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2

남은 자들을 위한 요한계시록 1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4. 22. 11:05

 

[ 남은 자들을 위한 요한계시록 ]

스캇 맥나이트, 코디 매칫 지음

 

 

책소개

 

억측, 과장, 허위로 점철된 요한계시록 해석의 문제점을 폭로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이신 어린양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도전하다!

요한계시록은 두 도시,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이 벌이는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바벨론은 패배하고 새 예루살렘이 승리할 것이다.

이 놀라운 진실을 믿으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외딴 섬에 유배된 불온한 1세기 반체제 인사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강성한 제국 로마가 한낱 식민지인 예루살렘에게 패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당대를 향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였으며,

오늘 우리 또한 불의한 세상에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를 수 있는

놀라운 비전을 발견할 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1972

1부 처음 만나는 요한계시록

1. 너무 많은 잡설들
2. 누구를 위해 기록되었는가?
3. 요한계시록과 상상력

2부 연극 요한계시록

4. 바벨론의 정체
5. 바벨론의 특징들
6. 용과 그를 따르는 짐승들
7. 어린양
8. 충성된 증인

3부 극적 내러티브의 특징

9. 드라마 요한계시록
10. 막간 단상
11. 3×7=완성
12. 종횡무진하는 예언자들
13. 하나님의 심판인가 징계인가?
14. 환상, 정의로운 세상을 약속하다
15. 새 예루살렘을 상상하며
16. 새 예루살렘,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

4부 바벨론에서 살아간다는 것

17. 일곱 교회로 파고든 바벨론
18. 바벨론에서 예배하라
19. 예배는 증언이다

5부 지금 필요한 불온한 제자도

20. 오늘의 바벨론을 분별하는 네 가지 표
21. 바벨론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22.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 선언

부록
부록세대주의를 구성하는 일곱 세대
부록묵시란 무엇인가?
부록적그리스도
부록아마겟돈
부록고대 신화들
부록휴거의 짧은 역사
부록휴거인가 부활인가?
부록요한계시록은 판타지인가?
부록천년왕국
부록유토피아, 유크로니아, 진보주의
부록요한계시록의 노래들
부록진보주의의 진보

스캇 맥나이트 (Scot McKnight)

 

선도적인 복음주의 신약학자이자 초기 기독교와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의 권위자다.

영국 노팅엄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노스파크 대학교 종교학과 칼 올슨

석좌교수를 거쳐 노던 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탁월한 강사이자 이야기꾼으로 여러 매체를 통해 성서학뿐 아니라 신앙과 사회적 이슈에

관한 윤리적 통찰을 나누고 있으며 세계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신약학회(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회원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 번역된 저서로는 성서학자가 신학자에게 바라는 다섯 가지

가이사의 나라 예수의 나라(IVP), 로마서 설교」 「거꾸로 읽는 로마서(이상 비아토르),

하나님 나라의 비밀」 「예수 왕의 복음(이상 새물결플러스) 등이 있다.

또한 IVP 성경비평주석 신약(IVP)의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NICNT 신약 주석 시리즈의

빌레몬서」 「골로새서(이상 부흥과개혁사) 등 여러 신약 주석의 집필에도 참여했다

 

코디 매칫

 

노던 신학교에서 스캇 맥나이트의 지도 아래 신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캐나다 캘거리의 퍼스트어셈블리 교회의 상주 장학생으로 연구 활동을 계속하면서

상담 치료사인 아내, 딸과 함께 캘거리에서 살고 있다.

 

 

 

 

 

 

 

책 속으로

 

요한계시록은 특정한 시간을 예측하는 신묘막측한 비서가 아니라 특정 시대를 넘어서는 신학이다. 장차 있을 일을 못 박은 예언서로 이 책이 둔갑하는 순간,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는 이 책에서 종적을 감춘다. 시대를 넘어 비극의 틀에 갇힌 역사와 그것의 반복적인 속성은 요한계시록이 그려 낸 바벨론을 끊임없이 현실로 소환한다. 그런데도 교황이 적그리스도이고 러시아나 유럽 연합은 곡과 마곡이며 국가 형태로 이스라엘이 거듭나리라는 예언을 남발한다. 이것은 우리 세계의 바벨론에 맞서 분별력을 갖춘 제자’, ‘불의한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가 되라는 요한계시록의 요구를 묵살하는 짓이다.
--- 1. 너무 많은 잡설들중에서

상상력은 눌린 자, 낙망한 자, 방랑자, 갈망하는 자도 위로한다. 요한계시록에서 범람하는 숱한 상징과 이미지들을 오감으로 체험한다면, 아무리 더딜지라도 용기를 잃지 않고 절망이 가득히 내린 설원 한가운데를 저벅저벅 걸어갈 것이다.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더욱 굳건히 신뢰할 것이다. 어떤 독재자나 폭군이 와서 삶의 자리를 짓밟아도 우리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판타지나 픽션의 세계와 꽤 비슷하다 할지라도 판타지나 픽션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다. 그러한 상상력에 힘입어 요한은 나아감과 멈춤, 새로운 나아감과 더 많은 멈춤으로 가득 찬 텍스트를 생산했다. 요한은 자신의 묵시록을 통한 여정에서 상상력을 자극하여 우리를 불의한 체제에 저항하는 제자로 형성시킨다.
--- 3. 요한계시록과 상상력중에서

거듭 강조하지만, 요한계시록을 읽는 수많은 방법 중에서 사자가 어린양임을 모르는 경우는 없지만 어린양이 이 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무심코 지나치곤 한다. 그런 해석 방식을 따르면 어린양이란 아마겟돈의 요란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칼을 움켜쥔 채 승리한 사자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기독론은 이 일이 언제 일어날지, 어디서 일어날지, 누가 적그리스도가 될지를 두고 억측하기 십상이다. 그렇게 요한계시록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만다. 이 사자는 (우리가 곧 보겠지만) 선혈이 낭자한 전장에서 칼 대신 비폭력의 무기,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어린양이다.
--- 7. 어린양중에서

세 번에 달하는 일곱 심판을 이해하려면, 공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행위를 요청하며 정의를 확립해 달라는 기도로 이 모든 심판을 품어야 한다. 이 심판은 보복을 도모하지 않으며, ‘샤덴프로이데’(타인의 불행에 기쁨을 느끼는 마음)를 부추기지도 않는다. 승리주의나 식민주의와도 무관하다. 결코 그런 일에 동참할 수 없다. 불의가 제아무리 참람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참화를 끝내 바로잡으신다. 세 번의 일곱 심판은 순차적으로 일어날 처절한 보복의 연대기가 아니다. 세 심판은 따로 돌아간다. 하지만 필요할 때마다 한목소리가 되어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세우사 바벨론의 악은 소멸되고, 새 예루살렘은 분명한 현실이 될 것이라고.
--- 11. 3x7=완성중에서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네 삶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으로 이끈다. “우리의 신앙은 국가 및 국가권력과 너무나 긴밀하지 않은가?” 기독교 국가주의는 4세기부터 교회를 감염시켰다. 로마라는 국가와 교회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오랜 세월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제 교회가 정부나 국가, 군의 관할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와 다를 게 없는 뒤섞임 속에서 제국의 상징은 국가주의와 종교의 상징으로 변모하고, 종교적 국가주의는 그리스도를 한낱 자기 권력의 수하로 두려 한다. 우상숭배자들은 국가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기꺼이 종교를 이용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교회에 국기가 스스럼없이 나부끼고 있지 않은가? 제자로 훈련받아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국가주의의 망령을 분별하고,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제자로서 그 망령에 저항한다. 요한도 옳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 17. 일곱 교회로 파고든 바벨론중에서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에서 어린양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한다. 이 책을 잘 읽으려면 하나님의 정치’(theo-politics)라는 관점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요한계시록은 한결같이 제자도의 공공성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은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계시하면서, 용과 야수들과 바벨론을 분별하는 법을 함께 보여 준다. 사회 참여에 나선다면서 하나님을 사적인 삶의 언저리에 남겨 둔다면 요한계시록을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한다. 이 책은 하나님의 정치만이 유일한 정치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피오렌자가 거듭 일깨워 주듯이, 요한계시록은 정의를 부르짖는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 직접 속해 있을 때만 우리에게 적절한 신학적-윤리적 답을 내어 줄 것이다.”

--- 22.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 선언중에서

 

 

 

 

출판사 리뷰

 

스캇 맥나이트가 되살린 요한계시록의 진정한 메시지,
이 책은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기독교 제자도 선언이다!

마침내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의 혼란스러운 아름다움, 그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다. 맥나이트와 매칫은 억측과 과장, 허위로 점철된 해석들을 폭로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곧 어린양의 길에 대한 참된 예언을 풀어 준다. 요한계시록 읽기는 불의한 체제에 맞서는 제자들인 하나님의 백성을 집결시키는 나팔 소리다.”


_마이클 고먼, 미로슬라브 볼프, 린 코힉, 베스 앨리슨 바 추천

1972년 겨울, 고등학교 2학년이던 스캇 맥나이트는 개인적인 회심을 경험했다.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으며, 기독교 신앙에 열광하는 열혈 고교생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렇게 성경을,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펼치게 된 그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묵시록, 종말론, 휴거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탐닉했다. 당시에는 70년대의 세계사적, 정치적 사건들이 성경과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 억측하는 게 대유행이었다. 세상의 파국이 코앞에 이르렀으니 위를 올려다보지 않으면 결국 버려지고 남겨질 것이며 온 세상이 불타 버릴 것이라는 확신이 넘쳐 났다.

스캇 맥나이트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억측을 오랫동안 믿었다. 10대 시절뿐 아니라 심지어 신학을 공부하던 청년 시절과 갓 교수가 되었을 무렵까지 진심으로 믿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교회가 아직 이 땅에 머물러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그 많던 설교자와 작가들이 남발하던 예언이 다 허풍이었다는 말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요한계시록을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난도질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억측에 기반한 요한계시록 읽기는 교회를 병들게 하고 현실 도피를 가르칠 뿐이다. 이런 해석에 경도된 교회는 이 경이로운 책에 집약된 저항 정신을 상실할 것이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일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와 천년왕국을 두고 억측을 남발하는 책이 아니라면 도대체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21세기 미국 복음주의는 어쩌다가 그 신학적 기반을 상실했는가? 어쩌다가 그들 자신이 싸워야 할 괴물이 되었는가? 두 저자는 교회, 특히 복음주의 진영을 향해 요한계시록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은 불의한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도를 요구한다. 오늘날의 바벨론에 거주하면서도 그것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라고 도전한다.

요한계시록의 예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는 우리 곁에 현존하는 바벨론을 분별하라고, 순응주의자가 아니라 반체제 인사가 되라고 가르친다. 수많은 해석들이 누가’, ‘어디서’, ‘무엇을하는가에만 집착하다 보니 우리는 참된 제자도의 메시지를 놓치고 말았다. 이 책의 목표는 바벨론이 시공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통찰력을 가지고 요한계시록 읽는 법을 배우고, 바벨론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충성된 증인이 될 수 있는지 알아가는 것이다. 요한이 대언하는 메시지는 강렬한 빛이 되어, 세상 속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바벨론의 실체를 훤히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바벨론에 공모한 교회들의 만행도 드러날 것이다.

미국의 신학적, 목회적, 정치적 흐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 사회와 교회에도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긴요하다. 요한계시록은 두 도시,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이 벌이는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용의 수하에서 나와 어린양의 편에 서야 한다. 마침내 바벨론은 패배

 

하고 새 예루살렘이 승리할 것이다. 이 놀라운 진실을 믿으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외딴 섬에 유배된 불온한 1세기 반체제 인사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강성한 제국 로마가 한낱 식민지인 예루살렘에게 패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당대를 향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였으며, 이를 통해 우리 또한 불의한 세상에서 어린양 예수를 신실하게 따를 수 있는 놀라운 비전을 발견할 것이다.

 

 

추천평

 

적그리스도와 천년왕국을 두고 억측을 남발하는 책이 아니라면 도대체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스캇 맥나이트와 코디 매칫은 교회, 특히 복음주의 진영을 향해 요한계시록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은 불의한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도를 요구한다. 도전적이면서도 목회적인 이 책은 오늘날 교회와 세상이 직면한 새로운 바벨론이라는 세력을 분별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필독서가 분명하다.
- 마이클 고먼 (세인트메리 대학원대학교 성서신학 석좌교수,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새물결플러스) 저자)

 

성경에서 가장 당혹스러우면서도 희망이 서려 있는 본문을 다룬 너무나 흥미롭고 흡인력 높은 책이다. 어떻게 하면 바벨론에 거주하면서도 바벨론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집이요 창조의 목적인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면서도 세상에서 의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 요한계시록은 그 길을 가르쳐 준다.
- 미로슬라브 볼프 (예일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예일 신앙과문화연구소 소장, 배제와 포용(IVP) 저자)

 

마침내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의 혼란스러운 아름다움, 그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다. 맥나이트와 매칫은 억측과 과장, 허위로 점철된 해석들을 폭로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곧 어린양의 길에 대한 참된 예언을 풀어 준다. 요한계시록 읽기는 불의한 체제에 맞서는 제자들인 하나님의 백성을 집결시키는 나팔 소리다. 우리는 오만과 탐욕, 착취와 군사력으로 구축된 오늘의 바벨론에서 공적인 제자도를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궁극적으로 요한계시록의 진정한 중심, 즉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경배에 초점을 맞춘다.
- 린 코힉 (휴스턴 신학교 신약학 석좌교수, NICNT 에베소서(부흥과개혁사) 저자)

 

탁월하고도 거침없는 속도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들은 어쩌다가 자신의 신학적 기반을 상실했는가? 어쩌다가 그들 자신이 싸워야 할 괴물이 되었는가? 그 진실을 이 책은 명확하게 보여 준다. 그리고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가 되라고 용기를 불어넣는다. 우리는 이제 용의 수하에서 나와 어린양의 편에 서야 한다. 저자들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미몽에 그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선사한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요한계시록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강렬한 해석을 제공한다. 덕분에 우리는 기괴한 예언과 통속 소설에서 벗어나 복음의 진리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필독을 권한다.
- 베스 앨리슨 바 (베일러 대학교 역사학 교수, 처치 걸: ‘성경적 여성을 형성한 역사 속 결정적 장면들

 

 

 

 

 

너무 많은 잡설들

 

크리스토퍼 로랜드 : “미래에 관한 예언들의 저장고가 된 꼴이다.

기독교인 대부분이 억측침묵이라는 갈림길에 있고 대부분이 침묵을 선택했다.

허다한 목회자들이 요한계시록 설교는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2-3장의 일곱 교회

혹은 책 끝머리에 자리한 새 예루살렘처럼 온건한 메시지나 구절에 안주한다.

 

왜 집착을 버리고 침묵을 선택했을까?

 

열광주의자들의 천국

 

G. B. Caird열광주의자들과 분파주의자들의 천국이 아닌가!”

메슈 서튼은 미국 문화와 역사가 열광주의자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4부. 바벨론에서 살아가다는 것

 

17장. 일곱 교회로 파고든 바벨론

 

묵시문학 전공자인 크리스토퍼 롤랜드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통념을 반박한다.

"묵시가 무엇인지 묻지 말자. 묵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묻지 말자.

이렇게 묻자.

이미지들과 구상들이 어떵게 작동하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키치고 있고 어떻게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가?"

이 책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인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는

우리가 너무나 다루어 보고 싶은 질문이었다.

 

요한계시록의메시지를 제자도와 연결시키려 했던 이들이 소수 있었지만,

요한의 환상에 담긴 제자도의 본질에는 이르지 못했다.

바벨론 가운데서 살아가되 그 체계를 거부하는 제자도를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자도야 말로 요한계시록이 신약성경 다른 책에 비해

탁월함을 자랑하는 지점이자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지점이다.

 

요한계시록을 읽는다는 것은 이 책이 누구를 위해 기록되었는지 안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은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자들'( dissedents)을 위해 기록되었다.

또한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도 파악해야 한다.

이미 살펴본 대로, 상상력을 통해서다.

더구나 이 책이 바벨론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창조와 언약에서 시작해 그리스도를 거쳐 바벨론에 자리한 교회를 다루고 새 예루살렘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의 큰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바벨론이 어둠 속에서 호시탐탐 교회를 집어삼키려던 환경 가운데서

요한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첫째,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일곱 교회 제자들은

바벨론이 어떻게 파고들어 오는지, 어떤 파장을 남기는지 배워야 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바벨론이라는 바다에 빠져 사는 사람에게

바벨론의 묘한 기만술은 눈에 포착되지 않는다.

바벨론을 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이다. 호화로움에 눈먼 세상이다.

어린양의 길이라면 끈덕지게 달라붙어 기어코 어깃장을 놓는 세상이다.

오만이 판을 치며 강력한 군사력의 비호 아래 떵떵거리는 바벨론 아닌가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이 새상에서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들ㄲㅀ는 세상이요, 닥치는 대로 살림살이를 파괴하고 착취하는 세상이다. 

권력과 명예에 기반한 위계질서가 고착화된 답답한 세상이자, 

오만과 욕망을 동력 삼아 돌아가는 세상이다. 

이곳에서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바벨론에 살면서 어떻게 바벨론을 탈출할 수 있겠는가?

 

일곱 교회는 바벨론을 말끔하게 도려내지 못했다.

바벨론은 에계해의 아침 안개처럼 세상 곳곳으로 스며들었고,

일곱 교회 신도들의 삶에 눌어붙었으며, 그리스도에게까지 뻗쳐 있었다. 

그런 바벨론에서 어린양을 따르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린양의 얼굴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장에서 보았듯이, 바벨론에서 체계를 거부하는 제자로 살아가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항구에 우뚝 선 거상

 

밧모섬에서 멀지 않은 로도스섬의 항구에는 30미터 높이의

태양신, 헬리우스(Helios)동상인 '콜로서스'(거상)가 우둑 서 있었다.

로도스 거주자나 방문자들 누구나 주전 3세기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는 이 거상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그러나 요한이 소아시아 서부에서 예언 활동을 할 무렵만 해도

로도스의 헬리오스 거상은 이미 무너져 더 이상 서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로도스 거상 이야기는 워낙 잘 알려져 있었고,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영토에 들어서면,윌는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의 거상을 마주한다.

요한이 구약성경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언어를 풀어내는 환상 이야기를 들어 보자.

 

요한계리고 1장 12-18절

 

잊지 말자. 이 책은 온전히 일곱 교회를 위한 책이다. 

환상과 막간과 노래 모두 오로지 일곱 교회를 위한 것이다.

1장에서 마추치는 예수님의 거상은 우뚝 서서 각 교회를 응시하고 있는데,  항상 좋은 점만 보지는 않으신다. 

그래서 요한이 이 책을 썼다. 한 눈으로는 바벨론을, 다른 눈으로는 일곱 교회 하나씩 본다고 하는 요한은

"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알려 준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님의 책망의 시선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나머지 교회는 발가벗겨진 채로 그분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책망받은 교회가 저지른 죄악은 어린양의 길을 따라가면서 겪게 된 고초에서 비롯했다. 

바벨론이 교회를 좀먹었지만 그들은 어린양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하지 못했다.

이들 교회에서 발견된 바벨론의 징후는 무엇이었을까?

 

 1. 그들의 사랑이 식어버렸다(2:4).

 2. 그들의 가르침은 왜곡되었다(2:14-15, 20-23).

 3. 그들의 예배는 타락했다(2:14,-15, 20-23).

