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영성일기

말씀대로 사는 것

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5. 5. 2. 09:16

본문 : 시편 119편 17-32절

 

빛이신 말씀으로 어두운 눈을 밝히신다.

우리는 자주 고달픈 현실과 어두운 마음 때문에 사망의 잠에 빠지는 것처럼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눈을 밝히셔서(시13:3)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눈을 열러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 어떤 능력과 아름다움도 알아볼 수 없다.

엘리사의 기도로 그의 종이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군대를 볼 수 있었던 것처럼(왕하 6:17),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열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살리고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셔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딤후 3;16)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히 4:12) 모든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녹아내리는 인생을 세웁니다.

흙바닥에 달라붙은 비참한 상황에서 살리는 말씀을  얻어먹고 일어선 사람은

날마다 그 말씀을 갈망하게 됩니다.

다시 살리시고, 다시 세워주시는 말씀의 능력이 매일 묵상하는 우리 삶에도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시인은 이 땅에서 나그네에 불과한 자신의 삶을 비관하면서도,

하나님이 분명하고 친절한 지침서를 주셔서 자신의 길을 이끌어 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낯선 길을 걷는 데다 낯선 이들의 위협까지 더해지는 상황이지만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낯설게 대하지 않으시니, 무서움 속에서도 똑바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비치는 낯선 세상이지만,

여전히 말씀이 우리의 길을 바르게 인도하는 지침서임은 변함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진흙덩이에 엎어진 인생을 일으키어 믿음의 길로 달려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해줍니다.

그 말씀에 대한 신뢰로 시인은 지금 곤경에 '붙들려'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이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말씀에 '붙들려'(매달려) 살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이 나를 낙심과 무기력으로 밀어넣는 것 같은 요즘,

그럼에도 힘을 내어 달려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주의 말씀 때문에 행복합니다.

 

제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새 힘을 주셔서 믿음의 길을 달려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

[ 후대해 주시기를 청원하는 기도 ]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복된 길, 완전한 길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자는 완전한 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동거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고, 실천하는 것에 힘쓰기 보다; 

함께 걸어가고, 함께 사는 것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것입니까? 

왜 주의 법도와 율례를 행하는 것보다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열심히 배우며 마음에 두는 것에,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입니까?

예, 그것은 첫째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현재 내게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에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그런 능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느냐? 아닙니다. 

내가 혼자 스스로 결심하고 훈련하며 연습하는 것으로는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없음까지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둘째로, 하나님께로부터 훈련을 받아야,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배워야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심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능력이 없는,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진정으로 망하게 만드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철저히 타락한 죄인이라고 확실히 인정한다면, 

오히려 그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더 확실한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는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인정한다고 말만 할 뿐이며, 

계속해서 우리의 소견과 우리의 생각을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포기하고 내 소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과 행복, 영생의 비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나의 비루함과 피조물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보낸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인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과 함께 살며 주인께 배워야 합니다. 

배움의 핵심은 내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주인의 생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도 항상 잘 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더욱 잘 안됩니다. 우리 육체의 습성과 소욕들이 방해를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을 후대해 달라고(17절); 

주의 교훈들을 귀하게 여길 때 비방과 멸시가 떠나게 해 달라고(22절); 

진토에 붙은 자기 영혼을 살아나게 해 달라고(25절);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31절).

이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17절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22절, 31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을 주시면 열심히 계명을 지키겠다는 조건부 기도가 아닙니다.

열심히 주의 말씀에 순종했으니 상급을 달라는 요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소중한 진리의 말씀이지만, 기본적으로 꿰어 있는 구슬과 같습니다.

꿰어져서 목걸이가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을 떼어서 보아서는 그 진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17, 22, 25, 31절은 17-32절까지 16절이나 되는 큰 단락의 한 부분입니다. 

나머지 12개의 절과 연결되어 있는 목걸이 속의 구슬입니다. 

그러니 한 절, 한 절의 의미에 집중하기보다; 

16개의 구슬이 꿰어진 전체 목걸이가 어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지에 우선적인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각 구슬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더 돋보이게 됩니다.

