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영성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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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 네움 에트 톨레 데움 2024. 6. 4. 10:55

본문 : 사도행전 15장 36-16:15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대한 본문이다.

 

1차 선교여행 후 지친 몸을 회복하고,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와의 할례와 모세의 율법 준수라는

갈등의 문제를 해결한 후 다시 선교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모은다.

 

그러나 출발부터 바나바와 바울의 갈등으로 삐거덕거렸다.

갈등의 원인은 1차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마가 요한과 이번에도 동행할 것인지 문제였다.

마가가 1차 여행 때 힘들어선지, 풍토병으로 병을 앓아선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도에 선교여행을 포기하고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바나바는 상대방을 배려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는 입장이었고,

바울은 준비가 않된 선교사는 같이 갈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바나바는 마가 개인적인 유익을 고려한 반면, 바울은 공동체의 유익을 중시했다.  

둘다 진심이고 옳은 생각들이었지만 그럴수록 서로 양보의 여지는 좁아졌다. 

다름과 그름은 다르다. 

그러나 먼 훗날 이 사건을 뒤돌아보면 이것이 마가에게는 성숙의 중요한 기회였다.

또한 말년에 바울이 마가와 동역한 것을 보면,

바울도 더 성숙하여 과거 미성숙했던 마가를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마가도 반성하고 성숙해져서 선교에 대한 바울의 신뢰하는 동역자가 될 수 있었고, 

마가복음도 기록하는 등 하나님 나라 사역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교회 안에서, 당회 안에서 다른 생각 때문에 수많은 갈등을 겪는다.

담임 목사를 옹호하는 장로들과 교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로들의 의견은 다르다.

오늘 바나바와 바울의 갈등과 진배없다. 

누가 옳고 누가 틀림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로 서로 갈등과 반목을 하다보면 나아가 갈라서는 상화으로 발전한다.

인간인지라 자기의 생각이 밀리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기분이 상하고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상대방을 좋게 생각하지 않고 거리감을 두게 되며, 관계가 소원해진다.

그러다가 또 어떤 문제로 부딪히면 반대편에 서게 되고 갈등을 빚으며 관게는 악화된다. 

감정이 있는 인간인지라 결코 말과 이성만으로는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지혜가 필요하다. 성령의 도와주심이 필요하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할 때,

하나님은 다양한 기질과 견해를 새 사역의 원동력으로 삼으실 것이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고향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다. 

본문은 "바나바와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부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나바는 더 이상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방선교는 바울의 선교여행만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아마도 시리아 안디옥을 출발하여 고향 다소를 지나 투루스 산맥의 관문을 지나 더베로 갔을 것이다.

거기서 더베- 루스드라 - 이고니온을 지나면서 1차 때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을 만나 교제하고 격려한다.

그리고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라는 새로운 동역자를 만난다. 

디모데는 믿는 유대인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지역의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고 있었던 제자였다. 

바울은 마가 대신 디모데를 동역자로 세운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하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다.

바울은 할례를 복음의 본질로 호도하는 것은 격렬히 반대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는 할례라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얼마든지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 사역에 있어서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를 잘 구분하여야 한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계획했던 2차 선교여행의 길이 자꾸만 맞힘을 맞이한다.

길이 막힐수록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과 방향은 선명해진다. 

부르심을 따라 바울은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향하고, 빌립보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루디아를 만난다.

루디아와 그 가족은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되고, 루디아의 집은 유럽 선교의 전초기지가 된다. 

이렇듯  내가 계획한 길이 막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안내표시 일 수 있다.

막막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그 길에서 우리는 루디아같이 때가 찬 영혼들을 만날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은 이런 것이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바로 유럽으로 건너가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성령님은 기다리신다.

몇 번의 자신의 계획이 막힘을 경험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계획하심을 묵상하게 된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계획에 의지하려고 할 때 성령께서 결정적으로 개입하심을 본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매번 이렇게 선명하게 성령님의 말씀해 주심과 인도하심을 기대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바울도 이런 과정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졌을 것이다.

동족의 구원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바울은 아시아 지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성령은 온전히 이방 민족들의 나라로, 완전한 이방 선교로 나아가게 하신 것이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끝까지 전해져야 했다.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그리고 모든 열방과 모든 족속에게 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깨닫고 살아가는가? 

이것이 신앙인들에게 커다란 어려움이고 힘든 장애물이다. 

지금도 필요하다면 꿈과 환상으로 보여주실 수 있지만,

물론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때론 설교 말씀 속에서, Q.T하면서, 성도들과의 대화 속에서, 비기독교인과의 대화 속에서도 

성령의 음성과 인도하심을 경험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무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지 못하거나, 오래 걸리고, 한참 지난뒤에야 깨닫는다.

개원하려고 여러 곳을 물색하며 다니다가 계약 일보 직전에서 무사되는 것을 경험한 적 있었다.

3번째 계획이 무산되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은 적이 있었다. 

 

얼마나 민감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을까?

그것은 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와 교제 속에서만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저 친구의 표정과 눈짓만 봐도 무슨 뜻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이다.

특히 운동 선수들 사이에서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을 말할 때 자주 언급된다.

아니 부부관계도 그렇지 아니한가?

수십년 같이 살다보면 표정 하나 하나, 말 하나 하나,행동 하나 하나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나와 하나님과 성령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성령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지 어느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이 합당해 보인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다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위해서는 날마다 기도와 말씀 묵상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하고 있고, 우리의 귀가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일 때

성령의 말씀하심과 인도하심을 빨리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 여행이 그렇다고 본다.

마가의 훈련과 성숙이 필요했고, 바울도 당시의 상황을 뒤돌아보며 이해하고 사랑으로 포용하며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역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완벽한 계획이다.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키기 보다는 내 생각과는 다른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말씀하심에 바르게 깨닫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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