 4. 그들의 행동은 점점 어린양의 길과 어긋났다(3:1-2, 15-18)

 

언급된 문제들은 바벨론이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서 은밀이 활동 중임을 드러낸다.

새 예루살렘이 미래에 완성된다면, 바벨론은 지금 여기에 일관되게 가득하다. 

이는 무질서한 사랑, 왜곡된 가르침, 타락한 예배, 불경건한 행위에 순응하라고 강제하는 행태에서 드러난다.

웨스 하워드브룩과 앤서니 귀더가 말했듯이,

 "문제는 박해가 아니라 사앧적인 안락함을 약속하는 로마 제국의 유혹이었다.

  요한계시록의 청중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보다 적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곱교회에서 발견되는 네 가지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고 나서 우리는 바벨론에[서의 삶에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할 것이다.

그 삶은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항구에 거상처럼 우뚝 서신 그분이 이 장엄한 책의 세계로 오라며 우리를 반겨 주신다. 

 

(1) 무질서한 사랑

 

당대를 대표하는 다섯 도시 중 하나님 예베소 교회를 노려보시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신다.

 1. 나는 네가 이룬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노라.

 2. 나는 네가 악인들을 용납하지 않고 사도를 사칭하는 자들을 검증해 거짓됨을 드러낸 것을 아노라.

 3. 나는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며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 정도묜 잘했어! 라며 멈추시면 좋으련만, 그러나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폐부를 찌른 일침이었다.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2:2-4)

 

쉽게 풀어 보면 " 너는 평판이 좋은 편인 데다가 행실도 훌륭한 편이지만, 네 사랑은 식었고 변해 버렸다."

가만히 보면, 이혼을 앞둔 부부가 악을 쓰며 내뱉는 분노의 언어와 다름없다.

 

"이제는 사랑이 식었어. 전에는 그렇게 사랑하나도 유난 떨더니 다 변해 버린 거라고."

직장인이 동료에게 "어이, 자네는 열정도 없고, 집중력도 없고, 몸을 던지려는 자세도 없어"라고 돌직구를 던지는 것과 다름없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보셨고, 그들이 더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음을 아셨다.

이 날선 음성의 여음이 예언서에 울릴고 있는데, 그 소리의 가장 강한 곳을 꼽자면

호세아 1-3장에서 나오는 시각적 이미지지들이다. 

 

요한에게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핵심 덕목이다,

요한일서에는 '사랑'이 무려 24회 이상 나온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본질적으로 짝을 이루기 때문에

요한은 둘 중 하나만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바벨론에 대한 사랑을 배제시킨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하나미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살하신다( 3:1, 4:16).

구속받은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졌으니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3:14).

예수님의 생명(삶)이 참 사랑의 척도다(3:16, 4:9)

사랑은 남의 유익을 위한 일이며(3:17-18), 사랑은 하나님께 순종한다(5:3).

요한일서 4:7-11에서 요한은 사랑의 메시지를 요약하면서

사랑이 순환( reciprocation)의 원리를 따라 커져 간다고 설명한다.

   하나님, 그리스도, 어린양의 사랑을 보고

   사랑을 받아

   사랑이 돼라.

 

그렇다면  요한의 신학은 사랑의 신학이다. 문제는 에베소의 사랑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에베소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 무질서하게 변질된 이유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거나,

마틴 컬리의 해설처럼 예수님에 대한 적극적인 증언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다.

요한이 사용한 '뒤에 남기다', ' 풀어 주다'를 의미하는 '아피에미'인데

이는 '용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는 사랑을 풀어놓고 보내 버린 것이다.

회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직접 놓아 버린 것이다. 

 

기억하자. 요한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전부 아니면 전무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사랑하고 바벨론을 사랑하는 것이다.

바벨론이 바벨론만의 고유한 삶을 만들 수 있는 까닭은

충성과 신앙과 애정이 담긴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실천하면서 바벨론도 사랑하고 있었으니,

'바벨론을 사랑하고 있음으로 인해 그들의 선한 행실마저 무질서하게 뒤엉키고 마는 것이다.

 

요한 일서가 말하느 세 가지 무질서한 사랑,"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만족을 모르고 통제되지 않는 욕망은 직장에서 남녀관계, 가정에서의 부부 관계를 교란한다.

요한은 교회 안에서 무질서한 사랑을 분별해 내고 첫사랑을 다시 찾으라고 가르친다.

 

바벨론은 자기 연인들을 배신하고 결국 멸망당할 운명에 내몰린다.

바벨론에서 나고 자란 거짓 사랑은 사망의 하수인 역할을 한다.

이 무질서한 사랑의 배후 조종자는 용, 오직 죽음만을 추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무질서한 사랑의 문제 못지않게 왜곡된 가르침도 골칫거리였다.

요한은 이 두 가지 문제와 다른 두 가지 문제(타락한 예배, 어긋난 행실)를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에 

바벨론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한 권고를 할 수 있었다.

 

(2) 왜곡된 가르침

초창기 때부터 교회는 타락한 교사들이 일으킨 문제로 애를 먹었다.

예수님께 돌아온 이방인들에게도 모세의 율법을 강요하던 갈라디아 사람들을 떠올려 보라.

로마서에서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에에 벌어진 골치 아픈 상황을 생각해  보라.

고린도 교회는 그런 사례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도 곤란하다.

골로새 그리스도인들 사아에 나타난 이상한 가르침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이 오늘이라도 오실 테니 더 이상 일하지 않기로 한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다.

기억하자. 복음이 도래하는 곳마다 바벨론의 거짓 교사들이 참신하게 날조한 가르침을 들고 뒤따라 들어온다.

 

일곱 교회도 왜곡된 가르침을 설파하는 교사들 때문에 애를 먹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들이 설파한 가르침이 흐릿해 보이지만 현지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요한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서로 다른 교회,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의 이야기다.

 

 계 2: 14-15, 2:20-24

 

요한은 거짓 교사들인 발람, 니골라당, 이세벨, 사탄을 직접 호명한다.

"발람과 이세벨의 교훈'은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행태로 나타난다.(온몸과 온 생애가 동원되는 우상숭배를 말한다.)

구약 속 발람의 경우를 보변 바알 숭배에는 모압 여자들과의 음행이 포함되어이따(민 25:1-5, 31:16).

'니골라당의 교훈'은 파악하기 까다로운 편인데, 언어유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니카오'(nikao)는 승리나 정복을 , '라이탄'(litans)은 사람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전해 줄 승리의 비기를 간직했던 어떠 ㄴ자일까?

아니면 추종자를 거느리던 니콜라우스라는 특정 교사일까?

흔히들 말하는대로 니골라당은 우상에게 봉헌한 음식을 거리낌 없이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요한은 이런 행태가 거짓 신 숭배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요한계시록에서 거짓 신들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것은

용과 야수와 바벨론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자, 그들의 무리에 가담하는 것이었다.

 

요한의 가르침을 보면, 그는 1세기 상황에서 시의적절한 판단을 내렸고,

시기에 따라 매우 유연하고 전략적인 태도를 취했다.

고린도전서 8-10장과 로마서 14-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일부 그리스도인이 이방 신들에게 바쳤던 제물을 시장에서 구입해 먹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로마서 1114-15장이 이 문제를 말라고 있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듯이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자신의 길을 선택할 자유를 주라고 조언한다.

잊지 말자. 바울이 자신의 가르침 대부분을 구축한 곳이 바로 에베소인데, 이곳은 이제 요한의 사역 중심지였다.

요한이 글을 쓸 즈음에는 바울과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을 수도 있고,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 대한 관례가 심각하게 악화된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요한의 가르침은 매우 강경했다.

"그런 걸 먹지 마십시요! 우상을 숭배하는 일입니다."

 

또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아야 하 ㄹ점은 요한이 '발람'과 '니록라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대목이다.

요한계시록 2;14에서 요한은 바벨론의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우상의 제물"을 말한 뒤에 성적인 죄, 행음을 언급한다.

성적 부조덕은 성경과 특히 예언서에서 다른 신 숭배를 가리킬 때9 동원하는 가장 일반적인 은유이므로, 

우상의 제물과 성적 부도덕은 일종의 동의어로 여겨진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묘사하면서 성적 부도덕과 연결시킨다.

 

  사 57:3, 사 57:5, 사 57:8-9

 

아마도 요한은 이사야의 말을 되풀이하면서 '성적 부도덕'을 거론하는 것 같다.

요한은 우상숭배를 부각하지만, 발람이 모압 여인과의 육체적 성관계를 조장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요한도 내심으로는 성적 부도덕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요한은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할 때 우상의 제물과 성적 부도덕을 결합시켰다(2;20).

거짓 예배와 성적 관행이 그리스-로마 세계를 잠식한 상황에서

이런 일에 가담하는 것은 바벨론의 방식에 동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국에 참여하는 것은 어린양을 등지고 멀어지는 것과 같다.

 

우대교의 예수 운동은 로마의 방식과 근원적으로 달랐다.

자기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하난미께서 끊임없이 계시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신들은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도덕을 배웠고, 그리스도인들은 모임에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로마의 종교 행사가 열리는 사당과 신전은 도덕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윤리와 종교는 제국에서 완전히 따로 노는 세계였다.

윤리와 종교의 괴리, 바로 이 점이 새로운 삶에 걸맞은 제자도를 모색하는 회심자들에게 묵직한 파장을 일으켰다. 

회심자들은 예수님게로 돌아섰다 해도 이방 신전의 제의에 계속 참여하는 데 도덕적 거리낌이 없었다.

사당에서 제의에 참여하는 일도 도덕적으로는 중립적이니 거리낄 수 없다고 믿었다.

요한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요한이 볼 때 그런 곳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용의 다스림에 투항하는 삶을 체화하는 것이었다.

거짓 교사들과 왜곡된 가르침 이면에는 사회적 신분의 사라디(CRUSUS HONORUM: '명예로운 경로'라는 뜻으로,

로마 공화정과 초기 제정 시대에 귀족들이 으레 거치는 공직의 단계들을 뜻함) 를 타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들끓고 있다.

우뚝 솟은 예수님의 거상은 거짓 가르침 속에서 도사린 타락한 예배와 우상숭배를 노려 보셨다. 

왜곡된 가르침은 타락한 예배를 낳는다.

 

 

(3) 타락한 예배

 

찬양이 예배에서 나름의 몫을 담당한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예베에는 함께 부르는 찬양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배한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께 삶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께 전 생애를 헌신하는 것이라면, 다른 무언가에 굴복하는 삶의 차원들을 예배를 타락으로 이끈다. 

요한이 볼 때,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행위, 육체적 .영적 음행, 경제적 착취 행위는 모두 거짓 예배로 귀결되었다.

우리의 헌신이 향하는 곳은 하나님 아니면, 거짓 신들 중 하나인데,

만일 거짓 신들에게 헌신한다면 그것은 타락한 예배일 뿐이다.

 

바벨론은 예배를 개인의 취향에 따라 분ㄹ규하지 않았다.

다들 집에 신당을 두고 있었지만, 신과 관련ㅌ된 여러 절기나 축제에 즐겨  참여했고, 

신에게 제물도 바치고 시장으로 나온 제단 음식을 구입하기도 했다.

도시와 마을 곳곳마다 신을 부르는 예술이 여러 갈래로 번창했다.

그렇게 바벨론 사람들은 점점 하나의 종교적 단일체가 되었는데, 

이는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부모가 이미 선택했기 때문이다. 

'경건한'(pietas)사람은 사회, 종교, 경제, 정치 분야에서 공동체에 명예로운 방식으로 참여하는 사람이었다.

경건과 훌륭한 로마인이 되는 것은 늘 짝을 맞추는 가치였다.

로마 민족주의의 실체는 경건이었다. 

 

따라서 로마(그리고 바벨론)의 신들을 떠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과 일곱 영에게로 돌이키는 선택은

당대의 사회와 가문, 가정 그리고 바벨론이 구축한 세계 전체를 등진다는 것을 뜻했다. 

로마는 황제로 시작해 지역 통치자, 경제와 군대, 신전과 신이 상호 연결된 사회적 네트워크였다.

일곱 교회 신자들 입장에서는 기존 사회를 떠나지 않고

이런 신들과 여전히 통해 있음을 드러내는 삶이 당연해 보였을 테니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이런 관행이 바로 기존 체계와 '친밀하게' 살거나, 아예 거기에 '소속'되거나,

아니면 당대의 문화 속으로 완전히 '동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휘말리지 않으려면 일상에서 날마다 훈련을 받아야 했다.

 

바벨론에서 용은 하나님을 대적함(이스라엘, 보좌에 계신 하나님, 어린양을 대적함), 호화로움, 오만과

부에 탐닉하는 삶을  핵심 전략으로 구사했다.

이 삶의 방식은 신자들이 로마의 생활 방식에 순치되도록 유혹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끊임없이 교란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직장의 힘을 이렇게 평가했다.

"일처의 호나경이 당신을 서서히 변화시키는 힘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 

특정 회사에서 일하기로 선택한다면 그 회사에서 일하는 부류의 사람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브룩스의 통찰을 1세기에 적용하면

이 거짓 교사들은 이상적인 시민이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기를 소망했고,

그저 불만 없이 바벨론에서 편히 살기를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벨론이 이들을 모범적인 로마인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바벨론의 정신을 체형한 바벨론의 화신이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네 삶을 고나통하는 핵심 질문으로 이끈다.

"우리의 신앙은 국가 및 구가권력과 너무나 긴밀하지 않은가?"

기독교 국가주의는 4세기부터 교회를 감염시켰다.

로마라는 국가와 교회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오랜 세월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제 교회가 정부나 국가, 군의 관할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와 다를 게 없는 뒤섞임 속에서 제국의 상징은 국가주의와 종교의 상징으로 변모하고,

종교적 국가주의는 그리스도를 한낱 자기 권력의 수하로 두려 한다.

우상숭배자들은 국가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기꺼이 종교를 이용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교회에 국기가 스스럼없이 나부끼고 있지 않은가?

제자로 훈련받아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국가주의의 망령을 분별하고,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제자로서 그 망령에 저항한다.

요한도 옳다 하면서 고개르 ㄹ끄덕일 것이다.

 

(4) 일관성 없는 행동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은 도덕성이 서로달랐다. 폼페이를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남녀가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행진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폼페이에서 발견된 한 낙서에 폼페이가 '소돔과 고모라'로 표현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로마인의행실은 유대교인이나 기독교인의도덕적 삶에 비해 워낙 달랐기에

어느 쪽으로 회심하든 도덕적으로 대단히 버거운 선택이었다. 

물론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양쪽 모두 정의에 대한 열망을 으뜸가는 가치로 여겼고,

평화와 사랑의 정신을 항상 벗 삼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이들은 이웃들과 달리 당대의 음란한 관습과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청교도를 떠올릴 때 그려지는 모습과 여로모로 닮았을 것이다.

무론 그리스도인들의 도덕률이 사뭇 달랐다 해서 공동체 일원 모두가 그 도덕률에 따라 생활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수사학적인 목적에 비추어 보면 요한의 세계는 둘 중 하나다.

예수를 따를 것인가, 용을 따를 것인가 ! 양자택일이다.

요한은 특별한 경우에는두 세계 중 어디에 속하는지를 가려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에는 시간을 솓지 않는다.

작은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목적 땝문이었다.

요한의 목적은 우유부단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미적거리지 말고 모든 것 바쳐 헌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의 언어를 보면 디트리히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에서 표출하고 있는 양자택일의 언어가 떠오른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를 설교한다. 값싼 은혜는 공동체의 훈련이 없는 세례다.

인격적 고백 없는 죄사함이다. 제자도 없는 은혜요 십자가 없는 은혜며,

성육신하고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다."

 

우유부단함과 값싼 은혜가 바로 일곱 교회에서 발견되는 일관성 없는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게 그들의 행위와 후한 평판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감미로운 수사를 던지신다.

그리고 슬며시 다가오시더니 느닷없이 매서운 눈으로 교회를 쏘아보고

그들의 미래에 생명이 아닌 사망이 놓여 있다며 으름장을 놓으신다.

그분은 사데 교회의 시작이 좋았음을 언급하시지만 허투루 미숙하게 마무리될 삶을 내다보신다.

예수님이 사데 교회에 말씀하신 내용은 한 단계 발전되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신다.

여기서 요한의 말을 가감 없이 인용할 탠데 독설적인 일침으로 점철된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계 3:15-18

 

예수님은 여러 은유를  동원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일관성 없는 행동과 이중성과 위선적 행태를 고발하신다.

예수님의 날선 말씀이 향했던 곳이 '외식'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미지근하다'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오해를 받았다. 

덕분에 호소력 있는 설교가 그토록 무수하게 양산되었는데도 말이다.

진자 문제는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것이다.

예수님이 분명히 밝히셨듯이 그분은 차갑거나 뜨겁거나, 둘 중 하나만 좋아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이렇게 바꿔 볼 수 있다.

" 나는 너희 행실이 차갑게 식어 있지도 않고 부글부글 끓지도 않음을 알고 있다."

여기에 몇 마디를 더해 세차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뜨겁게 꿇거나 차갑게 식기를 바라노라."

아무래도 그분은 여기서 라오디게아의 지리적 위치를 이야기하시는 것 같다.

인근 도시인 히에라볼리에는 산비탈로 흘러드는 온천이 있는데, 덕분에 군데군데 광물 조각이 흰빛을 내고 있엇다.

아쉽게도 고고학자들이 아직 발굴하지 못한 또 다른 인근 도시인 골로새는, 도시 곁으로 리쿠스강의

세차고 차가운 물결이 흐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히에라볼리에는 펄펄 끓는 온천이, 골로새는 차가운 지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아니었다. 라오디게아 가 헤에라볼리에서 가져오는 물은 더 이상 뜨겁지 않앗고, 

골로새에서 가져오는 물은 처음처럼 차갑지 않았다.

라오디게아의 물은 그들의 행실에 대한 은유다.

그들은 온천수처럼 '치유하지도' 못하고, 차가운 강물처럼 '신선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을 뱉어 내거나' '그들을 토해 버릴'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말씀이며, 바벨론이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값싼 은혜의 삶으로 미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일침을 놓으신다.

"너희는 부유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바벨론의오만함일 뿐이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실제로는 부유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본 그들의 실체를 강렬한 이미지에 실어 이렇게 표출하신다,.

"너희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엇고 벌거벗었노라"

그분은 당장 행동하라고 촉구하신다. 곁눈질하지 말고

예수님께 가서 진정한 부(금)와 옷과 치료하는 약을 구입하라 !

바ㅣ꿔 말하면 그들에게는 은혜에서 우러나오는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사데와 하오디게아의 신자들은 자신들의 행로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햇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어린양의 길이 아닌 용의 길을 가고 있다 말씀하신다.

 

살펴본 내용은 요약하자면, 통속적인 요한계시록 해석은

일곱 교회의 죄악이 바벨론과 연동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바벨론을 먼 미래에나 마주칠 제국으로 속단하기 때문이다.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 이야기 뒤에 무려 열다섯 장에 달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통속적인 해석은 이 두 가지 오해가 겹친 탓이다.

우리는 다시 바벨론을 응시함녀서 일곱 교회의 문제가 바벨론과의 타협에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가르친다.

그것은 어린양의 충성된 증인이 되어 바벨론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역사의 가르침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한다. 

 

질서, 왜곡, 타락, 일관성 상실이 부르는 파괴

 

바벨론은 일곱 교회로 슬금슬금 파고들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의 바벨론다움이다.

