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60 중반을 향해 달려가도 설은 설인가 보다.
커다란 설레임이나 기다림과 기대는 없으나
그래도 일가친척의 안부가 궁금하고 고향산천이 그리운 것은 어쩔수가 없다.
아직도 눈 감으면 초가삼칸 고향 집이 떠 오르고
새마을 운동으로 바뀌어가던 동네 모습이 기억난다.
설날이 가까와지면 떡방앗간이 분주했었다.
기억하기로는 3구에는 우체국에 다니시던 김덕배 씨 집 골목 입구에 떡방앗간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가래가 두 줄로 쑤욱 밀려 나오면
주인장은 큰 가위로 적당한 크기로 싹둑 잘라냈다.
따끈따끈한 가래떡 하나 집어들고 먹으면 맛있었다.
집에서는 쑥떡, 인절미, 콩떡, 시루떡을 만들어 한 소쿠리 만들었다.
한과, 식혜, 조청, 전 ...
뜨거운 모래 속에서 부풀어 오르던 한과가 기억이 난다.
콩떡은 콩고물에 묻혀 먹고, 쑥떡이나 인절미는 조청에 찍어 먹으면 천상의 맛이었다.
곳감도 귀하고 과일도 귀했다.
명절이면 동네마다 돼지를 잡았고 집마다 필요한 만큼 열 근, 스무 근씩 나누었다.
제사상이나 음식에 쓸 고기를 남겨 두고는 일가친척집에 선물로 나누곤 했었다.
당시에는 김 한 톳이나 돼지고기 두 세근을 신문지나 종이에 둘둘 말아서 서로 나누었다.
선물 배달은 주로 나의 몫이였다.
큰 누님이 시집을 갔을 때는 사돈 집, 수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전해주기도 했었다.
우리 집에도 설날이면 서울로 돈 벌러 간 누나와 형님을 기다렸다.
전라선 완행 열차를 타고 내려와 곡성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오던지,
호남선을 타고 광주에서 내려 시외버스를 타고 오곤 했었다.
그 뒤에는 회사에서 마련해 준 버스를 타고 오기도 했었다.
곡성으로 오는지 광주로 오는지 몰라 삼기 지서쪽을 보다가, 국민학교쪽을 바라보다가 했었다.
2, 3시간 만에 한 대씩 있는 시외버스,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 길을 달려와 버스 정류장에 선다.
눈과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가 가족이 오지 않으면 작은 실망과 허탈감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다음 배차 시간까지 마냥 기다리고 ...
핸드폰이나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어릴 때는 기다림이 일상이고, 당연지사고, 조급함 없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곤 했었다.
살기 힘들어 진학을 못하고 서울로 돈 벌러간 젊은이들이 어디 한 두명이었던가
대부분 가정에 한 둘은 있었다.
손에 손에 선물을 들고 버스를 내리는 그들은 개선장군 같았다.
10시간 이상 걸리는 이동에 몸도 지쳤을 뻔 한데
오는 자나 기다리는 자나 만남의 반가움에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었다.
근래에는 설. 추석 명절에 민족 대이동이라고 매스컴에서 방송을 하여 알지만
당시만해도 라디오 하나 의지하고 살던 시절이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지 잘 알지도 못했었다.
각 가정에서 차례상을 차리고 제사를 드린 후에 어른들에게 세배를 했다.
그리고 성묘를 하러 갔었다.
내려 와서는 일가 친척집을 찾아 세배를 드리고 차려주는 음식에 배불렀던 시절이다.
쥐어 주는 세뱃돈을 고이 접어서 호주머니에 집어 넣고는
덕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리고, 차려주신 음식에 정신을 뻬았겼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한 친척 집에서 접시에 내어 주신 설탕을 입으로 핧아 먹다가
큰누님에게 크게 혼이 났었다.
명절이면 뭐니뭐니해도 새 옷이 선물로 주어졌다.
설빔으로 한 복을 입어본 적은 없다.
일년에 한 두벌 새 옷을 입어 본 것이 전부이던 시절이다.
새 옷이라도 얻어 입는 날이면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재질이 좋지 않던 시절이라 불 똥이 튀어 옷에 구멍이라도 나는 날이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양말도 그랬다. 오래 싣어 구멍이 나면 어머니가 백열 전구를 안에 넣고 실로 꿰매 주셨다.
양말만 그랬었나, 검정 고무신도 찢어지면 흰 실로 깁어 싣었었다.
고무가 닳아서 바닥에 구멍이 나면 모를까. 비오는 날이나 잘못하며 미끄러지면 찢어지곤 했었다.
그 당시는 그것이 창피하지도 않았다. 다 그랬으니까...
어릴 때 떡국에는 계란과 닭고기가 들어 갔었다.
가끔은 닭을 잡다 보면 아직 계란이 되기 전 메추라기 알만한 크기의 알들이
줄줄이 여러 개가 같이 삶아서 나오곤 했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쇠고기가 들어간 떡국을 먹었다.
떡국에 닭고기를 넣었다고 하자 이해를 못하던 도시 출신 또래들도 있었다.
우리 동네는 면사무소 앞이 주로 놀이터였다.
팽이 치기, 딱지 치기, 냇가가 얼면 썰매 타기 ...
어른들은 윷놀이, 하투놀이를 하시곤 했다.
나무 판자로 썰매를 만들고 굵은 철사나 창문 틀에 있던 굵은 철사를 바닥에 고정해 만들었는데
나는 그것도 없었다. 만들어 줄 어른이나 형들이 없어 친구들에게 얻어 타곤 했었다.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없는 것 투성이었다.
그렇지만 크게 불평하며 투정을 부려본 적이 거의 없다.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살았던 시절이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부족함에 대해 크게 불편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살고 있다.
또 무엇이 있었을까?
명절에 가족들이 다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였다.
회귀 본능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오고 가는 길이 그렇게 힘들어도 고향을 찾고 부모를 찾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음 명절이 되면 또 힘든 긴 여정을 이동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찾아갈 고향이 없다. 아니 고향은 있으나 일가친척이 없다.
산소만이 고향의 끈을 잇고 있다.
설에 대한 인식도 변했다.
설 명절의 풍속은 바뀌어 가고, 명절 음식도 달라지고
설 명절에 나누는 선물의 내용도 달라져 간다.
나 또한 역귀향으로 딸과 외손주들을 보러 서울로 간다.
나도 고향을 찾지 못하고 객지에서 살다가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한다.
많은 이들이 명절에 해외 여행을 하고 국내 여행을 한다.
명절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한다는 명분만은 지키면서 ...
설날이다.
단톡방에 올라온 고향 동기의 글귀가 이 글을 쓰게 했다.
다들 설날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을 것이다.
기억으로나마 고향산천을 향한다.
보고 싶은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려 본다,.
가족들과 함게 모두들 즐겁고 행복한 설 명절 잘 보내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