 시편 118,25(공동번역)의 "주소서,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 주소서, 야훼여, 승리를 주소서."에서 볼드처리된 부분이 호산나에 해당한다.

이는 AD 1세기에 이미 메시아니즘적 의미를 얻게 되었고, 따라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메시아적 선포로 등장한다:
ὡσαννά· εὐλογημένος ὁ ἐρχόμενος ἐν ὀνόματι κυρίου·εὐλογημένη ἡ ἐρχομένη βασιλεία τ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Δαυίδ· ὡσαννὰ ἐν τοῖς ὑψίστοις.[1]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마르코 11장 9-10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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