늘 그렇다. 바벨론에게는 하나의 목표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배(DOMINATION)하는 것이다. 지배는 항상 충성이라는 희생을 치러야 한다.

바벨론(로마의 방식)이 교회를 장악하는 데 300년이 걸렸고, 그것은 나름의 방식으로 교회를 무너뜨렸다.

하나님의은혜가 없었다면 교회는 완전히 멸절되었을지도 모른다.

바벨론이 교회를 잠식한 여파가 워낙 크기에 잠시 멈춰서 이 문제를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황제가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되자,

제국은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더니 결국 한 몸을 이루었다.

교회와 제국, 제국과 교회는 서로의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이런 동화 현상을 '콘스탄티누스주의'라고 부르곤 하는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기독교 오아국'(Christendom) 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는 기독교가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에 서 권력을 추구하는 제도적 정치권력이 된 과정을 총칭한다.

주후 306년부터 337년까지 로마의 호아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이 과정을 시작햇는데, ㄹ고마 제국을 '기독교 오아국'으로 바구는 데 반세기가 걸렸다.

콘스탄티누스는 본인의 권력을 호라용해

  교회를 세우고,

  이방 신정을 철폐하고

  추방된 그리스도인을 가정과ㅓ일터로 복귀시키고

   교회의 신학을 '단일화'하고

  교회를 위협하는 서리에 제갈을 물리고 추방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자비와 관용을 베풀기고 했지만 결정적 협잡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국가가 교회 권력이 되는 것이었다. 국가는 국가가 하 ㄹ일을 하고 전쟁과 폭력을 동원해 이를 수행한다.

로마사 전문가 램지; 맥멀렌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 제국에서 콘스탄틴누스처럼 피에 굶주리고 포악무도한 사람이 왕좌에 오른 적은 없엇다."

그는 그리스도인 황제로 유명했지만 폭력성으로 악명이 높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검을 움켜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틴누스는 기독교 왕국으로 첫발을 떼었을 뿐이다.

교회오아 국가가 완전히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교 왕국이 된 것은 주후 379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다스리던 때였다.

기독교 왕국은 이때 본화되어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엇고 전통으로 굳어졌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왕조(그는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시조다) 체제를 되살렸고

  서로마와 동로마 제국을 '통일했고.

  주교의 권한을 제국에 귀속시켰고

  기독교 신앙 고백을 요구했다.

 

이러한 정책의 신학적 기초는 단순했다. 하나님이 한 분(유일신교)이듯 황제도 하나이며,

황제는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해야 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에 힘입어 제국은 '기독교화'를 완성하고 기독교 왕국이 된다.

한층 수위를 높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콘스탄티누스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까지 쭉 그래 왔듯이,

교회가 정치권력과 결탁할 때 바벨론으로 변질된다. 기독교 왕국은 교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과오였다. 

 

바벨론과 제휴하는 바람에 교회는 결국 제국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바꿔 말하면, 교회는 소명을 저버리고 제국의 권력에 투항했다.

가이사랴의 에우세비오스(약 260-340년)는 콘스탄티누스와 구면이었고 당시 벌어지던 사태의 목격자였으며

이후 아첨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라는 이야기를 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세 배의 복을 받은 자'라는 칭호를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쳤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이 사람을 인류에게 경건의 본에 대한 교훈으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군주 통치의 본으로 삼으사, 폭군 일당 전부를 이긴 승리자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인들의 파괴자로 임명하셨다.

   그 위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니 온 역사를 통틀어 봐도 그의 기록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도다.

 

콘스탄티누스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고 비극적인) 이야기는

그가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기 전에 십자가 환상을 보았다는 풍설일 것이다.

이 전쟁 덕분에 그는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서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에게 십자가 환상은 하늘에 나타난 메시지였다.

"이것(십자가)으로 이길지니라 !"라는 메시지에 이어 그는 그리스도가 몸소 열어 주신 환상을 보았다.

이곳이 바로 비극 중의 비극이 벌어지는 지점이다.

십자가가 그의 군사적 위용과 황궁, 심지어 그가 거느린 교회들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들의 구원자, 구세주, 은인"의 지위에 올랐지만 실제로는 잔인무도한 전쟁광이었고,

지배력을 늘릴 수만 있다면 겁박과 폭력을 완전히 동원해 위세를 부리는 황제였다.

물론 그의 기독교 신앙고백이 완전히 사기였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자비와 관용 없이 행했다는 것도 아니다.

입이 떡 벌어지는 교회(예루살렘의 성묘 교회가 대표적이다,)를 건축했다는 사실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가짜 기독교인이라고, 정치적 이득을 노린 개종자였다고 폄하하려는 게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두자. 십자가 깃발을 높이든 이 남자는 피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용의 술수를 동원해 어린양의 길을 흉물스럽게 짓밟는 사람이었다.

국가 권력에 투항해 수하로 들어간 교회에게는 폭력과 제국과 권력이란 꼬리표가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다.

 

마무리

 

독자들의 예상과 달리 일곱 교회는 바벨론의 오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교회 역시 2천 년 동안 바벨론의 길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요한의 권면을 듣고 바벨론이 교회 안으로 잠입하는 방식을 배운다면

우리는 분별력과 저항하는 자세를 두루 갖춘 제자가 능히 될 수 있다.

하나님과 이웃을 거부하는 비정함, 왜곡된 복음과 가르침,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과 성령을 소외시키는 타락한 예배

어린양의 방식과 어긋난 행실, 이 모든 것이 바벨론의 표지임을 분별해 내야 한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교회 내부에 바벨론이 암약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최고의 지표이자 경종이다.

우리가 어린양의 길을 체화하고 그분께 먼저 충성하는 일이 합당한 예배임을 거듭 확인한다면,

어린양의 길을 지켜 새 예루살렘을 향해 약진할 수 있을 것이다. 

 

18. 바벨론에서 예배하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부요에 눈이 먼 세상,

어린양의 길이라면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고

제 말만 옳다며 윽박지르는 오만한 세상,

군사력에 의탁한 채

온 나라를 다스릴 권세를 얻는 데 혈안인 세상,

끝없는 배신과 반목으로 내부에서부터 곪아 버린 세상,

만민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이를 양분 삼아 돌아가는 세상,

권력과 명성으로 줄 세우는 질서에 포획된 세상,

결국, 그렇게 오만과 욕망에 사로잡힌 채 돌아가는 세상,

이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벨론에 포위되었을 때, 바벨론에 투항하지 않으면서도 바벨론 '안'에서 살 수 있을까?

제국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늘 존재한다.

여기서 요한은 바벨론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를 추려서 보여 주겠다. 이전 장에서 보았듯이,

바벨론의 통치 영역은 그 끝을 알 수 없을만큼 깊고도 광활하다.

그러나 요한은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이 바벨론에서 살 길을 제시하는데, 그 첫 걸음이 바로 예배다.

 

                                          바벨론

         야수 1  -------            일곱 교회     --------    야수 2

 

  창조   -----------------------------------------------------------> 새 예루살렘

 

요한계시록의 구성을 다시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으로 시작해 1세기의 특수한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어진다.

요한은 그 일곱 교회를 위해 이 묵시록 전체를 썼다.

이 말이 뜻하는 바,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은 미래를 알려 준다는 명분으로

일곱 교회를 한낱 도구로 삼는 '무시간적 환상'이 아니라, 그 교회들에게(그리고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는 '시의적절한' 계시다.

그리스도의 거상이 일곱 교회에 본내 메시지를 읽은 뒤에 우리는 결정적인 교차점에 이르고,

여기서 하나님이 속히 이루실 놀라운 일을 듣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속히 원수를 제압하느 일은 뒷전이고,

일단 우리는 요한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끌린다.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우리는 바벨론에게 패배를 안기는 심판이 아니라 온 우주가 참여하는 예배를 만난다.

그런 다음에라야 우리는 어린양을 ,

인을 때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으로 경배를 받으시고 선포되시는 분을 환상 가운데 보게 된다.

그 일이 일어나야 인과 나팔과 대접 심판도 보게 된다.

물론 우리는 일곱 징계(심판)가 세 번에 걸쳐 펼처지는 장면을 목격하지만, 

천상 장면이 심판의 흐름 사이사이로 출몰하며 시선을 끊임없이 교란한다.

이 천상 정면은 대부분 예배하는 모습이다.

 

    요한게시록은 예배에 관한 책이며, 바벨론을 거부하는 제자들은 어린양을 예배한다.  

 

일곱 교회는 참혹한 바벨론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답은 예배다.

허다한 얼치기 억측가들은 요한계시록에 담긴 제자도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른바 최후의 바벨론을 탈출하는 데만 골몰했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 회피적 사고방식을 회피하는 것이 체제에 저항하는 제자도에 담긴 강력한 메시지다.

이 제자도는 우리가 함께 무릎 끓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어린양께 경배하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껏 읽어 본 요한계시록 고나련 서적들은 제자도를 외면하고 예배의 중심성을 하찮게 여겼으며

반체제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요구마저 묵살해 버렸다.

 

예배

 

바벨론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가 삶의 중심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에 앞서 잠시 시선을 돌려 복음주의권 학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유행을 하나 살펴보려 한다.

요즘 들어 습관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이런 유행에 제목을 붙인다면 '덕 윤리'가 제격일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배처럼 올바른 일을 꾸준히 습관으로 삼으면 체화된 습관이 우리를 올바른 사람으로 형성시키고,

올바른 사람은 올바른 상황에서 올바른 일을 하게 된다. 

몸의 습관은 인격을 형성하고, 좋은 인격은 좋은 행실로 이어진다.

이 이론의 주창자인 제임스 스미스는 이렇게 썼다.

 

  간단히 말하면, 마음으로 가는 길은 몸을 통하고, 몸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야기를 통한다.

  그런 점에서 예배가 작동하는 원리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형성은 성령이 일으키는 상상력의 전환이다.

  성령은 뼛속 깊이 스며드는 한 이야기, 세계 안에 존재하는 우리의 배경 이야기로 초대해

  그 이야기가 뿜어 내는 매력으로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요한이 어떻게 일곱 교회를 재형성하고 있는지 스미스는 그 진면모를 단숨에 드러낸다.

스미스가 발견한 요한의 핵심 방식은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들려주고,

습관으로 체화할 것을 독려하며,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는 것이다.

요한은 교회가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의 맥락 안에서 예배를 힘써 익히기를 바라고,

몸에 밴 예배가 마음 구석구석 깊이 번져 가 우리가 어린양의 동반자로 물들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습관은 그 자체로 작용하지 않는다.

관건은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자주 언급했듯이, 습관을 통해 우리가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에 이를 수 있는 이유는 

습관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형성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습관이 홀로 작용한다면, 습관을 반복하는 당사자들이 어린양의 길을 따르는 가장 충성된 증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로렌 위너가 보여 준 것처럼, 교회사를 통틀어 보면

가장 중요한 습관인 세례와 성만찬을 바르게 형성해 오기는커녕 마구잡이로 훼손한 교회들이 허다했다. 

위너가 제시하는 사례에 사례에 따르면, 중세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고난주간에 성찬례를 중단하고

유대인을 살해했다고 한다. 습관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습관은 늘 하나님의 영으로 충일해야 하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여햐 한다.

 

     요한게시록을 관통하는 핵심 습관은 바로 예배다.

 

지난 50년 동안 요한계시록을 다룬 작가 중 가장 매력적인 인사는 엘리자베스 피오렌자인데

그녀가 던진 질문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보템이 되는 좋은 질문이었다.

"요한계시록 읽기는 이 환상의 세계에 기꺼이 들어서는 사람에게 무엇을 선사하는가?"

초점을 좁혀서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예배를 통해 날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요한계시록은 무엇을 선사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답해 보겠다. 예배가 우리를 바꾼다.

이 예배는 전인적인 예배로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온몸과 마음과 목소리, 그리고 온 삶을 다해

감사하며 사는 것이며, 사사로운 내 삶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어린양께 투항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4-5장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막간이 틈을 만들어 우리를 보좌가 있는 알현소로 데려간다.

이곳은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요한은 독자들에게 신신당부하는데,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예배하려면 6-19장의 세 번에 걸친 하나미의일곱 징계의 결과를 이해해야 한다. 

 

찬송이 아니라 영가

 

그렇다 요한계시록에는 소름 끼치는 환상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환상도 어마어마한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수많은 노래 탓에

환상이 지닌 본연의 그림이 흐려지고 말았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요한계시록의 가사를 직접 가져온다.

이 아름다운 가사를 읽고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벅찬 희열이 차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음악이 들리는데도 가만히 집중해서 듣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 있을까?

이런 노래들에는 우리의 안온한 일상을 깨뜨리고 미지의 무엇가를 갈망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오랸계시록의노래는 총 아홉 개다.(4:8-11, 5:8-14, 7:9-12, 11:15-18, 12:10-12, 15:3-4, 16:5-7, 19:1-4, 19:5-8)

흔히 찬송이라 불리지만, 우리는 이 용어가 부정확하다고 보는 입장에 서려 한다.

왜? 찬송은 우리가 안온한 삶을 누리며 부르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 노래들은 안온한 자들의 말랑말랑한 흥얼거림이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의 절박한 부르짖음이었다.

단순히 구원을 기리는 찬양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정의를 갈구하는 탄원이었다.

이 노래들은 박해, 전투, 심판 장면을 중단시키고

우리의 시선을 비루한 땅의 현장에서 찬란한 천상상의 현실로 들어 올린다. 

그리고 억압받는 신자들을 더 이상 바벨론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가 아니라

그 체제를 당당히 거부하고맞서는 불온한 제자로 변화시킨다.

 

이 노래들에 안성맞춤인 명칭이 있다. 

이 아홉 곡을 '영가'(spirituals) 라 부르자.

아홉 곡을 '요한계시록의 아홉 영가'라 부른다면 예배를 채우는 음악과 몸짓과 공기가 어찌 변할지 그려지는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신약학자 브라이언 블론트가 보여 주었듯이,

미국 흑인 영가는 성경의 주요 주세, 특히 출애굽 해방과 출애굽기 15장의 '모세의 영가')모세의 노래)에서 파생되었고

영감을 받은 흑인 노예들은 영가를 통해 억압적인 노예제에 반응했다. 

흑인들의 생의 질곡이 담긴 이 영적 노래들은 출애굽이라는 테마를 빌려 자신들을 짓밟고 있던 노예제와 맞섰다.

그 모습은 요한의 아홉 영가가 바벨론의 길에 대항했던 모습과 매우 닮았다.

한번 생각해 보자. 미국의 옛 노예들은 분명히 백인이 하는 설교와 백인이 부르는 노래를 통해 성경을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비루했던 설교와 성경을 부여잡아 재주조하고 그 뜻을 새롭게 펼쳐

전대미문의 현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냈다.

그들은 동일한 단어와 텍스트를 사용해 백인들의 노예제를 미묘한 방식으로 전복시켰고,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운 흑인 공동체를 새롭게 구축했다. 

이는 전례 없는 사회적 상상력의 출현이었다. 

위대한 민권 사상가 중 한 명인 하워드 서먼은 흑인 노예들이 사용한 전복적인 방식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노예는 주인이 망쳐 버린 종교를 구원하는 일에 나섰다." 

노예들의 영가에 잠재되어 있던 전복적인 힘을 노예 주인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이 흑인들의 예배를 언뜻 보았다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전복적인 전술을 제외하고는 요한의 영가 아홉 곡을 살펴볼 길이 없다.

혹자는 요한의 교회에서도 그러한 역동성이 생동했을지 추측하기도 한다.

 

     아홉 곡의 노래는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고 어린양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블론트는 계속해서 말한다. 노예들의 애타는 음색은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언어의 옷을 입고 있는데도 이 세상의 변화를 가리키고 있었다. 

흑인 영가는 힘을 내어 "인내하고, 희망하고,저항하라"고 노래 부르는 이들을 토닥였다.

흑인 영가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를 뽀잠녀 즉흥 연주다.

상황에 따라 공연에 연주가 덧붙거나 빠지고 했고, 자유롭게 변주를 거듭하면서 흥에 겨운 춤이 따라오기도 했다.

요한계시록의 아홉 노래는 어디를 보아도 흑인 영가는 아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비교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요한게시록의 노래들은 제국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흑인 영가가 미국의 노예 제도와 맞서 있듯이 말이다.

똑같지 않지만 둘은 비슷하다. 그래서 아홉 노래를 '영가'로 바꿔 부르는 것은

현재의 우리가 이 노래를 읽고 들었 누습을 탈피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아홉 영가는 수많은 세월이 흐른뒤 나온 노예들의 영가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상황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에 [이 노래는] 현실의 역사적 상황에서 출발하되 그 상황을 훌쩍 뛰어넘어,

절망이 판치는 역사 한가운데서도 희망의 지평을 열어 주는 새로운 해석에 도달한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에게 천국은 임박한 내일의 사건을 가리키는 암호이기도 했다. 

    저 너머 요단강 바라보니

    날 집에 데려가려 오네

    한 무리의 천사 날 찾아오네

    날 집에 데려가려 오네

 

이 노래에 나오는 '천사' 중 한 명은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rbman: 1820?~1913, 흑인 해방 운동가. 남주 매릴랜드에서 노예로 태어났지만, 자유와 해방의 필요성을 자각하여 북부 필라델피아로 탈출해 자유를 쟁취했다. 이후 고향인 매릴랜드로 잠입해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다.)이었고, '짐'은 오하이오강 북녘을 뜻했다. 블론트는 다시 이런 말을 덧붙인다. 

 

   흑인 노예들은 생의 질곡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억압받는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옩너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사용해 

   독특한 노랫말을 창조해 냈다. 

 

잠시 눈을 감아 보자. 그리고 이제 눈을 떠서 다음 문장을 찬찬히 읽어 보자.

"이 언어와 그것이 놓인 상황은 그들이 성경을 얼마나 도전적으로 해석할지를 미리 보여 준다."

그는 이 노래들이 "듣는 자들에게 장차 노예제를 파괴할 영적인 에너지"를 전달해 주었다고 말한다.

이 노래들은 불의한 체제에 맞서는 불온한 사람들을 위한 노래다. 

요한의 노래도 실상은 그런 노래다.

 

아홉 영가의 활약

 

예배는 수동적이지 않다. 예배는 행위며 밖으로 표출된다.

예배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지은 채 나긋나긋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행위며, 요한계시록의 아홉 영가에는 예배 행위가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용어가 꽤 다양한 편이니, 해당 구절을 문맥과 함께 찾아보고 싶다면 다음을 보면 된다.

   1. 말함, 4:8,10

   2. 노래, 5:9, 15:3

   3. 송가, 5:9, 14:3, 15:3

   4. 외침. 7:10

   5. 오침. "화 있을진저 !" 12:12

   6.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함. 15:4, 19:7

   7. 외침, "할렐루야 !" 19:1,3,4,6

   8. 크게 기뻐함. 19:7

 

이 여덟 가지 용어가 성경에서 모을 수 있는 예배와 관련된 모든 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좋은 출발점인 것은 분명하다. 예배에는 온몸이 동원된다.

여기에 또 다른 목록이 나오는데, 요한계시록의 예배 장면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행위 중 하나다.

