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디님 사람들
2021. 6. 10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를 정복하고 가나안 정복이 시작할 때 일이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출애굽 과정에서 일어난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들,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넌 사건, 광야에서의 기적들, 모압과 암몬을 정복하고 무서운 파죽지세로 들이닥치는 이들의 소식에 가나안 족속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들 가나안 족속들 중에 기브온 족속이 모여 의논하고 이스라엘의 정복을 피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위장으로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항복하고 생명을 구한 일이 일어났다. 이후에 이들은 성전의 봉사를 위한 노예로 살아남았다. 성전의 번제에 필요한 나무를 쪼개고, 물두멍에 물을 길어 나르는 등 주로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하였다. 느디님은 ‘주어진 자’란 뜻의 히브리어 ‘나탄’에서 파생된 말로, 기브온, 미디안 족속 등 주로 이방인 전쟁 포로들이었다.
그렇게 살아가던 그들도 바벨론 정복으로 성전이 무너지자 전쟁의 포로로 바벨론 지역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새로운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로 잡혀온 각 나라의 백성들이 자국으로 귀환이 시작되었다. 유다의 백성들도 성전 건축이라는 큰 대의 명분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느디님 사람들도 귀환자들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고, 그 숫자가 레위인들 보다 많았다.
그리고 유다로 개종하여 유다 백성들처럼 율법 준수를 맹세하고 성전 봉사하는 자로서 세금 면제되는 혜택도 누렸다.
1차 포로귀환 숫자는 42,360명, 이중에 제사장이 4,289명, 레위 인이 341명, 느디님 사람이 392명이었다.
그들이 포로 전에는 노예의 신분이었다. 그리고 성전에서 가장 낮고 천한 허드렛일을 하던 피정복자들의 후손으로 살아가던 그들이다. 여호수아가 정복 전쟁을 하던 시기가 B. C1400 년경이고 1차 포로귀환이 B. C538년이니 참으로 긴긴 세월을 종으로 살았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갈 때는 유대인이나 그들이나 차이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가 보장되었고 문명사회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고 성공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상당수가 포로귀환을 선택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성전과 각종 제사를 책임지도록 택함 받았던 레위족속들은 성전 일의 봉사와 수고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귀환을 포기하고 소수만이 선택했는데, 다시 성전 일을 위한 종의 신분으로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들 중에는 70년의 포로 세월이 흘러 포로지에서 태어난 느디님족의 후손들일 수도 있었다. 성전 일을 하려면 30~50세 정도의 성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조상들처럼 종의 신분으로 성전의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선택을 한 것인가?
성전의 사람들, 레위 인들은 성전 재건에 관심이 없었다, 이는 바벨론에서 세속화되어버린 결과이다. 성전 재건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성전 중심의 삶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을 그들이지만, 그 영광보다는 그 수고로움에 다시 구속되고 싶지 않았고 편하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였다. 성전 중심의 삶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헌신과 수고와 섬김이 필요하다. 황폐하게 무너진 성전의 재건과 불모지와도 같은 곳에서 그들이 살아갈 것을 생각해보니 엄두도 나지 않고 지금 포로지의 삶보다는 결코 나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다. 이곳에 신앙과 영적인 의미는 자리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문제만이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게 된 결과이다.
그 와중에 제사장들은 의외로 많았다. 같은 레위 인이지만 제사장은 구별되고 권위가 있고 명예로운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 또한 순수한 섬김 보다는 세속화의 물든 판단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느디님 사람들은 자신들을 다시 종으로 옭아매는 자리로 나아갔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이 그런 어려운 선택을 하도록 충동질했을까?
수백 년 내려온 종살이의 고리를 끓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아니면 진실로 성전의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안 것일까?
중세 수도원에서 부엌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로렌스 형제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았던 것일까?
비록 노예로 성전에서 힘들고 천한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하여
그 일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자신이 종이 되더라도 다시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무쳐 자원하게 만들었을까?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14년을 삼촌 라반의 종으로 살았으나 그 기간을 수일처럼 여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느디님 사람들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이랬을까?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것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즐거워하지 않았다면, 이런 경험과 믿음이 자손들에게 전달되지 않았었다면, 후손들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한 그들 아닌가?
이방 여인 룻이 생각이 난다. 시어머니를 따라서 가는 곳이 낯선 이방 땅이고, 힘든 여정이라 할지라도, 시어머니가 섬기는 그 하나님을 자신도 섬기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의 가치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한 것과 같지 아니한가? 삶의 전부를 드려서라도 붙잡고 싶은 진리가 아닌가?
느디님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떳떳하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의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 일이 아무리 천하고 힘들어도 그 가치가 어떤 것인지 알았기에 ...
현대의 가장 무서운 적이요, 우상이며, 진정한 위기는 세속화이다.
어떤 기준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가치관, 세계관의 문제이다.
가치관이 어떠냐에 따라 한 인간의 삶이 결정되니 말이다.
시편 84편 10절
주님의 궁전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으며,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내 하나님 집의 문지기가 좋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일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쉽게 사용한다. 그리고 자주 가볍게 말하기도 한다.
과연 종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인가?
자유가 없는 삶이다.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나 판단과 선택이 허용되지 않는 삶이다.
고달픈 삶이다. 비전이 없는 것이 종이다. 멸시와 천대의 자리이다. 편함과는 거리가 멀다.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을 옭아매며 강제적으로 법에 복종하는 삶이다.
즉 자신을 버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목사들을 자칭, 타칭 하나님의 종을 넘어 거룩한 종으로 불려진다.
종에도 거룩한 종이 있는가? 종이면 다 같은 종이다. 종이 아무리 거룩해도 종이다.
삶은 종처럼 살지 않으면서도, 말로만 종처럼 행세하려는 위선적인 모습 아닌가?
느디님 사람들의 선택은 가장 뛰어나고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세속적인 잣대로 바라보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영적인 기준으로 바라볼 때만이 그 선택이 빛이 나고 가치가 증명된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고, 성도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느디님 사람들의 생각과 자세와 선택과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종이 될지라도, 성전의 문지기가 될지라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다짐과 섬김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도 세워진 공동체가 성숙한 공동체이고,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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