17절에서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해 달라고 청원한 것은, 후대를 받고 사는 삶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가 목적입니다. 

18-20절이 시인의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인은 잘먹고 잘사는 것에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해 달라고, 

주의 계명들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18-19절). 

그의 마음에 있는 주된 관심사는 주의 규례들입니다(20절).

21절에서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다고 말하는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런 자들과 대조적으로, 주의 교훈들을 소중히 붙든 자신에게는 

비방과 멸시를 떠나게 해 주셔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청원을 이어서(22절)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역시 아닙니다. 23절 말씀이 증거입니다. 

주의 증거들이 그의 즐거움이요 충고자라는 고백이 시인의 진심입니다. 

시인은 제사에 마음이 있는 것이지, 젯밥에 마음이 쏠려 있지 않습니다.

25절에서 자신을 소생시켜 달라는 간구, 31절에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해 달라는 요청이 모두 그렇습니다.

26-30절이 모두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된 은혜를 구하거나 그것에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32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넓히시면, 그의 마음의 스트레스를 풀어주시고 평안을 주시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이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는 일이 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면, 평안을 주시면, ‘여행을 떠나겠다,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으러 맛집으로 달려가겠다’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직 시인은 연약합니다. 고난과 고통을 담대히 이겨낼 만큼 충분히 믿음이 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지 않게 해 달라고,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청원을 드리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수치감과 모멸감 때문에 믿음 생활에, 말씀에 집중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청원입니다.

시인의 이런 마음을 우리도 가져야 하겠습니다. 

단순히 복을, 건강을, 형통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 생활, 말씀 생활 잘 할 수 있도록 

적절한 복, 적절한 건강을 달라고 기도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고 싶으셔도, 물질의 풍부함을 허락하시고 싶으셔도, 건강을 주시고 싶으셔도; 

그렇게 되면 놀고 즐기는 것에 정신이 팔려 오히려 말씀을 등한히 하고,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셔서 

못하시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욥과 같은 믿음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궁핍을, 질병을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믿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런 믿음에까지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형통함이 없어도, 건강하지 못해도; 너무나 소중한 기도와 말씀이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고 꼭 붙드는 믿음에까지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아직 그런 믿음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너무 힘들면 기도하지 못하고, 너무 가난하면 감사가 잘 나오지 않는 믿음의 수준입니다. 

우리와 비슷한 믿음의 수준입니다. 

믿음이 적지만 없지는 않습니다. 겨자씨 한 알같이 작지만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생명이고 복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고, 그것이 참된 기쁨을 준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며 너무 가난해서, 너무 힘들어서

말씀과 기도를 충분히 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최소한 이 시인의 기도와 닮은 기도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아침이다.

기록된 말씀을 주셔서 늘 가까이하고 일고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하다.

구약의 말씀과 선지자들의 말씀이 있음에도, 직접 이 땅에 찾아 오셔서 말씀하여 주서 감사하다.

 

인생의 빛이 되고 등불이 되며, 생명과 진리로 인도하는 말씀이 옆에 있어서 참 감사하다.

이 말씀만이 나의 유일한 삶의 기준이 되고 잣대가 되며 인도자가 되게 해 주소서. 

날마다 그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알고 날마다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에 게으리지 않게 해 주소서.

죽은 활자로 다가가지 않게 하시고,  이 말씀이 살아 역사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그 말씀들을 읽을 때 분명히 깨달아 알도록 영안을 열어 주시고

선포되는 말씀들이 제대로 들려지도록 귀를 열어 주소서.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말게 하시고

마음으로 믿어지게 하시며

말씀이 내 삶을 온전히 채우고 체화되게 하여 주셔서

삶으로 말씀을 살아내게 도와 주소서.

 

'2025년 영성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이 빛이요 등불이다.  (0) 2025.05.07
오동나무 꽃을 보았는가?  (1) 2025.05.07
죽음처럼 강한 사랑  (0) 2025.04.30
사랑의 노래  (0) 2025.04.29
일편단심  (1) 2025.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