   1. 엎드림. 4:10, 5:8, 7:11, 11:16, 19:4

   2. 관을 하나님께 드림. 4:10

   3. 하나님의보좌를 들러섬. 5:11, 7:11

   4. 서 있기. 7:9,11, 15:2

   5. 종려나무가지를 든 날. 7:9

   6. 악기를 사용한 연주. 5:8, 15:2

   7. "아멘 !"이라 외침. 5:14, 7:12

이 표현들은 모두 음성과 육체 활동을 묘사한 대목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그분의 백성이

바벨론에서 체험한 영광스러운 구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 앞에 평안과 벅찬 감동을 느끼고, 마음과 생각을 잠잠히 살핀 뒤에 입에 담을 말을 선별한다.

그리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과 일곱 영 앞에 엎드려 찬양한다.

앞서 열거한 목록에서 세 가지 함의를 추릴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예배는

     1) 거듭되는 구원에 뿌리를 두고 있고(5:9, 12 : 7:10),

        2) 찬양과 감사를 입으로 표현하며,

           3) 어린양의 길을 가는 충성된 삶으로 이어진다.

 

요한계시록에서 예배는 온몸과 목소리와 생각을 바치는 행위다.

또한 예배란 구속받음에 감사하는 삶이자 어린양께 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뜻한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드리는 종교행사로 예배를 축소하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망친다.

예배는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온종일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예배는 상상력을 일신한다.

 

우리가 삶을 오롯이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의 이야기 속으로 안내하는 예배 행위에 날마다 참여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인도를 받아 완전히 다른 상상력을 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 부른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며,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구속받음을,

바벨론이 아무리 에워싸고 핍박해도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고 어린양이 승리할 것을 알게 된다.

온 세상에 정의가 피어나고 그 끝에 이르러 평화의 메아리가 가득 찰 것을 신뢰하고,

어린양의 길만이 케빈 로가 말한는 "유일한 참 생명"의 길임을 깨닫는다.

이 이야기를 심장에 새길수록 능히 어린양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노동 현장에서 부당한 고난을 겪는 자들, 제도화된 인종차별을 겪으며 살아가는 자들,

세상의 뒷전으로 밀려나 아우성쳐도 들리지 않는 자들, 이제 그들 모두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나아가 엎드려 경배할 수 있고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들은 세 번에 걸쳐 일곱 징계를 내리시는 하나님께 지금 바로 이곳에서

새 예루살렘을 언뜻이나마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할 수 있다.

이 짓눌린 자들이 예배로 그려 낸 새로운 상상의 나래가 그들을 충성된 증인의 삶으로 안내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는 바벨론의 신들과 대적하고,

어린양의 백성을 체제에 저항하는 불온한 제자로 변화시킨다.

어린양께 예배하는 자는 황제와 그가 섬기는 잡신들을 결코 예배하지 않는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 황제가 아첨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이들은 ... 신들의 칭호를 동원해 황제를 칭송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로마의 또 다른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가 네로를 묘사한 대목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네로 황제는 자신에게 힘찬 박수를 보낼 5천 명 이상의 "건장한 젊은 평민"을 모집했다고 한다.

요한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제국 한가운데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민감했던 사람들이

황제의 오만함을 몰랐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일 아닐까.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들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을 경배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기존 질서와 체제를 거스르는 행위가 되며,

이 불온한 반체제 세력은 기존 체제의 힘을 전복시킨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

 

요한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제시했는지 기억하자.

'우리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예수님을, 2-3장에서 교회들을 만난다.

그리고 요한은 3-6장에서 흐름을 '중단'시키기로 결정한다.

요한은 일곱 교회가 깨닫기를 바랐다.

패망할 운명인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삶이 예배로 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께 부르는 그들의 영가에서 가장 핵심이라 할 노래가 요한계시록 11:15에 나온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그들의 영가 속에서 최고의 명칭들이 한목소리로 하나님을 형용하고 있다.

"합당하도다", 영광, 조누기, 권능, 부요, 지혜, 능력, 축복, 구원, 감사,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권위, 크심, 놀라움, 의로움, 진리, 거룩.

이 모든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용어이므로 더 이상 제국의 통치자를 높이는 데 사용할 수 없다.

 

이 영가를 꾸준히 불러 습관으로 체화하는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은 바벨론에 대항하는 대안 세계를 창조한다.

바벨론의 용이 세상을 꾀어 야수를 경배하게 만들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야수들이 세상의 참 주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유일하신 참 주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이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일관되게 강조 하듯이, 사회적 상상(imaginary)은 한 사람의 현실이다. 

3-6장에서 기존 흐름을 중단시키고 있는 알현소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롱누 사회적 상상을 선사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보이는 세계 속에서 그분을 체험한다.

이렇듯 알현소는 바벨론이라는 현실보다 훨씬 생생한 현실이 된다.

예배는 억측가들이 가공해 낸 탈출과 안전에 대한 공상을 거부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눈을 통해 바벨론을 분별하고 바벨론에 대항하는 제자로 살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한다.

 

이 아홉 영가가 초기 기독교 영가와 실제로 유사했음을 믿는다면, 하나 더 제언하고 싶다.

말이 음악으로 바뀌고 다른이들의 목소리가 감기며 악기를 동원한 연주가 가미되면,

말은 밋밋한 언어에서 벗어나 미의 격정이 솟구치는 체험으로 고양된다.

이 미학적, 정서적 체험이 놀라운 세계, 모든 감각을 열어 만나는 대안 세계로 끌어올린다.

그분을 노래할 때 신자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초월해 새로운 현실, 즉 하나님의 현실, 하나님 나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

이 영가들을 소리 높여 노래하는 것은 저항의 행위며, 어떤 사람들은 이를 '발목 잡는' 일, 교란하는 일이라 부른다.

 

아홉 영가에 대해 추가하고 싶은 관찰 내용이 하나 더 있다.

보좌라는 축을 중심으로 찬양의 여러 목소리가 동심원을 이룬다는 점이다.

이는 알현소를 가득 채운 음악이 창조 세계의 중심에서 저  끝자리까지 울려 퍼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네 생물, 천사, 이십사 장로, 순교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을 천국 합창단이라 부르자 !

이 창단의 '합창'이 11:15에 나온다 .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에서 울려 퍼지는 합창의 주 멜로디다.

이 노래는 모세의 위대한 영가를 넘어서는 찬란한 승리의 영가다.

어린양의 길은 온 삶을 거는 예배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결국 어린양을 가리키는 증언이 되는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우리가 가 볼 곳이다.

이제 온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온몸을 드리는 증언이 되어야 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19장. 예배는 증언이다.

 

당신은 용의 나라가 끝나고 메시아의 나라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신앙의 신조로 삼는가?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만주의 주이심을 아는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보좌 중앙에 계신 어린양께 예배하도록 이끄는 이야기,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린양의 길을 걸어가라고 부름을 받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요한계시록을 섣부른 억측에 기대어 읽는 일이 허다하다 보니

이 책은 어느새 이리저리 끼워 맞춰야 하는 퍼즐이 되고 말았다.

이런 식의 해석학은 거의 모든 것을 미래에 일어날 불확실한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리하여 사건이 실제로 불러올 파장은 멀찍이서 관망하는 수준으로 쪼그라들고 만다.

이런 해석은 요한계시록이 오늘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이나 바벨론이 여전히 현존하고 있음을 애써 외면하게 만든다.

 

그러면 요한을 추동시킨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를 추구하며 어린양의 길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세상,

스스로를 내세우려는 오만함에 취해 있고 군사력의 비호를 받아 제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악을 쓰는 세상,

끝없는 내분으로 벼랑 끝까지 삶이 내몰린 세상, 만인에 대한 경제적 착취가 호이행하고 권력과 명예로 줄 세우기가

구조적으로 굳어진 세상, 오만한 야심을 양분 삼아 돌아가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배 ! 그렇다. 예배다. 그런데 어떤 예배인가?

요한에게 예배란 체화된 삶이요 말과 행동을 남김없이 드리는 것을 뜻한다.

 

예배, 행동으로 하는 증언

 

'예배' 못지않게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묶어 주는 또 다른 말이 있다. 바로 '증언'이다.

증언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의 거상이 일곱 교회를 향해 단언한 냉용 일체를 담아낸다.

이제 몇몇 구절을 살펴볼 텐데 NIV에서 사용한 '일'(deeds)이라는 단어 대신에 '행위'(works)라는 단어를 쓰고

알아보기 쉽도록 진하게 표시했다. 이 단어들 하나하나가 모여 증언이란 낱말로 집약된다.

 

  내가 네 행위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게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2-3)

 

내가 네 사업사랑믿음섬김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2:19)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

 

 그러나 세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3:4)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3:8)

 

이들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용어가 나오는데, 우리가 인용한 구절만으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관련 용어들을 다 담기에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무엇을 바라셨는지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인용이다.

가장 빈번하게 반복되는 말은 '행위'인데, 품행과 행동을 아우르는 용어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은 행위를 다룰 때 가르침과 믿음이 늘 함께 간다.

예수님이 일곱 교회를 보며 가장 좋아하신 부분은 그들의 행위였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즉 행위는 그들이 어린양의 길을 가고 있다는 가시적인 표현이다. 

행위가 곧 예배다. 

 

예배와 행위에 한 단어를 덧붙이고 싶다. 바로 '증언'인데,

이 용어는 요한계시록이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규정한다.

 

 바벨론에서 일곱 교회 교인들은 어린양의 길을 가로막는 온갖 압력과 반목에 시달리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불러 자신의 주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증인이 되라 하신다. 

 

바벨론에서어린양을 따르며 사는 것은 바벨론의 용에 맞서며,

그들을 낚아 사망의 세계로 끌고 가려는 용의 마수에 저항하는 것이다. 

용의 길에 대응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리는 예배,

어린양의 길을 따르는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

 

*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유다의 사자를 대체하고, 충성을 다하며 죽기까지 증언하는 것이

  파멸을 향한 전쟁을 대체했으니 ... 요한게시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사가 되지 말고 증인이 되라고 말한다.

  --- 토머스 슬레이터

 

예배, 말로 하는 증언

 

'증언'이라는 용어에 대해 더 생각해 보자. 그리스어로 '증언' 혹은 '증인'은

'마르투스'(martus)인데 여기서 영단어 'marthr'(순교자)가 나왔다. 

요즘 일부 해서갖들은 이 용어와 '증언하다 라는 동사 표현이

누군가의 삶에 대한 사사로운 증언으로 축소될까 우려를 표하기도 하지만

외려 그런 속단 때문에 말의 본뜻이 엉키고 만다.

증인은 직접 겪은 일을 공적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

법적 증인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믿거나 실제 경험한 일을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

브라이언 블론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네로 치하처럼 계획적인 학살에 노출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로마 제국에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거리 두기를 했다는 점에서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신체적 학대를 받는 일도 잦았다.

  그런 시대였음에도 요한은 신자들에게 사회적, 종교적 투쟁을 택하라고 촉구했다.

  요한은 이들에게 증인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벨론이 일곱 교회에 용의 숨결을 불어넣고 있을 때,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벨론을 분별해 내고 크게 외치면서

하나님의 길에 굳건히 서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 점을 블론트는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들은  고초를 겪고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ㅆ므과 예수를증거하였음",

곧 "예수의 증인"(1:9)이라는 이유로 밧모섬에 갇혔다.

그는 예수님을 대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고 고초를 겪고 있다.

그분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라고 말씀하신다.

6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증언]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6:9)을 읽는다.

11장에서 우리는 두 증인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마주친다.

이런 식으로 순교를 묘사한 대목은 다르 ㄴ곳에서도 발견되며(12:11, 17 ; 20:4),

17장에서는 여자(바벨론)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라는 대목을 읽게 된다.(17:6)

 

   증인은 어린양의 주권을 '입으로' 공개적으로 확언하고,

   날마다 어린양의 길을 '걸으며'

   바벨론의 길을 대적하여 '고난을 당한다.'

 

어린양에 대한 온전한 증언은 말과 행위 중 하나로 귀결되며 고난이 따르기도 한다.

 

예배, 말과 행동으로 하는 증언 

 

초기에 몽고메리에서 활동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설교 마무리에서 증인이 된다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인정을 해야 합니다. 변화를 받아 이 세상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며

  결코 안락함을 약속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고난으로 짙게 그늘진 협곡을걸어가고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잘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섯 살 된 딸에게 "아바, 왜 그렇게 감옥에 자주 가세요?"라는 질문을 받는 일이기도 하지요.

 

증인이; 된다는 것은 양면적이다. 일단 예수님의 주되심을 말과 삶으로 공개 확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을 장악한 용의 방식에 말과 삶으로 공개 저항하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교회가 등장한 이후 첫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이 가장 선망한 이미지는 순교자였다.

민망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선망한 이미지는 운동 선수, 백만장자,  영화배우다.

 

증인 

 

디트리히 본 회퍼는 엘리트 계층의 특권을 누린 가정에서 자랐다.

수년간 성경과 신학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학문적 토대를 닦았고,

덕분에 예리한 분석력에 대담한 외침까지 겸비했다.

히틀러의 힘이 거침없이 커져 감에 따라 어떻게 증인이 될 것인지 본회퍼의 고민도 커졌다. 

그는 히틀러에 맞서 교회가 일차단결해야 한다고 외치는 중요 인사가 되었다.

본외퍼의 인생이 남달랐던 점은 뉴욕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흑인 공동체만이 지닌 복음과 영성의 위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흑인 교회와 깊은 교분을 쌓은 뒤에 독일로 돌아오는데,

그의 믿음은 신선한 자극으로 충만했고 그의 증언은 훨씬 크고도 선명해진 상태였다.

 

본회퍼는 1939년 여름에 독일에서 미국으로 돌아왔고 이때 자신의소명을 자각했다.

히틀러의 권세가 독일에서 절저정에 달했을 때, 당시 뉴욕에 거주하던 본회퍼는 미국에서 누리는 안락함과 

신학교 스승들이 제시하는 진로가 과연 맞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본회퍼는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독일의 상황을 접하면서 고백교회에 몸담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깊이 생각했고,

총통과 국가사회주의자들(나치당원)과 협잡을 벌이는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저항하는 게 가장 좋은지 깊이 숙고했다.

주 그리스도께만 충성하는 증인이 되는 길을 신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본회퍼의 소명은 그렇게 사명이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나를 따르라]를 썼는데, 이전에는 [제자도의 대가]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유니언 신학교에 방을 배정받았고, 그곳에서 한 달 동안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리고 묵상에 몰두했다.

연신 줄담배르 피우며 무엇이든 적어 나갔지만 기습적으로 출몰하던 단상은 구겨진 종이로 버려져 방 이곳저곳에 나뒹굴었다. 

본회퍼는 당시를 술회하며 이런 그을 남겼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더는 참을 수 없다.

     오판으로 인한 자책이 다시 돌아와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본회퍼는 안정적으로 미국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는 자리를 제안받았는데, 

그런 제안은 그를 독일의 위험에서 보호해 주려는 지인들의 선한 의도였다.

지인들의 애틋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본회퍼는 모두에게 '아니오'라고 말했다.

미국 신학계의 지도자들은 그가 미국에 와 주기를 기도했었고,

본회퍼가 실제 미국으로 오자 이를 기도 응답으로 여겼다.

그들은 본회퍼가 절실했고, 실제로 여러 유력한 자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유력 인사들이었다.

본회퍼는 주님의 뜻을 구했ㅈ디만 미국 체류에 대한 의심은 번져갔고 확신은 무색해졌다.

이런 의심들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증거인지 궁금했다.

1939년 6월 20일, 본회퍼는 그해 가을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계속되는 독일의 재난 상황을 보며, 그는 조국을 위해 감당해야 할 목회적 사명을 미국에 남아 피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본회퍼의 막역한 벗이자 타구얼한 전기를 쓴 에르하르트 베트게는 그의 결단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 " 사악한 나날들, 조국의 비운과 죄악에 동참하기 위해 본회퍼는 한 교회에서의 사역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6월 말 즈음, 본회퍼의 당대 미국의 손 꼽히는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부어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 온 것은 실수였습니다.

     나는 조국이불러온 이 극악무도한 시기를 마땋히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아 내야 합니다.

     내 겨레가 일으킨 이 시련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전쟁 이후 독일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재건할 때 내가 참여할 자격은 없겠지요.

 

이 말에 바로 이어 덧붙인 글은 참으로 뼈저린 대목이다.

     독일의 기독교인들은 자국의 패배를 택하고 기독교 문명을 살아남게 할까요?

     아니면 자국의 승리를 택하고 기독교 문명을 파괴할까요?

     이 끔직한 선택이 이제 코앞에 닥쳤습니다. 둘 중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안온한 삶을 구가하면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위대한 신학자들 사이에 필담이자 가슴을 저미는 드라마다.

보면 볼수록 어린양의 길을 가겠다는 고통이 따르고 순교예 이르는 그림이 떠오른다.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본회퍼는 가을이 채 오기도 전인 7월 7일에 귀국기렝 올랐다.

전란 가운데 있던 독일 당국은 지체 없이 본회퍼를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었고,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결국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회퍼는 예수님이 세상의 참된 주님이라고  피 흘리기까지 증언한 모범이다.

본회퍼는 히틀러라는 야수와 베를린이라는 바벨론을 그렇게 이겼다. 

 

예배는 충성이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만 해도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박해는 간헐적이었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박해가 실제 있었는가? 물론이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반감의 대상이었고 사회에서 추방당했으며 고난을 받앗다.

시련은 밥줄을 끊는 경제적 고난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나 손님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시련은 대부분 사회적 고난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신분과 지위가 전부나 다름없는 문화권에서 그 모든 것을 상실했다.

가족으로 인한 고난도 빠뜨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먀, 친척과 천륜을 끊는 선택을 했다.

가장 흔한 경험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몰락이었다.

진정한 로마인이 되고 버가모나 에베소 시민의 지위를 얻으려면 당대의 종교, 예배, 제사, 행사와 직결된 

사회적 위신과 체통을 지켜야 했다. 

그사회에서 기본적으로인정하는 생활양식을 '충성'(piety)을 뜻하는 '피에타스'(pietas)라고 불렀는데,

어린양의 좁은 길을 걷는 제자라면 사회에서 요구하는 '충성'(피에타스)에 가담할 수 없었다.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일곱 교회의 제법 많은 교인들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을 따른 결단은 한번 드리고 마는 예배나 증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용의 존재를 분별하려면 날마다 노력해야 했고, 지속적이면서도 유연하게 노력해야 했다.

어린양을 따르는 이들은 근면하고 꾸준하게 충성을 표현하라고 요청을 받았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요한계시록의 여러 구절을 살펴보자.

'충성'이란 단어는 본문에서 대부분 '신실'로 번역되는 편이다.

그리스어 '피스토스'(pistos)에는 믿음의 해위와 지속적인 믿음의 행위들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 

예수님은 만주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신실한 것이 바로 충성이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자신의 증언에 충실하셨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세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우너하노라.(1:5)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3:14)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여 사우더라.(19;11)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거상이 요한과 일곱 교회에 계시하신 말씀 역시

믿음직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에 충실하다.(21:5, 22:6) 

요한계시록에서 신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충성하라고, 신실한 증인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는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바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2:10)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2:13)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충성)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2:19)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가 믿음(충성)이 여기 있느니라.(13:10)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충성)을 지키는 자니라.(14:12)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사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도 그와 함게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충성된)자들도 이기리로다.(17;14)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보편적인 미덕은 예수님께 신실한 것, 충성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님이라면 그들은 말과 행동을 다해 그분의 주되심을 증언하는 충성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충성을 방해하는 요인이 박해, 투옥, 순교를 눈여겨봐야 한다.(2:10,13)

신실하게 충성한다면 어린양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으로 선한 일에 참여하고, 타인을 섬겨 회복시키며, 옳은 일을 두루 행하여야 한다.

13:10과 14:12에서는 야수가 여인의 자녀들에게 불을 뿜는 장면을 본다.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부르심이란 예수님께 충성하고 고난과 순교에서 회복되는 방향을 가리킨다.

굉음과 공포가 난무하는 최종전이 벌어지지만 어린양께서 그의 "택하심을 받은 충성된(진실한) 자들"과 함께

전장에 몸소 참전하신다. (17:14)

충성은 예배에서 넘쳐흘러나와 우리의 증언에 합류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시련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이랑에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증언한다.

 

예배의 목적 : 그리스도를 본받음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해 보면 어떨까?

어린양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께 '예배(경배)'함을 뜻한다.

이는 말과 행동을 다 바쳐 충성된 증인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흠모하는 스승 제임스 던이 조어한 용어가 있다.

이 용어는 바벨론에 사는 충성된 증인들이 하나님과 어린양께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요약해 준다.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음'(christoformity)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간다는 뜻이다. 

여기 나온 세 본문을 다시 살펴보자.

 

 충성된 증인으로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1:5)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3:14)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19:11)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세 번이나 충성이라고 불리시고 그중 두 번은 증인과 연결된다.

dㅖ수님은 참으로 충성된 분이요 참으로 증인이시다.

소아시아 서부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충성이란 살아 계신 예수님과 함께하고,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 전파의 사역에 나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바벨론에 임재하신다. 

 

그것이 특히 지금 이 시대, 아 나라에 필요한 사역이다. 

자, 이제 더욱 뜨거운 마음을 품고 요한계시록이 우리 시대를 향해 던지는 통찰을 살펴보자.

그리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5부. 지금 필요한 불온한 제자도

 

20장. 오늘의 바벨론을 분별하는 네 가지 표

 

' 이 모든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적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억측성 질문에만 시간을 쏟으며 

요한계시록을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모름지기 제자도란 우리 곁에 현존하는 바벨론을 분별하라고,

순응주의자가 아니라 반골 인사가 되라고 가르친다.

 

바벨론은 시대를 초월한 비유로서 역사에 출몰했던 숱한 제국과 나라와 세력을 상징했다.

이들은 불의를 제도화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며 해방의 진리를 짓밟았다.

바벨론은 미래에나 볼 법한 도시가 아니라 지금 여기 실재하는 도시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삶의 지표로 삶아 실천하며 살고 싶다면,

우리 곁에서 암약하는 바벨론의 권세와 폭력과 불의를 분별하는 눈을 키워야 한다.

직ㅁ 실재하는 바벨론, 여기 바로 우리 곁에 있는 바벨론을 포착하는 네 가지 표식을 밝혀 보겠다.

 

(1) 오만

바벨론의 지배적 정서는 언제나 오만한 자만심일 것이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필요 없고, 그분의 백성을 천대하며 그분의 길을 무시하는 정서가 깔려 있다.

"나뿐 아니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 47:8).

"내가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계 18:7)

이 오만함으로 바벨론의 사고방식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바벨론은 오직 나를, 오직 나르 ㄹ위하여, 오직 나에 관해서만 생각하니,

만사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제국의 실체는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오만함은 바벨론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나타난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로 표출된 오만한 열망에 주목한다.

오만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거지 소굴 같은 나라'라고 폄하한다.

 

미국의 오만함은 새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벨론에서 나온다.

실제로ㄴ느 바벨론 사람처럼 살면서 마치 새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다는 주장은 

우리의 위선을 드러낼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오만함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오만함이 나타나지 않는 삶의 자리는 없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의 사업자들, 가정 내의 아버지, 동네에서 악해을 일삼는 가해자들, 목회자와 교회 위원회

  대형 교회와 시골 교회, 기독교적이거나 비기독교적인 기관 모두

 

오만은 용의 길이요 야수의 길이다.

미국의 오만의 특징은 뭥ㅅ일까?

1. 세계 최강국에 살고 있다는 과대망상을 들 수 있다.

2. 헛된 지배 욕망에 빠져 다른 나라들과 경쟁을 벌인다.

3. 자치와 주권을 바라는 타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형태로 권력을 행사한다.

     이해 관계가 얽힐 때 '황금률' 원칙을 거부하는 경우가 잦다.

4. 불우한 국가들을 공감하거나 동정하는 일, 최소한의 연민을 드러내는 일에 거의 구제불능이라 할 만큼 무력하다.

5. 비판을 하면 분노하고 앙갚음에 나선다.

 

미합증국에서 바벨론의 오만함은 하늘을 찌른다.

바벨론은 많은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 나라를 쑥 빼닮았다. 

 

(2). 경제적 착취

 

오만함에 절어 있는 바벨론은 번영을 위해 타자를 경제적으로 착취하기도 한다.

돈과 지위는 권력이자 바벨론이 사랑하는 신조인데, 우리는 이것을 '능력제일주의(meritocracy)라고 바꿔 부를 수 있다. 

능력제일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직업 윤리 때문에 부자와 빈자가 나눠진다고 생각한다.

'덕 있는 부자'는 '덕 없는 빈자'를 깔본다. 부자는 자신이 이룬 성공에 감사할 줄 몰라 날마다 거들먹거리며 오만해지고

빈자는 '한심한 자'라는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힌 채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를 쌓아 간다.

돈은 이 땅의 모든 바벨론이 흠모했던 권력과지위와 덕의 집합체다.

 

경제적 착취는 바벨론의 표징이다.

사 31:7. "은 우상 금 우상"을 로버트 알터는 "은이라는 불의, 금이라는 부르이"로 비틀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지지하는 정책이 경ㅈ네적 정의를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한다.

부르이한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들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향햐 거침없이 질문해야 한다.

 

 자유시장 체제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기독교 신앙과 어우러질 수 있는가?

우리는 경제 시스템을 도덕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는가?

 

애덤 스미스를 비롯해 자본주의를 이룩한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외면하면서도 

실제로는 종교의 바다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말한다.

자본가들은 칼뱅주의적 결정론을 거부하면서 다으 ㅁ새 가지 생가에 입각해 체계를 구축했다.

 ⓐ 사익 추구의 자유

 ⓑ 시장 경쟁에 의해 통제되는 사익 추구의 자유

 ⓒ 사익과 경쟁이 대다수에게 경제적 이익을 안겨 주는 공동선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

 

그러나 사익과 경쟁을 동력 삼아 돌아가는 경제는 기독교적 경제 체계가 아니다.

공동선을 향한 경쟁을 기독교적인 범주에서 용인하려면 시민들이 사람다운 품격을 지녀야 한다.

시민들이 정의롭고 관대해야 하며, 공평한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사람의 품격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의 덕과 품격이 없다면, 온 세상은 시장의 손에 제어되고,

야망과 경쟁과 자기 결단과 사익이 동력원이 된다.

사람의 품격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탐욕의 문화를 배태한다.

한발 나아가 자본주의에 종교적 장식을 두르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진다.

에이랜드 스미스가 말했듯이, "땅과 하늘 어디에서나 혜택을 퍼부어 주는 자유시장의 불가해한 힘 앞에,

미국인들은 늘 비굴하게 무뤂을 꿇었다." 그는 냉소적으로 읊조린다. 

"시장이 공정하다는 것은 이 나라의 국가적 신념이다."

 

그러나 자유시장은 험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제자를 잉태하지 못한다. 

자유시장은 바벨론을 양산할 뿐이다.

 

경제적 착취를 떠받치고 있는 이 죄악의 발원지는 그릇되고 뒤틀린 마음이다. 

탐욕의 세대는 관대함을 베푸는 경제 체제를 허락하기는커녕 허물어 버린다.

이 나라의 새로운 세대가 품격을 갖추고 정의와 공정과 관용을 도덕적 의식의 힘줄과 인대로 삼는다면,

용에 기반한 바벨론의 경제 체제에서 미국을 건져 내 새 예루살렘의경제 제체로 방향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영역에서도 도덕 혁명이 필요하다.

바벨론은 미국 경제 체제를 교두보로 삼았다.

교회가 경제 정의의 문화를 확산해 공동선에 기여한다면, 이 악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도할 수 있다.

 

(3) 군국주의

 

군국주의에 중독되는 현상은 바벨론의실체를 가장 훤히 드러낸다.

20세기에만 한정해도 전쟁으로 최소 1억 800만 명이 사망했다.

경악스러운 규모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다.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군대를 보유 중이다.

미국은 매년 군사비로 7,000억 달러 이상을 지출하는데, 중국도 2,610억 달로 정도를 지출한다.

미국은 인도,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프랑스,독일, 영국, 일본, 한국을 합친 것보다 두 배가 넘는 군사비를 지출한다.

 

이것이 바벨론의 전형적인 표징이다.

전쟁은 죽음을 낳기 때문에 용은 전쟁을 좋아한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구호 '힘을 통한 평화'가 군사력 증강, 핵 위력의 증가, 위성 기술  및 첩보 기술의 발전이라는

욕망을 감춘 채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힘을 통한 평화는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겁박하고 바벨론의 불의한 신화를 다시 소환하는 것이다.

 

바벨론은 고대 바벨론이나 고대 로마, 혹은 오늘날의러시아난 미국으로 나타날 수 있다.

계 18:2.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

로마를 제국으로 일으킨 힘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만들고 어린양을 어린양답게 만드는 힘 앞에 굴복할 것이다.

"바벨론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에 의해 죽임당할 것이다."

 

군대의위력은 바벨론의 현실이다. 새 예루살렘의 현실이 아니다.

어린양의길을 걷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ㅆ므만을 무기로 선택한다.

어린양의 길은 화평과 화해를 통해 열어 가는 평화의여정이다.

잡았던 칼을 내려놓고, 그 칼을 두들겨 밭 가는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변함없이 그것을 바라신다.

 

기독교 '현실주의자'는 성경이 바라는 평화를 거부한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면 패배는 불 보듯 뻔하니 나라마다 자체 방어력을 길러야 ㅎ산다는 주장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죄악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구낻는 필수이자 최후의 수단이다.

어린양의길은 현실이 아닌 세계에서 통할 법한 길이지,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이 세계에군사력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예수님이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듯이 요한도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선택한 무기는 십자가였다. 요한계시록의어린양은 입에서 꺼낸 예리한 검으로 적을 섬멸한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어린양의 길에 투항할 수밖에 없다.

참된 현실주의는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가운데 계신 어린야이라는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힘을 통한 평화는 어린양의 복음을 도려내 거짓된 경건의 껍질로 뒤덮어 버렸다.

 

오늘날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의 오만함, 경제적 착취, 군국주의의 비호 아래 살고 있다. 

 

(4) 억압

 

요한이 밧모섬에서 글을 쓰는 이유는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외쳤기 때문이다.

그는 증인이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바벨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압제를 가하는 중이다.

 

관용 없음, 그 편협함은 바벨론에 유리한 전선을 형성한다. 

미극이 추구하는 자유는 타인을 향한 고나용과 어우러진 가치이지만, 바벨론은 이를 가만두지 않는다.

편협함과 억압은 침묵, 훼방, 경계 짓기, 여론 조작, 위해, 박해, 살해, 불경한 이야기 등 

여러 갈래로 펴쳐져 관용의 확산에 맞선다.

바벨론의 편협함과 억압의 주요 형태 중 하나가 인종차별이다.

누구는 이것을 '미국의맹점'(A merican blindspot), '미국의 원죄'라고 했다.

이사벨 윌코슨은 '인종차별'이  아니라 '카스트'여야 한다고 한다.

미국식 카스트 제도가 바벨론의 결실이다. 

인종에 기반한 카스트 제도는 미국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데, 

이런 제도 따위를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양산하고 지지했으며, 이제는 미국 체제를 완전히 잠식해 버렸다. 

 

카스트는 우리가 겪는 분열의 하부 구조다. 그것은 건축학적으로 구조화된 인간 계층 구조며,

우리의 400년간 이어진 사회 질서를 고스란히 유지하라는 무의식적인 암호다. 

카스트 제도는 인위적인 구성물이며,인간의 가치에대한 고정되고 내재된 계층화로서

한 집단이 다른 열등한 집단에 비해 우월하다고 전제한다.

이 계층화는 조상의 계보 혹은 불변적인 속성에 기초하고 있다. 

미국에서 인종은 감춰진 카스트의 힘을 드러내는 공개 대리인이다.

카스트는 뼈, 인종은 살이다.

 

인종주의와 카스트 제도는 모두 분명히 바벨론적이다.

이 묵시록이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 준다.

용이 인종차별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이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이며,

야수들이 인종차별을 강제하는 까닭은 그것이 순응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런식으로 바벨론은 인종차별을 생생한 현실로 구현한다.

 

상상력의 전환은 사람의 품격을 높이는 데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법은 제도적 인종차별을 완화시킬 수 있지만 정책은 상상력의 전환을 촉진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요한이 먼저 맛보았던 그것, 바로 상상력의 전환이다.

그래야만 모든 나라와 방언과 인종과 족속이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광경을 목격할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양 앞에 무릎 꿇을 때만 우리는 그리스도인라는 이름값마큼 변화도리 것이다.

무릎을 꿇고 회심한 자는 바벨론 체제를 거부하는 반골, 불온한 인사가 된다.

어떻게 하면 불온한 제자답게 행동할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바벨론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21장. 바벨론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요한계시록에 관한 수많은 해석들이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에만 집착하다 보니 

제자도의 메시지를 놓치고 말았다.

이 책의 목표는 바벨론이 시공을 초우러해 존재한다는 렌즈를 낀 채 요한계시록 읽는 법을 배우고,

그리스도인은 바벨론 한 가운데서 어떻게 예수께 충성된 증인이 되는지 알아가는 것이다.

이 제자도의 메시지는 강렬한 빛이 되어, 세상 속에서 은밀히 호라동하는 바벨론의 실체를 훤히 들러낸다.

그 과정에서 바벨론에 공모한 현대 기독교인들의 만행도 들통날 것이다.

 

미국 복음주의는 길을 잃은 채 진통 속에서 기진맥진한 상태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정파 정치에 미혹되어 어린양의 길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증오의 정치가 미국 대중을 압도했다.

기독교인은 양쪽으로 분열되었고, 이는 기독교인이 위 숫자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부인 반란, 의회 난입 사건

당혹스럽게도 폭도 대다수가 기독교 문양과 표식을 두른 채 기도하거나 노래하며 기독교 예식을 행하고 있었다는 사실.

대중적 기독교 변증가인 에릭 메탁사스의 허호아된 주장. 민주당이 투표를 조작했기 때문에 

이번 선거는 도둑맞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어디서 길을 잃어버린 것일까/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괴담에 수많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낚일 수 있을까?

왜 이들 대다수가 여전히 각종 축사(exorcisms) 기도회, 찬양 예배, 대중 집회에 참석하는 행동을 

기독교 신앙의 표현으로 생각할까? 이런 것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도난당한 선거 결과를 대신해 주는 것일까?

 

전천년설, 정치, 기독교 국가주의

 

복음주의에 영향을 끼친 여러 역사적 요인이 잇지만, 그중에 큰 서사를보여 주는 하나의 접점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본격화되었는데, 복음주의 운동은 용어의 본뜻이 무색해질 만큼 정치화되고 말았다.

오늘날 '복음주의'(evangeliscal)라는 용어는 '공화당 지지자'(Repulican) 와 거의 동일하다.

수십 년 동안,탁월한 학자들과 운동가들은 ' 성경 중심', '십자가 중심', 그리고 개인 회심과 주요한 공적 사안에서도

'거듭남'과 '행동주의'를 장려하는 등 다양한 용어로 설명을 해 왔다.

여기에 복음주의가 단일한 교파로 협소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교회 일치' 정신에 입각했다는 개념을 추가하기도 했다.이 굵직한 다서 개념이 복음주의를 신학적으로 정의한다고 일컬어진다. 

이 닷서 가지는 누가 복음주의자인지 아닌지를 규정하는 좋은 범주였다.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단어는 이제 '공화당', '반민주당'과 겹치며 보수 정당의 정파적 입장과 일치한다.

 

복음주의는 이제 신학이나 특유의 사명, 복음 전도가 아니라 점점 정치적 언어로 식별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적 동기가 새 예루살렘이 아닌 바벨론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소유하는 사람들의 교회 출석은 감소하는 중이다.

즉 신학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중심 가치가 이동했다는 증거가 있다.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교회 출석류이 감소하고 있다.

이는 복음주의란 지역 교회에 헌신하는 수준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전반적인 지향성이라는 것이다. 

즉 공화당과 기독교 우파가 긴밀히 얽혀 있기에 열성 신자가 아닌 이들은 복음주의를

종교적 신념과 관습이라기보다 정치적 정체성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버지의 결론은, 미국의 복음주의는 더 이상 신학적 신념으로 정의될 수 없으며 정치에 포박되고 말았다.

캘빈 대학교 역사학 교수 크리스틴 코베스 뒤 메즈는 [예수와 존 웨인]에서

미국 복음주의는 더 이상 신학적 신념이 아니라 '문하적 충동, 욕구, 정치'에 의해 정의될 수 있음을 거듭 증명했다.

이러한 문화적 복음주의를 남성성과 군국주의에서 버젓이 드러나는 권력 지향성 및 가부장주의와 연결시킨다.

 

복음주의 진영의트럼프 지지는 일탈도 아니었고 실용적 선택도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전투적인 남성성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정점을 찍는 행위였다.

2016년 투표에서 복으주의자들이 존재 가치를 배반하는 광경을 본 숨낳은 이들이 경악했다.

실제로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투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바대로 투표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오늘날의바벨론의정체를 포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바벨론은 이미 미국 복음주의에 깊이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종말론, 특히 세대주의는 복음주의 세계 전체를 점점 공화당 성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휴거와 아마겟돈에 관한 문자적 믿음과 국가주의와의 관계는 상고나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꽉 묶여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끼시는 백성이었으며,

러시아나 신을 믿지 않는 사회뢰주의-공산주의 국가, 심지어 유럽 연합은 아마겟돈이라는 폭풍에휘말리지만,

우리는 휴거될 테니 안전할 것이며 그 일은 속히 일어날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에는 미국과 성조기의 빨간색, 흰색, 파란색은 하나님 편에 있고

미국의 정치가 곧 하나님의 정치라는 투철한 신념이 동바노디어 있다.

내 조국의 종말론은 대다니 미국적인, 아니 성경적인 것보다 더 미국적이었다.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가 얼마나 국수주의적인지를 읽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기독교 국가주의는 복음주의의 우익 정치화의 '완성'이다. 

 

기독교 국가주의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다룬 책 [미국을 다시 하나님께로]에서 

"전천녀주의 종말론이나 다를 바 없는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인들이 기독교 국가주의를 고수하고 있음을 예측하게 해 주는 핵심 요소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기독교적 정체성과 미국적 정체성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문화적 구조 ...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보수적인 정치 성향(반드시 정당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우선하는 믿음, 도덕적 문한함을 천년왕국의눈으로 바라보는 것,

타국 정복이 하나님의 승인 아래 벌어진다는 신념을 기독교 국가주의와 동일시 여기는 태도다.

마지막으로 도덕 개념은 오로지 종교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에만 근거한다.

만족-국가 권력에 부역하기 위해 동원된 기독교, 그것이 기독교 국가주의의 민낯이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로,

제국(바벨론)의 지배적 영향력을 분별하고 용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담대하게 어린양의 길을 가는 제자로 삼기 위해서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바벨론에 살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그리고 일부 청교도들이 그렸던 

기독교 왕국이라는 미몽의 반복이다. 

기독교 국가주의에서 바벨론을 포착하지 못하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

 

이 모든 것 배후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션 마이클 루카스가 [순전한 전통]에  기고한 내용처럼

"공포야말로 복음주의 전후 정치의 중심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신을 모르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자, 그들의 만행이 미국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복음주의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1980년대에 떠오른 두 가지 악은 공산주의와 세속적 인본주의였다.

9.11이 지나면서 그 대상은 급진 이슬람 세력과 동성애에 대한 호전적 의제로 바뀌었다. 

오늘날 '비판적 인종 이론'은 그런 악당들의 갤러리 어딘가에 걸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당은 진화하고,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늘 꺼내 드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이것이 플랫폼을 구축하고 기부금을 거두며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다.

두려움은 복음주의자 신자들이 큐아넌 에 빠지게 만들고 코로나 백신 접종을 거부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음모론에 쉽게 경도되곤 한다.

대체된 현실은 안전하다는 생각을 불어넣고 제 스스로 구축한 환상 속에 머물게 만든다.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 신념은 이제 정치에 의해 강화되고 대체되었다. 

이런 지도자들과 그들의추종자들은 정치 권력이  '구원'을 가져다주리라는 약속에 속아 넘어간다.

미국 복음주의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70년대와 80년대의 비극적인 결정,

즉 더욱 바벨론과 같아지려는 결정 때문이었다. 

미국 교회사가 네이선 해치는 진보주의에 대한 도전들,

특히 진보주의가 기독교적 희망을 세속화라는 측면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미국 기독교인들 사이의 기본적인 지적, 문화적 격차의 핵심 요인은

그들의 신학이 지진 보수적 세계관과 진보적 세계관 사이의 격차였다.

이 틈이 어떤 신학 담론보다 깊었기에 문화적 격차를 초래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지배적인 정치적, 문화적 가치가 

교회를 휩쓸고 개개 교회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다. 

 

. 18세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보수주의자든지 진보주의자든지)

   현실이 정치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는 현상을 목격한다.

. 교회는 신자들을 양성하면서 이제 정치적, 사회적 광장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때로는 어떻게 행동할지를 늘 심사숙고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바벨론의 암약을 감지할 수 잇는 렌즈를 갖추는 일이다.

바로 희망이란 렌즈다

 

희망의 종말론

 

요한계시록이 그려 주는 바벨론의 실체는 분별력과 희망을 갖추게 하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기독교 문헌이 나올 때부터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기독교 신앙에서 필수불가결한 차원이며,

세상을 향한 기독교의 책임을 가능하게 만드는 암묵적인 조건이었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만드는 것을 포기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흼아이야말로 요한계시록을 요한게시록답게 만든다.

 

기독교 종말론은 바벨론의 종말론에 맞서는 대안이다. 

기독교 종말론은 탄식이 난무하는 곳에 희망을 소생시키고, 용의 면전에서 기도로 탄원한다.

기독교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보며 깨닫는다.

십자가의 잔인무도한 죽음에 이르가까지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기독교 종말론은 우리가 회복력을 갖추고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어 어린양이신 주님을 본 받으라고 힘을 불어 넣는다.

기독교 종말론은 기독교 국가주의, 진보주의, 염세주의와 정반대 길을 간다.

기독교 종말론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악을 묵인하지 않는다. 구차한 변명도 늘어놓지 않는다.

우리 너머와 앞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또렷이 바라보며 나아간다.

기독교 종말론은 우리에게 진보주의와 염세주의에서 돌아서라고 말하지만,

삶의 현실을 개선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전시키는 미덕을 부정하지 않으며

가혹한  현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기독교 종말론은 어린양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약속의 하나님,

훗날 새 예루살렘이 반드시 임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이 땅에 만개하리라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간다.]

 

교회는 종말론을 상실했기에 자기 목소리도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자도다.

   제자도가 가장 절실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제자도다.

   정치적 제자도가 가장 절실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르이한 체계를 거부하는 제자 선언이다.

 

[ 기독교 종말론의 중요 주제 ]

1. 직선적인 역사관 : 시작과 목표

2. 육체의 부활

3. 보편적인 심판

4. 각 개인의 생애 끝에 일어나는 심판

5. 보복 또는 구속

6. 죽은 자들도 이 삶에 참여함.

    

 

22장. 불온한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 선언

 

이 책을 잘 읽으려면 '하나님의정치(theo-politics)라는 관점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 요한계시록은 한결같이 제자도의 공공성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은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계시'하면서,

용과 야수들과 바벨론을 분별하는 법을 함께 보여 준다.

사회 참여에 나선다면서 하나님을 사적인 삶의 언저리에 남겨 둔다면 요한계시록을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한다.

이 책은 하나님의 정치만이 유일한 정치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 피오렌자가 거듭 일깨워 주듯이 요한계시록은

"정의를 부르짖는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 직접 속해 있을 때만 우리에게 적절한 신학적-윤리적 답을 내어 줄 것이다."

 

교회와 목사, 교수와 작가, 시민과 어린이 모두 새로운 정치젇ㄱ 태도를 지닌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과도한 정파화의 흐름에 맞서는 제자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아우성치고 있다.

이들은 바벨론을 전복시키는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자, 그런 담대한 설교자를 바란다.

명료하고 패기 있는 신념의 모곳리를 기다린다. 이들은 복음이 불의한 체계를 거부하는 제자들을 길러 주리라고 믿고 있다.

그 불온한 제자들은 기꺼이 어린양을 따라가며, 당파성에 매몰된 정치는 바벨론에 투항하는 것이라고 폭로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와 정치 권력을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권력 게임'ㅇ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뭉개 버렸고, 그 게임 안에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천사와 용과 야수가 출몰하는 요한계시록의 세계와 달리 우리의 세계는 지극시 세속적이다.

애써 외면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심층적인 현실 앞에서도 짐짓 태연한 척하며

세상은 투표나 정당들에 의해 돌아간다고 착각한다.

그 결과 허다한 용의 꾐에 빠져들어 갔고, 야수와 한편이 되어

바벨론을 기독교적인 장소로 만들어 보겠다며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바벨론을 그리스도인의 터전으로 일구는 유일한 방법은 요한이 건넨 말, "나오라 !"를 실천하는 것이다.

바벨론에서 나와 새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의 진리를 증언하며 살아야 한다.

공공 영역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를 포기하거나 공공선에 무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우리는 눈을 뜨고 용의 길을 분별하면서 공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바벨론은 결코 새 예루살렘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바벨론은 기독교화 될 수 없다.

 

거짓 신을 경배하기 시작하다.

 

바르멘 신학 선언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1934ㅈ녅 5월 칼 바르크가 초안을 작성했다.

히틀러는 포퓰리즘 운동을 규합해 국가사회주의로 몰아갔고, 바르멘 선언은 이 시류 속에서 치명적 위험을 감지했다.

독일의 루터교ㅗ히는 기도교 신앙의 참담함을 보여줘 주는 표상이 되었으며 악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

그 길은 용의 길이요, 용의 으뜸가는 야수인 아돌프 히틀러의 길이며,

이 야수의 아첨꾼인 헤르만 괴링, 하인리히 힘러, 루돌프 헤스의 길이었다.

 

히틀러와 한통속이 된 교인들은 '독일 그리스도인'으로 불렸다.

바르트는 히틀러의 이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 운동이 일으키는 악해의 깊이를 간파했고,

이 비극적 참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통과하면서 국가사회주의를 가차 없이 비난하고 맞섰다.

바르트는 "나는 내 사랑하는 독일 국민ㄴ이 거짓 신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여기서 저항하지 않음녀 국가사회주의가 기독교 신앙을 파괴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당시 교회는 야수의 마수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 실체를 분별해  낼 눈도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 수준이었을까? 수년, 수십 년이 르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용의 방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개신교 교회를 장악했고,비겁한 바벨론 지도자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신학은 야수에 대한 충성과 온갖 우상숭배에 대한 탐닉으로 천박해졌다. 

 

법정으로 끌려간 바르트는 세 명의 판사 앞에서 제 1계명을 읊기 시작했다.

 "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엇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2~3)"

 

오늘날에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신을 경배하고 있으며 정치와 신앙을 뒤바꾸고 있다.

 

바르멘 선언

 

칼 바르크가 작성했고, 1934년 5우러 31일에 공식 채택되었다.

이는 급진적 국가주의세력인 나치당이 야금야금 교회를 잠식해 들어노는 행태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 교회의 유일무이한 저항 세력이 내놓은 선언서였다. 

 

오늘날 바르멘 선언은 정치나 정부가 기독교 신앙을 침해하려 할 때마다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들이 어떻게 자기 목소리를 낼지 제시해주는 패러다임이 되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발화는 로고스, 즉 말ㅆ므이시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을 본다. 

요한복음 1:1-5,14

 

요한계시록에서 육신이 되시 ㄴ이 말씀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요, 사자이며, 죽임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분은 입에서 날선 검을 꺼내시어 용과 야수와 바벨론을 이기신다.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는

성경 속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백성을 위한 그분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들고 읽으라, 이 두루마리르 먹으라 말ㅆ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투항하는 자는 바벨론에서 바벨론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가 된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자기 마음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기호에 맞는 이데올로기로 둔갑시킨다.

그들은 예언자 역할을 포기하고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와 선동가가 된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사람들을 제자화 할 수 없고 오히려 당파적인 정치에 매장시켜 버린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의 주님이 아니며,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거룩한 빛을 덧입혀 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예수, 유일하신 참 주님

 

용은ㅇ 사람들을 유혹해 야수를 경배하게 하고, 어린양과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만든다.

어린양은 주님이요 구원자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능력을 통해 구속받아 변화되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감사는 이 빛을 받으며 걸어가야 한다.

이 빛은 용의 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어린양의 충성된 증인이 되라고 능력을 부어 준다.

너 나 할 것 없이 용의 길에 안주하며 세상만사가 다 그런 거라며 정당화하고,

일부는 공적인 삶과 영적인 삶, 사적인 삶이 각기 다르니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지내기도 한다.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들에게 삶의 영역은 나뉘지 않는다.

예수님은 주님, 어린양, 로고스, 빛으로서 어느 곳, 어느 시대에나 살아 계신다.

 

미국 기독교인들은 처음 사랑과 충성에서 서서히 돌아서더니

결국 주님만이 행사하셔야 하는 주권을 바벨론에 양도하고 허락 없이 화친을 맺었다.

우리에게는 불온한 제자도가 지닌 깊이와 부요함이 없다.

분열된 제자도만 남았을 뿐이다. 우리는 삶의 일부를 바벨론에, 다른 일부를 새 예루살렘에 양도했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저기서는 헌법을 따른다.  여기서는 후하지만, 저기서는 따져보고 득이 될 일에만 돈을 쓴다.

여기서는 사랑하고 저기서는 보복하고 혐오한다. 여기서는 평화를 누리지만 저기서는 전쟁을 벌인다.

기독교 지도자들도 이 새상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이 함께 있으니,

두 왕국에 동시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는데 나는 그런 주장에 적잖이 실망했다.

하나는 바벨론이고, 다른 하나는 새 예루살렘이다.

우리는 두 곳에 동시에 거주할 수 없다. 우리는 충성된 증인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불의한 체제를 거침없이 거스르는, 반곡ㄹ 기질이 다분한 제자도다.

 

우리는 어린양의주되심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선포하지도 못했고,  몸으로 살아 내지도 못했으며, 어린양이 만유의 주이심을 요구하지도 못했다. 

대신 우리는 바벨론의 권세에 굴복했고,

그 틈을 타 권력에 빌붙은 비루한 설교자들과 목사들이 교회의 길잡이 행세를 하고 있다.

이들은 조명을 받으려고 아첨하고 권력에 빌붙으며, 이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고 호들갑을 떤다.

이 협잡꾼들이 그렇게 이 나라를 복음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권력에 줄을 대면 교회가 힘을 가지리라는 생각은

마치 대기업이 번창하면 구멍가게도 덩달아 번창하리라 착각하는 꼴이다.

하지만 바벨론은 어떤 경쟁자도 용인하지 않는다.

  

불온한 제자들은 분별한다.

 

어떤 정부도 새 예루살렘은 아니다. 

바벨론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가릴 것 없이 그 영향력을 확산시키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새 예루사렒이 아니기에 체제를 거스르는  제자답게 의심의 시선을 늘 겸비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정부에 권한을 부여하셨다. 조국을 사랑하고, 애국시을 가져도 괜찮다.

트표를 통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공직에 봉사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 앞에 무릎을 끓고 면류관을 내려놓은 채 충성을 선언하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정부는 옳은 일과 바벨론을 뒤섞는다.

따라서 둘의 차이를 가려내고 이 나라를 새 예루살렘으로 정향시키는 일은 오롯이 바벨론 체제를 거부하는 제자들의 책임이다.

이 불온한 제자들은 건전한 분별력과 의심을 두루 겸비해야 한다.

 

교회는 초월한다.

 

바벨론의 지도자들에게 빌붙는 것은 교회를 분열시킨다.

모름지기 교회란 정당과 정치를 초월한다.

요한계시록이 계속 외치듯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경배하는 자들은 "모든 족속과 나라와 방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보편적이지만, 정치와 정당은 지역과 국가 단위에 국한된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은 분열을 일으키는 야수들을 경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상숭배다.

용은 분열을 좋아하고, 분열된 교회는 증인의 역할을 잃는다.

 

바벨론은 후보자들이 마치 메시아인 양 충성을 바치도록 유도하고,

그 후보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걸맞은 사람이라는 희망을 심어 준다.

지지하는 후보가 승리하면 기쁨의축제가 이어지고, 패배하면 침울함에 휩싸인다.

기븜과 우울은 신뢰와 희망과 충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킨다.

교회는 만주의 주, 어린양이신 사자를 따르라고 부름받았다.

오직 어린양을 따르는 불온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과 손을 잡는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아, 세상을 초월하는 교회가 되라.

 

불온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한다. 

 

바벨론은 교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배력이 워낙 강고한지라

많은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정치적 관점과 복음을 구별할 수 없는 수준이다.

교회는 복음으로 되돌아가 복음을 메시지로 삼아야 한다.

주일마다 들려오는 메시지, 성경 공부 때마다 들려오는 메시지, 유튜브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그리스도인들의 소셜미디어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를 복음의 메시지로 물들여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셜미디어는 공적 담론이 생육하는 광활한 터가 되었고,

우리네 (비)영성을 형성하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양 진영에서 날마다 쏟아지 내는 분노와 옹호는 일용할 양식이 되면서 우리의 대화는 정치색으로 물들어 버렸고,

어느새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의지하지 않는다.

 

이제 복음으로 돌아갈 때다. 고전 15:1-8

불의한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삶을,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그리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을 이야기한다.

고린도전서 본문은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의 내용, 즉 우리를 위해 죽임당한 어린양의 말씀(로고스)의 검으로, 

용을 죽이고 야수를 채찍질하고 바벨론을 손수 치시는 주님이 되심을 떠올려 준다.

이것은 억측이나 수혜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용을 이기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야기며, 그리하여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서 

정의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참 메시지다. 

 

바벨론은 복음을 멸시한다.

부르이한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들은 용의 복음의 실체를 간파한다.

이 뒤틀린 복음은 (1) 야수를 경배하고 (2) 바벨론에 충성한다.

불온한 제자가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이유는 바벨론 뒤에서 어른거리는 용을  포착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권세

 

권세 혹은 권력을 가치 중립적인 힘이안 영향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세계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권력은 중립적이지 않다.

서구 문화권에서 권력이란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힘을 발휘해 누군가를 제압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권세를 얻고자 달려들 때 그들에게 강렬한 교훈을 남기셨다.

 

막 10:42, 막 10:43-45

 

불의한 체제에 대항하는 이들은 "너희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라는 문장 알\ㅍ에서 멈춰 선다.

예수님의 권세는 타자를 '제압하는'(over) 힘이 아니라 타자르 ㄹ'섬기는'(for)힘이었다.

용의 힘은 압도적인 힘을 갈망하고, 야수들은 이 힘을 행사해 타자를 짓밟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간다.

불의한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는 타자를 장악하길 거부한다. 외려 이들은 어린양을 다라 나아가며 타자를 섬긴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의 정치학, 곧 이웃 섬김의 정치다.

 

미국 교회는 지난 40년 동안 그리스도를 본받은 권세로 신자들을 제자로 양육하기는 커녕

이들을 바벨론의 권력 투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교회는 자신들의 다음 오아이 누가 될지를 결정했지만 결국 그 왕의 실체가 야수임을 깨닫게 되었다.

대통령, 국회의원, 워싱턴 D.C, 도시, 마을에 힘을 실어 주는 일을 내려놓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본받은 권세를 되찾아 한다.

불의한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는 정치가 아니라 주님이신 어린양을 신뢰한다.

제자는 야수의 길이 아니라 어린양의 길을 간다.

 

'권위'나 '권력'이라는 말은 교회에서 가장 낯선 언어가 되어야 한다.

목사가 권력과 권위에만 매달리고 이를 행사하거나

자기 뜻이 회중에게 곧바로 먹히는 것이 지도력이라고 판단할 때, 이단이 여기저기 파고 들어 활동한다. 

주도 한 분이요, 권위자도 한 분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 어린양, 주님이시다.

권력을 얻고자 교회의 위계질서 '위로' 올라가려는 것은

낮아지신 그리스도 한 분을 향해 구축된 교회의 권위 구조를 뒤엎는다.

수직적인 위계가 없기 때문에 누구도 높이 오르지 못한다.

권위를 켜켜이 축적할 만한 토대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높아짐은 낮아짐이며, 진정한 낮아짐은 높아짐이다. 

교회는 형제. 자매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정치체이지 권력 서열로운영되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정부라는 세계에 산다.

 

우리는 교회다. 그러나 시민이기도 하다. 

예수님과 바울 모두 정부를 인정했지만 늘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요한계시록은 정부의 확장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

그시작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그 가운데 계신 어린양, 보좌 주위를 둘러싼 일곱 영께 예배하는 것이다.

기존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들은 예배야말로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라고 여긴다.

월터 브르구만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liturgy)은 세상을 창조하는 행위인가? 예배가 세상을 만드는가?..

예배 행위는 구성상 다채로운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예배는 구성상 사회학적 요소를 지니는데, 피터 버거가 말하는 '실재의 사회적 구성'과 깊이 관계된다.

또 에이모스 와일더가 이해한 거처럼 예배는 구성상 문학적 요소를 지니는데,

상상력으로 채워진 문학은 우리가 살아갈 세계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건, 로이 셰이퍼폴 프루셔가 이해했듯 예배는 구성상 심리적 요소를 지닌다.

우리는 예배에 몸담은 순간을 통해 한 사람의 인격으로서 자기를 드러내고,

또 이 순간을 통해 자라고 새롭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고든 카우프만이보여 주었듯이, 예배는 구성상 신학적 요소를 지닌다.

우리는 하나님이 미지지의 하나님인지 아니면

복음 선포에 힘입어 예배하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분인지를 명확하게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찬양은 뜻밖의 세계,

'이 시대'가 알아채지도 못하고 허락하지도 않으며 신뢰하지도 않는 세계를 향한 위험천만한고도 기쁨에 찬 증언이다. 

이 시대의 통치자들이 저 성가신 노래를 틀어막고 이념과 검열된 구호를 동원해 먹칠을 하려는 형태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애웨께서도 보좌에 앉아 다스리기를 그치지 아니하셨으며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셨다. (시; 22:3)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치명성과 이데올로기의허위성에 맞서기 위해 노래를 불러 또 다른 세계를 현실로 소환한다.

이스라엘의 노래에 담긴 주제는 이 땅에 기사를 행하시는 야웨,

곧 정의와 공평과 공의의 기사를 행하시는 야웨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의 찬양은 정의와 긍휼과 평화가 만발하는 뜻밖의 세상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스라엘의 찬양을 부르는 것이 우리의 참 의무이자 기쁨이며, 인간 동동체를 비롯한 온 천하 만물의 궁극적인 소명이다.

 

충성된 삶으로 이끄는 예배 행위 하나하나는

야수를 경배하고 바벨론에 충성하는 용의 길에 맞서는 반역이자 전복의 행위다.

불의한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들은 정부와 함께 살아가되,

예수님의 통치권을 정부 어느 기관에 섣불리 넘기지 않는다.

제자들은 대통령과 국회의사당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외래 교회가 지역 사회에 제공하는 '섬김'의 방식을 따라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정부에게 요구한다.

제자들은 교회를 통제하려는 국가의 권세를 거부한다.

불의한 체제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는 제자들을

용의 권세로 교회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모조리 거부한다.

진정한 제자는 정부의 대리인이 되는 것도 거부한다.

제자는 정치 지도자들이 제 권력을 키우는 도구로 교회르 ㄹ동원하는 때를 분별해 낸다.

 

교회의 사명, 복음 선교

 

바벨론이 우리를 원하는 이유는 용이 우리를 원하기 때문이다.

바벨론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성찬을 집례하고, 

새 예루살렘의 이정표인 친밀한 사귐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친밀한 사귐 덕분에 우리는 체제에 대항하는 제자로 변모해

바벨론에서도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야ㅇ의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모두의 사명이며, 모두를 위한 사명이다.

바르멘 선언이 나오자 다수의 독일 시민들은

이 선언에는 조국 독일에 대한 애정이 보이지 않는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교회의 사명은 국가 단위에 국한되지 않고 만유를 향해 열려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예수님이 만유를 통치하시는 것은

죽음과 부활과 말씀의 검을 통해, 용, 짐승,바벨론의 모든 것을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이미 거듭 강조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온 나라와 족속과 방언이 하나님을 경배하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맏은 사명은 내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우리의 사명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민지 거점에 선교 기지를 세우지 않으며, 타국을 식민지화해서도 안 된다.

대신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 나라에서 그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호소한다.

선교는 유기적이다. 식민주의가 아니다. 선교사는 국가의 대리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리인이다.

그렇다면 선교 사명은 우리를 다시 복음과 예수님의 통치권에 접붙인다.

당파성에매몰된 이 나라에서 복음과 예수님의 통치권과 선교 사명은 

정치에 잠식 당했고 정당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참화할 일이지 참을 일이 아니다. 

 

먼저 고백하고 기도할지니

 

우리는 예배하며 날마다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혼자든 모여 있든 어디서나 믿는 바와 충성해야 할 분을 고백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5, 로마서 10:9-10, 디모데전서 3:16과 같은 말씀을 입으로 고백해야 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라.(고전 15:3-5)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실체다.

더 좋은 점은 이분이 바로 우리가 신뢰하는 분이며 우리가 충성하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믿음의 고백이 전복 행위이자 어린양의 길을 걷겠다는 표현임을 알고 고백에 나서야 한다.

 

고백과 함께 기도가 이어진다. 현실에 참여하는 제자들은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황제들의 시대였다.

황제들 중 누구도 잔혹한 폭력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누구도 복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예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우리의 기도는 때로 청원과 중보의 기도가 되며, 때로는 감사의 기도가 될 것이다.

때로는 정의를 위한 신원과 탄원으로 다채ㅔ롭게 변주될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는 매주 교회에서도 드려야 한다.

특히 우리는 [공동기도서]의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그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대통령과 각 나라의 위정자들, 그리고 권한을 가진 모든 이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라.

  주의 긍휼을 베푸소서.(공동기도서 384쪽)

 

주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그 크신 긍휼로 우리를 깨워 제자 삼으사 용을 분별하게 하소서.

야수들과 싸우다 슬피 울게 하소서.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애 예루살렘을 내려 주시기 전까지,

바벨론이 이곳에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부록 1. 세대주의를 구성하는 일곱 세대

 

세대주의는 성경을 읽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일종의 해석하이자 신학 체계이기도 하다.

세대주의는 성경을 여러 세대로 쪼개곤 했으며,

주로 일곱 가지 단계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셨다고 본다. 

각 단계마다 상응하는 인간의 반응도 포함되어 있다.

 순수 세대(타락 전)

 양심 세대(홍수 전)

 인간 정부 세대(홍수 이후)

 족장 세대

 율법 세대

 은혜 세대

 천년 왕국

 

세대주의를 대중화시킨 핵심 개념들도 있다. 이개념들이 미국 교회의 종말론적인 인식을 배태했다.

이를 통속적(popluist) 세대주의라 하낟.

 . 창조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세대

 . 모세와 율법

 . 예수와 그의 생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

 . 휴거 전 교회 세대

 . 환난 가운데 이스라엘과 다시 함께하도록 이끄는 휴거(일부를 위한 성전 재건)

 . 아마겟돈 전쟁이 이;ㄹ어나고 환난이 종식됨

 . 재림과 천년왕국 시작

 . 사탄의 놓임과 최종적 폐배

 . 영원한 새 예루살렘

 

세대주의자라고 해서 이러한 사고 틀을 전부 혹은 대부분 믿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전적 관점과 맞지 않는 사고방식들이 더 나은 대중적 표현으로 걸러지지는 않았다.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세대주의적 접근 방식은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신학에 대한 세대주의적 접근 방식

고전적 세대주의를 떠받치는 세 가지 신념이 있는데,

모두 전처년설(천년왕국 이전에 예수가 재림한다는 주장)의 형태를 띤다.  

 

(1) 이스라엘은 교회와 완전히 별개 집단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지상 계획(때로 천년왕국 내에 자리한 '천국')과 관련되어 있고

     교회는 천상 계획(때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왕국)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견해의 핵심은 국가적/민족적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하나님께서 만국을 축복하는 지상 왕국을 세우신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스라엘의 성취가 아니며, 이스라엘을 대체하지도 않고,

      이스라엘 역시 미래의 교회를 상징하지 않는다.

(2) 전혀 다른 해석학을 지닌다. 이 해석학은 언어에 담긴 문자적, 표준적, 일반적 의미를 간혹 언급하지만,

     주로 구약이 신약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다루며, 구약 자체가 지닌 문자적 용어를 우선해서 다룬다.

     따라서 신약은 구약에서 문자 그대로 언급된 것을 성취한다. 

(3) 하나님의 약속은 영적 차원은 물론 물리적 차원에서도 완성된다고 예기(anticipates)하는 역사 철학

 

첫 번째 구별(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은 세대주의를 돌아가게 하는 엔진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실 때(오순절부터 대환난까지) 삽입되는 일종의 중간기적 공동체(막간극)다.

대환난기 동안 하나님은 이미 휴거되고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을 다루신다(계 6-19장).

따라서 좀 낡은 접근 방식에 따르면, 산상수훈은 천년왕국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예비하신 회개의 메시지였던 셈이다.

 

요한계시록의 다양한 환상은 구약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그림의 중심에는 다윗 왕국 예언이 자리한다.  요한계시록 4장부터는 미래를 다룬다.

혹자는 요한계시록이 미래를 읽는 방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임박한 일을 진술하는 1:19에 뿌리를 둔다고 본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완전히 별개의 자리를 차지한다. 

따라서 4-19장의 환난 이전에 교회의 휴거가 일어나는데(때로 3:10-11로 잘못 보기도 한다),

이는 '환난 전 휴거'라고 불리곤 한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천년 지상 통치 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전천년설에 입각한 확신이 자리잡고 있다.

 

[레프트 비하인드] 류의 통속적 세대주의는 전천년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다.

 

대표적 주창자들 : 존 넬슨 다비, C. 스코필드와 스코필드 연구 성경, 루이스 샤퍼, 드와이트 펜테코스트,

                           존 왈부어드, 할린지, 살렘 커반, 찰스 라이리, 존 맥아더, 팀 라헤이, 제리 젠킨스

 

 

2. 묵시란 무엇인가?

 

묵시문학에 지나치게 단순하다거나 열광주의라고 펌하하는 작가들이 꽤 많다.

펌하에도 정확한 이유가 있다면 괜찮지만 내용을 들어 보변 그다지 정확해 보이지는 않는다.

섣불리 펌하하기 보다는 전문가의 의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1970-80년대, 존 콜린스가 이끄는 성서학회는 묵시문학의 복잡한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우리는 교육적 쓰임새를 생각하면서 각 특징을 다듬고 번호를 매겼다.

 

묵시란

(1) 계시 문학의 한 장르다.

(2) 내러티브의 틀을 갖추고 있다.

(3) 그 틀 안에서 계시는 초월적 존재의 중재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된다.

(4) 초월적 현실을 드러낸다.

(5) 현세적이면서도 종말론적인 구원을 전망한다. 

(6) 공간적이면서도 또 다른 초자연적인 세계의 공간과 연결된다.

(7) 그 의도가 위기에 처한 집단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8) 권면과 위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9) 신적 권위에 기대고 있다.

 

각 특징을 다시 읽고 요한계시록에 해당하는 항목 옆에 표시해 보자.

 

요한은 환상에 기초한 내러티브를 만들었고, 이로써 천상적이고 초자연적인 초월 실재의 눈으로 

현실의 실체를 폭로하고 일곱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러한 환상에 맞추어 방향 설정을 다시 하려 했다.

요한은 독자와 청중에게 이 환상에 온 감각을 열라고 호소한다.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 바를 신자들도 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 보기를 원했으며,

이런 공감각적 체험으로 인해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그 대안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소망했다. 

 

요한계시록이라는 책을 쓰고 읽기 위해서는 묵시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묵시의  요소를 분류하고, 분류된 요소들을 종합한 뒤에 요한계시록에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다움은 묵시의 작동 방식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작동 방식에 있다. 

잊지 말라. 요한계시록은 '계시'를 자처한 역사상 최초의 책임을(계 1:1)

 

 

3.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그리스어 antichristos)는 '기름 부음 받은 자'(christos)와 '반대라는 단어로 구성된 합성어다.

이단어는 신약성경에 다섯 번 등장하고(요일 2:18, 22/ 4:2-3 /요이 7절),

사도 교부(폴리카르포스의 [빌립보 서신]) 문헌에는 한 번만 등장한다.

하지만 숱한 이미지들이 수세기를 거치면서 흠집을 내어 적그리스도 개념은 너덜너덜해졌다. 

가령 복음서는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려고 표적과 징조를 일으키는 '유사 그리스도들(pseuso-christs)을

적그리스도라고 지목한다.(마 24:24, 막 13:22).

데살로니가후서는 "불법의 사람"을 지목하는데, 이는 악의 전형이자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는 사람을 말한다((살후 2:3,8,9)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바다와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들을 가리킨다(계 13:1-18).

이런 이미지 중 어느 하나도 모든 민족을 하나님께 대적하도록 이끄는 특정 인물을 지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적그리스도는 개개인이 모인 집단을 가리키며,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들이다.

 

결국 적그리스도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상징이며,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예수)을 따르지 않는 자라면 누구나 적그리스도가 된다.

 

두가지를 명심하라.

(1) 요한계시록 어디에도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2) 요한서신이 거론하는 '적그리스도'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자들이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 7절)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훗날 세계 지도자로 부상할 특정 인물에게 사용하지 말라.

오히려 다니엘 7장의 '짐승'이나 '악'(벨리알), '작은 뿔'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두루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

한 명의 적그리스도를 찾기보다 우리 가운데 적그리스도가 있는지를 분별하라. 

 

 

4. 아마겟돈

 

'아마겟돈'은 접두사 '하르(har, 산)와 므깃도(Megiddo,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지명)가 결합된 히브리어로

므깃도산을 의미한다. 므깃도에는 산이 없지만,

이곳은 피가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스타디온"까지 번진 곳이라는 요한계시록 14:20과 연동된다. 

따라서 아마겟돈은 선혈이 낭자한 이 세상 최후의 전쟁을 가리키기고 한다.

그렇다고 아마겟돈을 세계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는 특정한 지리적 위치로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마겟돈은 히브리 성경의 여러 곳에서 빌려 온 명칭이다.

 

. 스가랴는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처럼 장차 겪게 될 패배로 인한 큰 민족을 언급한다

   (슥 12:10-11, 계 1:7: 19:11-21).

 . 사사기는 드보라가 므깃도 물가에서 이스라엘의 적을 물리친 것으로 이야기한다(삿 5:19-20).

. 아합과 이세벨의 동맹이었던 남유다 아하시아왕이 므깃도에서 죽었다(왕하 9:27).

. 요시아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죽임을 당하며(대하 35:22),

   산(har)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산에서 적들을 물리치시는 환상을 떠올리게 한다(겔 38:8-21: 39:2,4,17).

 

아마겟돈(하르-마게돈)이라는 이름은 복합적이다.

이 명칭은 복합 이미지로서 하나님의 반대 진영에 선 모든 것의 최종적인 파멸을 상징한다.

요한은 존재하지 않는 팔레스타인 북부 산에서 벌어질 미래의 전투를 내다본 것이 아니라,

로마(바벨론)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대적들이 패배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따라서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은 집결하고 저항하는 이미지,

어린양께 맞서는 적그리스도 세력을 최종적으로 제압하는 이미지다.

 

요한계시록에 친숙한 사람들은 아마겟돈 전투가 실제로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모두 집결할 수도 있겠지만, 항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끝이 난다. 

 

5. 고대 신화들

 

놀랄 독자도 있겠지만 요한은 12장에서 고대 신화의 이미지를 일부 빌려 온다. 

요한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여러 극적 장면 안에서 재구성을 시도한다.

기본적으로 이 신화는 신성한 아이가 모신(a cosmic mother)에게서 테어나고,

혼돈의 괴물이 그를  위협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로마 신화 : 위대한 용 피톤(Pyton)은 신탁을 통해 자신이 언젠가

여신 레토(Leto)의 자식 중 한 명에게 죽임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피터(Jupiter,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로 인해 여신 레토가 임신을 하게 되고,

피톤은 아이를 낳기 전에 그 여신을 죽이려 했지만 북풍의신(the North Wind) 의 보호를 받았다.

그녀는 밧모섬에서 서쪽으로 60km 떨어진 델로스섬에서 쌍둥이 아폴로와 아르테미스를 낳았다.

아폴로는 생후 4일 만에 델포이에서 피톤을 사냥하는데, 처음부터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더니

활로 그 괴물을 무찌른다(아폴로와 아르테미스는 궁수였다).

그리스-로마적인 맥락에서 이 이야기는 황제가 혼돈의 괴물을 물리친 신의 아들 아폴로라며 찬양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종의 제국적 프로파간다인 셈이다(베르길리우스 [목가집],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

 

요한계시록 : 요한계시록을 들었던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요한은 출산이 임박한 우주적 여인, 곧 모신을 묘사하는데, 혼돈의 괴물인 용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아이를 삼키려 한다.

여인은 큰 독수리의 날개를 받아 보호되고 따으이 도움으로 살아남는데, 

여인의 아들은 호아제 중의 호아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결정적 승기를 잡은 것도 모자라 괴물을 오나전히 무찌르고 봉인시킨 분이 되어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 올려졌다(창 3:15, 37:9-11, 출 19:4-6, 시 2:9, 사 27:17-18, 계 1:4-5, 5:6, 12:7-12, 20:11-15).

 

요한은 서슴없이 신을 참칭하는 오만한 로마를 조롱하고 전복하기 위해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변용한다.

그리스-로마가 말하는 신의 아들과 비슷하지만,

이 신의 아들은 여러 민족을 보살피고 어둠과 혼돈의 세력을 정복하며 로마의 권세를 박탈한다.

"다윗의 메시아의 힘으로 아폴로의 역할에서 로마를 떼어 놓은 뒤 혼돈의 괴물인 용과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 요한은 로마의 길에 드리워진 장막을 걷어내고 그 실체를 폭로한다.

그렇다. 로마의 제도와 통치자들은 파괴와 혼돈을 선전하는 용의 도구에 불과하니 환호와 찬사는 금물이다.

하지만 남자아이(시 23:9, 사 17:14, 66:7-8)는 혼돈의 세력을 정복했고, 

환호와 찬사는 바로 그분의 것이다(계 1:17-18, 4-5장, 14:4-5)

 

 

6. 휴거의 짧은 역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휴거 개념은 19세기 초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열린 작은 부흥회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 10대 소녀가 '환난 전 휴거'의 환상을 봤다고 주장했는데,

그때 교회는 이 세상 밖으로 나가 하늘로 휩쓸려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영국 목사 존 넬슨 다비는 그 환상이 신뢰할 만하다고 확신했고, 그것을 진리처럼 전파하기 시작했다.

다비는 그의 휴거 복음을 미국으로 가져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서

'환난 전 휴거'이 세계적 전파자가 되는 드와이트 무디를 만났다. 

 

20세기 초, 휴거 복음 운동은 [스코필드 관주성경] 출판을 필두로 단단히 토대를 다지게 되었다.

이 관주성경은 병행구절이 수록된 인기 있는 연구 성경이었다.

스코필드는 본문에 단락 소제목과 연구 노트까지 삽입했다(가령 마태복음 24장의 제목은 '예수, 휴거를 예언하시다'이다).

소제목과 연구 노트가 덧붙자 이 성경을 탐독하던 사람들은 성경이 휴거를 말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은 평신도들 사이에 광버무이하게 확산되었고, 여러 학파와 출판사 그리고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의

등장에 힘입어 평신도들의 신학 운동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요약하자면, 휴거 복음 운동이라는 근대적 현상은 1,800년 교회사 내내 존재하지도 않았던 현상이며,

지난 2세기에 들어서야 문학적 시금석 자리에 올라 세대주의 신학의 중심 교리가 되었다. 

 

 

7. 휴거인가 부활인가?

 

신약하자 벤 위더링턴 3세는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에서 보편적인 해석학적 지혜를 소개한다.

"콘텍스트가 없는 텍스트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의미를 위한 명목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텍스트를 둘러싼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맥락에서부터 텍스트를 섣불리 잘라 낸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얻어 내고자 하는 의미를 위해 여건을 조성하는 꼴에 불과하다. 

휴거를 다루는 주요 구절을 살펴보면, 성경적 근거를 어떻게든 쥐어 짜내려고 고유한 맥락에서 분리시킨 듯 보인다.

여기서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맥락이 제거된 대표적인 구절 두 개를 알아보자.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재림을 노아 시대와 비교하셨는데,

홍수 전에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마 24:37-39, 창 6-9장).

예수님은 홍수를 거론하며 미래에 일어날 심판을 말씀하신다.

홍수가 나면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다(마 24:40).

이 구절에서 맥락을 제거한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는 남아 환난을 감내하리하고 했지만, 

노아 이야기에서는 의인만이 살아 남는다.

홍수라는 표상을 살펴보면 의인들은 남겨지고, 나머지 사람들이 심판의 홍수에 떠내려간다. 

 

신약성경을 두루 살펴볼 때 휴거를 직접 거론하는 본문은 단 한 곳이다.

다른 본문들은 휴거를 직접 거론한다고 못 박기에는 무리다.

데살로니가전서 4:15-17만이 휴거를 직접 거론하고 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본문은 누가 봐도 휴거를 말하고 있는데, 알다시피 신약 어디를 봐도 인간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내용은 없다. 

그런 내용이 있을 법한 요한계시록에도 휴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따르면,

바울은 황제나 고관들이 입성할 때가 되면 미리 나가 영접하는 도시 지도자들의 표상을 사용하고 있다.   

이 중대한 용어('영접하다')는 도성에 머물다가 밖으로 나가 공적인 만남을 갖고

예우에 맞는 환영식을 준비하는 인사들을 가리키곤 한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파 ㄹ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것이다(살전 4;16-18).

바울은 절묘한 언어로 오아이 성으로 귀환할 때 환영하고 축하하는 광경을 묘사한다.(시 24:7-10의 입성 예식과 비슷하다).

이 언어는 왕의 수행단(entourage)을 가리킨다,.

이들은 먼저 올라가 공중에서 (여기서 말하는 'air'는 하늘을 뜻하지 않는다) 영광의 왕을 맞이하며 환영할 것이다.

이는 그분을 위해 마련된 지상의 축하연으로 그분을 모셔 오기 위함이다.

이 언어가 집약되는 보편적 이미지가 있다.

성곽을 두른 도성의 파수꾼이  왕의 행차가 당도했음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들으면,

곧장 왕의 귀환을 성대히 환영할 수행단을 준비시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팔이 울리면, 우리도 왕을 모시러 나아갈 것이다.

하늘로 휴거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참된 왕이 이 땅으로 돌아오심을 맞이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넬슨 크레이빌에 따르면, 휴거는 하늘로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 우리가 그분을 맞이하고 영접하러 가는 것이다.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데살로니가전서 구절은 휴거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냐 기쁨에 찬 환영이냐, 이 두 가지 이미지를 제공할 뿐이다.

신약을 두루 살펴봐도, 특히 요한계시록에도 휴거에 관한 본문이 없다는 사실은

휴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8. 요한계시록은 판타지인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일부학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요한계시록은 소위 '판타지'라고 불리는 문학의 한 유형인가?"

판타지는 현실에서벗어나 고유한 세계를 창조한다.

그래서 그간 익숙했던 세계와 전혀 다른 셰계를 상상하게 만들고,

희망을  품고 행동에 나서도록 힘을 불어 넣는다.

요한계시록이 신뢰하듯이,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신다.

일곱 교회의 신자들은 새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며, 

로마의 권세는 결국 파국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리며, 로마가 망하고 우리가 다스리게 된다는 것을 

아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이 상상의 나래, 판타지 세상에 깊숙이 가담하고 있다.

내 어린 학생들 중 일부는 요한계시록을 가공한 이야기, 신화적 이야기로 생각하는데,

지어낸 신화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라 마블 영화나 해리 포터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다.

 

세계적인 묵시문학 전문가인 존 클린스는

이 문학 장르를 '환상적'(fantastical) 또는 '판타지적"이라고 즐겨 부르는데,

이 문학에 등장하는 판타지 중 일부를 "폭력에 대한 판타지"라고 일컫는다.

보검과 하트는 판타지를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의 경계인 현실 세계의 규칙을 서슴없이 위반하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판타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 심지어 "양식에 어긋나고 상식 밖에 있으며 불가능한 것"이라고 기술한다.

그들도 요한계시록이란 "우리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의 경계 앞으로 데려가 저 어둠 너머의 찬란한 빛을 보게 한다"

 

요한계시록을 판타지로 보는 관점이 현대 독자들에게는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이 책이 서점에서 '판타지 문학' 책장에 있어서가 아니라 '묵시록' 이라 불리는 상상의 문학,

기상천외한 문학과 겹친다고 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피오렌자가 말했듯이, 요한계시록의 언어는 "예측적-기술적 언어가 아니라 ...신화적-상상적 언어다."

즉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동물이 말을 하고, 용이 불을 내뿜고, 사자가 어린양이 되고, 천사와 악마가 전쟁을 벌인다."

이런 점을 보면, 요한계시록은 신화와 판타지의 언어라는 뜻이다. 

 

하지만 명심할 점이 있다.

묵시록, 판타지, 상상 문학의 옷을 입은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서부의 억눌린 이들과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강렬한 카타르시스와 치유의 힘을 전달한다.

아델라 야브로 콜린스는 낭독자가 이 텍스트를 읽을 때 청중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두려움과 분노로 응어리진 감정이 승리의 역동적 이미지를 입고 광활한 스크린에 투사되었고,

청중의 마음은 이루말할 수 없는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로 벅차올랐다. 

존 콜린스는 이렇게 표현한다. 

"신적 복수에 대한 판타지를 통해 압박감에서 헤어나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누구러뜨리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피핀은 묵시에 담긴 카타르시스적 치유가 바벨론에서 희생양이 되고 있는 공동체에도 통하고 있다는 점을 덧붙힌다.

 

어떤 형태를 띠든 간에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특히 요한계시록 12-13장이나 18-19장을 채우고 있는 이미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불의와 악을 이기신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 소식은 우리에게 희망으로 충일한 삶을 열어 주고 신산한 현실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9. 천년왕국

 

천년왕국 [the millenniu, mille(1천) + annus(년)] 개념은

요한계시록 20:1-6에서 나온 그리스도와 충성된 순교자 증인들이 천년 동안 다스린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천년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신학 체계(전천년설, 후천년설,무천년설)가 석연치 않다해도

진지하게 취급해야 한다. 이렇듯 저렇듯 중요한 것은,

1,000년이 요한계시록의 다른 모든 숫자와 마찬가지로 통계적인 수가 아니라 강력한 상징이란 점이다.

혹자는 천상의 신자들과 그리스도가 현재를 통치하는 것이 천년왕국이라고 생각한다.

 

요한은 최후 심판과 새 창조 이전에 일시적인 메시아의 지상 통치가 있다는

유대교 묵시 상징(바룩2서 40:3, 에스라4서 7:28-9) 을 취해

순교한 중인들에 대한 확신과 격려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요한이 확신하건데, 용과 짐승의 재판을 받고 죽임 당한 사람들은

정당함을 확인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것이다.(13:1-10, 20:4-6)

결국 하늘의 관점이 최종적으로 드러나고 진리가 명백히 드러나면,

모든 원수는 패배하고 심판을 받으며  순교한 증인들은 승리하고 생명과 통치권을 받는다.

천년왕국이 상징하는 것은 충성된 증인들의 승리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고난받은 사람들은 모두 가장 존귀한 상급을 받을 것이다.

이 상급은 최고의 대가를 치른 이들에게 약속된 특별한 보상이다(첫째 부활, 통치, 둘째 사망을 피함).

요한이 천년왕국이라는 상징을 사용하는 까닭은 

" 그들을 신원해 주시는 방식을 예측하기보다는 신원의 의미"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주디스 코백스는 천년왕국에 대한 주요 신학자들의 견해를 두루 살핀 뒤

천년왕국을 통해 투사된 다양한 목적의식을 보여 준다.

(1) 천녀왕국은 의인들이 불멸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2) 요한은 순교자들의 신원을 확약하면서, 이를 터 삼아 모든 것을 바치는 신앙을 가지라고 독려한다.

(3) 천년왕국은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선함을 확증한다.

(4) 천년왕국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예증한다.

(5) 현재를 사는 우리의 행동에 동기를 불어넣고 방향을 제시한다. 

 

10. 유토피아, 유크로니아, 진보주의

 

요한은 새 예루살렘 호나상을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제시했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 이상 사회 개념을 하나 꼽자면 '유토피아'(utopia)를 들 수 있다.

이 개념은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나

조너선 스위프트 (Jonathan Swift)의 풍자극 [걸리버 여행기]로 관심을 집중시킨다.

요한의 새 예루살렘은 유토피아에 대한 다채로운 환상을 열어 주었다.

새 예루살렘이 유토피아인 까닭은 말 그대로 인간의 이상이 투영되어 있고

그 단어가 의미하듯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어는 언어유희를 펼친다. '유'(u)는 '없다'(그리스어 ou/out)에서, '토피아'(topia)는 '장소'(그리스어 topos)에서 왔다.

따라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상에서 발견되는 장소가 아니다.

다만 그의 책  끝에 나오는 시詩가 이르기를, 유토피아는 익숙한 세계의 한 부분은 아니지만

플라톤이 꿈꾼 이상 사회를 월등히 넘어서고 그곳의 도시와 법률이 워낙 탁월하기에

'유토피아'(eutopia, 곧 '좋은 장소'라 불리어 마땅하다.

 

'유크로니아'(euchronia)는 지상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완벽한 시기, 미래의 좋은 장소를 말한다.

유크로니아는 이성과 과학의 역량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낙관론을 ㄹ터 삼고 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유토피아적 전망을 계승한다.

그렇다면 사회의 진화는 유크로니아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이를 수 없는 머나먼 곳의 외딴 섬, 곧 '존재하지 않는 장소'인 반면,

유크로니아는 어쩌면 도달할 수 있는 곳, 따라서 사회 발전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황금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유크로니아를꿈꾼 대표적인 인물로 흔히 토머스 페인(Thomas Paine)과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식민지 미국의 청교도들을 비롯한 최초 이주자들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엥겔스나 마르크스 같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유토피아주의자들도 포함하 ㄹ수 있겠지만,

이들의 전체주의적 행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유크로니아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 ㄹ수있다고 믿었다.

 

현대 진보주의는 인간의 역량을 신뢰했다.

그래서 더 나은 법을 제정하고 시민을 육성한다면 더 나은 도시, 국가, 세계를 이룩할 수 잇/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진보주의는 유크로니아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종말론의 역사에서 진보주의는 후천녀설과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새 예루살렘이 생사의 경계를 넘어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곳이라 해도, 

하나님은 이곳에서 인간을 위해 품으셨던 계획을 손수 이루신다.

요한의 새 예루살렘은 전혀 다른 세상에 있지 않다.

하나님 나라가 거하는 이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혹자는 새 예루살렘을 표현하기 위해 '유토피아'(utopia), '유토피아'(eutopa), '유크로니아'(euchronia)등을 사용한다.

그리고 로마인에게 요한계시록은 디스토피아가 된다.

유토피아와 유크로니아, 진보적 이상주의는 이렇게 다채롭게 전개되었지만,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동물농장]과 [1984], 래르 엘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응전을 불러왹도 했다.

 

11. 요한계시록의 노래들

 

4:8-11 화답하며 부르는 노래

 

4: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4:9-11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의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5:8-14 화답하며 부르는 노래

 

5:8-10 그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르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5: 11-12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이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5: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7:9-12 화답하며 부르는 노래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르 ㄹ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처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7:11-12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1: 15-18 화답하며 부르는 노래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11: 16-18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과멸망시킬 때로소이다.

 

  12: 10-12

12:10-12 내가 도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자매들을 참소하던 자

                      곧 밤낮으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쫒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이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아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15:2-4

15:2-4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야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16:5-7 화답하며 부르는 노래

16:5-6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말하여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예언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마실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16:7 내가 또 들으니 제단이말하기를

     

             그러하다 주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19:1-4 화답하며 부르는 노래

19:1-1-2 이 일 후에 내가 들이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19: 3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19: 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19:5-8 화답하며 부르는 노래

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19:6-8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우리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고아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12. 진보주의의 진보

 

우파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공화당의 기독교 국가주의로 정치화 했다면.

진보 복음주의자들은 민주당이나 사회민주당 계열의 정당에 기울어졌고

정치권력을 구원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에 빠지기도 했다.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에 기반을 둔 전통 기독교를 등지고 진보주의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 말은 이전의 신앙에서 벗어나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적극적 행동주의로 넘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주의자들를 향해 신앙을 포기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잭 젠킨스가 [미국의 예언자들]에서 좌파적 성향의 종교 진영이 지난 선거에 미친 영향을 세세하게 분석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진보주의자가 된 이유로 자신의 신앙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책 앞부분에서 젠킨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는데,

좌파는 일관된 종교성이 없고, 세속화 현상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통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젠킨스는 "종교적 좌파는 현대 진보주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며 나름의 정당성에 주목한다.

그의 말은 옳다.

 

그러나 기독교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신앙과 정치의 불균형은 걸림돌이 된다.

요한계시록은 바벨론 체계를 거부하고 바벨론의 실체를 분별하도록 부름받은 제자들, 바로 그 불온한 이들을 위한 책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연구에서는 기독교 국가주의와 진보주의, 두 그룹을 함께 다루는 것이 필수다.

기독교 국가주의와 진보주의는 둘 다 그 매력과 존재감을 드러낼 역량이 있으며

실제로 미국 사회에서 할동 중이니, 지금 이곳에서 요한계시록의 힘을 이해하려면 양 진영을 모두 연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보주의란 무엇인가? 진보주의를 구성하는 네 가지 차원이 있다.

바로 역사적, 경제적, 시회 개혁적, 예언자적 차원이다.

이 중 첫 번째 차원이 나머지 차원에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로버트 니스벳의 [진보의 사상사] 는 무려 40년이 지났음에도 진보의 역사에 대한 표준 연구서로 꼽힌다.

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간단히 말해서 진보라는 개념은, 인류가 과거의 원시, 야만, 무가치의 상태에서 헤어나 발전해 왔으니

현재도 발전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보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진보란 "인류가 지식, 문화, 도덕 자산을 비록 더딜지라도 점진적으로 , 반드시 더 높은 상태로 고양시킬 것"이라고 믿는'

일종의 독단(dogma)이다.

현대 진보주의에서 진보는 역사 이론으로 작동한다.

역사적 진보주의는 자본주의 경제 성장 개념과 밀월 관계를 맺으면서

생산과 재화 소비의 확장을 강조하는 사상이 되고 말았다.

이를 경제적 진보주의라고 하는데, 우리 시대의 주요 사상가인 크리스토러 래시는

그의 저서 [진보의 착각]을 통해 이 사상을 맹렬히 비난했고,

오늘날 진보주의자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여기에 저항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를 불평등을 양산하는 경제 성장을 제한하는 행태를 거절하고

투표와 정부 규제를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는 진보이론과 연결한다.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자의 약 20퍼센트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전적 진보주의자'로 알려지는데,

이런 구조적인 양상에 대한 해설은 뉴전트의 [ 진보주의]에 잘 소개되어 있다. 

 

진보주의자는 그 시대의 사회복음주의자와 동일시될 수 없고, 해방신학과도 많이 다르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복음주의는 월터 하우센부쉬를 필두로 이어진 미국의 사회참여적 신학 전통을 뜻한다.

이 신학 전통은 기존 현실 질서를 기독교화하는 것에 목표를 둔다).

진보주의적 그리스도인은 시민 공화주의를 일구는데 헌신하고

법과 현실을 정의에 가깝게 제정하라고 정부에  촉구하는 데 초점을 둔다.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은 진보주의의 심장을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여전히 그 힘이 뿜어져 나오는 곳은 동일한 네 개의 심실이다.

사회 정의의 이상, 연방 정부의 행정력, 권력의 중앙집중화, 유권자의 여론,

진보주의자들은 예언자와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차용했다.

 

진보의 본질은 역사 전체를 품는 거대한 울타리에 관한 것이며,

모든 것이 정의를 향해 진일보하고 있다는 매우 낙관적인 사고와 함께 간다.

하지만 역사를 둘러싸고 있는 이 큰 울타리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답은 뻔하다. 결국 권력자들과 그들이 선호하는 이들을 위해서 울타리가 휘어지고 말았다.

사회 개혁적 진보주의에 뿌리내린 예언자적 진보주의는 만민을 살리기 위해 공평과 정의에 초점을 맞춘다.

억측가들과 염세주의자들이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며 사람들을 들쑤시는 데 비싼 시간을 쓰고 있지만,

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여러 생활 영역에서 세상은 점점 진보하며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발전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이유는 없다.

식량의 질이 높아지고 이러저런 지식도 많아지고 있다.

전 세계적 차원에서 위생 수준은 개선되고 있고 기대수명도 오르는 중이다.

빈곤이 감소하고 폭력도 날마다 개선되고 있고, 문명률도 낮아지고 있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향한 공적인 요구도 커지고 있다.

이런 추세만 봐도 진보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도달했다는 식으로 공치사를 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지난 세기의 변화를 알고 나면 우리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믿음이 자연스레 생겨난다.

 

진보주의는 정치 스펙트럼에서 왼편에 있다.

진보주의 역시 우파 기독교 국가주의처럼 정치적 성향이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도 요한계시록의 환상이 아우르는 세계 속에 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바벨론 체제를 거부하고 진보의 옷을 입은 바벨론의 권세를 분별해 낸다.

흔히들 통념상 우파는 종교적이고 좌파는 세속적이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종교와 진보적 행동주의] 저자들은 진보주의 운동을 이렇게 요약했다.

"진보적 종교 단체는 진보 정치에 도덕적 근거가 있는 견해를 꾸준히 장려하고,

신앙이 담긴 언어와 상징을 사용해 정치적 공약을 표현하며, 

진보 운동의 정치적 주장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해 왔다."

그들이 말하는 진보란 사회 개혁을 뜻한다.

즉 "정의와 온정이 넘치는 사회,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나는 이것을 예언자적 진보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들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진보적 행동주의] 저자들은 종교적 진보주의에 크게 네 가지 줄기가 있음을 발견했다.

평등에 초점을 둔 진보적 행위, 사회 정의에 입각한 진보적 가치의 형성,

자기 종교 이외의 진보주의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태도,

만민을 위한 정의를 위해 기독교 신학을 개혁하려는 진보적 신학, 이 네가지다.

따라서 이들은 세속적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이들이 사회에서 종교의 자리를 말살한다는 식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떠들지만, 

이런 비아냥으로 진보적 움직임을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진보 논객으로 필립 고스키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미국의 시민 종교 전통을 되살리자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 참여 방식을 '예언자적 공화주의'라고 부른다.

예언자적 공화주의는 덕망을 갖춘 시민들의 높은 의식 수준과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의무 및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지만,

역사를 직선적 관점이 아닌 순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이 말은 예언자적 공화주의는 항상 시민 생활의 기초로 돌아가는 것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고스키의 주장은 평등, 진보, 교육 분야에서는 여전히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

그는 종교적 국가주의를 "애국주의로 위장한 국가적 차원의 자기 숭배"라고 비판하고,

급진적 세속주의에 대해서도 "급진적 평등주의로 위장한 문화적 가식"이라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고스키가 예언자적 진보주의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형태의 진보주의는 급진적 자유주의를 견제하기에 충분하고,

품이 넓은 정의와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능히 열어 줄 수 있다.

 

예언자적 진보주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한다.

예언자적 진보주의의 뿌리가 성경의 예언서에 있기 때문이다.

역사 이론으로서 예언자적 진보주의는 신의 개입보다는 인간의 행동으로 이루어 가는 종말론을 주장하고,

구원의 의미를 개인의 죄보다는 구조적인 죄와 긴밀히 연동하는 성향이 있다.

종말론 전문가들이 볼 때 진보주의는 후천년설로 기울어져 있다.

기독교 종말론의 역사에서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이며,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여 천년왕국이 열리면 그 '이후'에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마지막 의견을 제안하고 싶다.

기독교 국가주의와 진보주의는 모두 기독교 종말론의 한 부류다.

어떤 것은 다른 종말론보다 훨씬 세속적이지만, 둘 다 요한계시록의 저항적 제자도를 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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